진정한 아재의 본보기-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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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아재의 본보기-김성일

필리핀 1 636

1590(선조 23) 3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으로 향했다. 1479(성종 10)에 떠났던 조선통신사가 일본의 사정 때문에 제대로 일을 보지 못하고 돌아온 이후 110년 만의 파견이었다. 1443(세종 25) 정사 변효문, 부사 윤인보, 서장관 신숙주 등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것부터 따지면 147년 만의 일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조선통신사 파견이었다. 때문에 이들의 임무는 막중했고 어깨는 무거웠다.

 

조선은 일본 사신이 올 때마다 부산까지 선위사를 보내서 맞이했다. 그런데 조선통신사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일본은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예빈시 정으로 있으면서 일본 사신을 접촉한 경험이 있는 김성일은 이때부터 마음이 불편해졌다.

류성룡, 조목과 함께 퇴계 이황의 3대 제자로 꼽히는 김성일은 ()’를 중요시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에서도 예의가 무척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선이 일본 사신을 예우한 게 있으므로 조선통신사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본토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토요토미를 만나서 선조의 국서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토요토미는 조선통신사와의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속절없이 몇 개월이 흘러가자 조선통신사는 대책회의를 가졌다.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고 있을 게 아니라 하루 속히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갑시다. 토요토미의 측근에게 예물을 주고 면접 일자를 빨리 잡아달라고 부탁하는 게 어떻겠소?”

황윤길의 주장에 김성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개인 자격으로 온 것도 아니고 조선을 대표해서 왔는데 어찌 편법으로 체통을 잃는단 말입니까. 나라의 존엄성과도 관계된 일이므로 절대 불가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토요토미를 접견하게 되었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한 토요토미는 시종일관 업신여기는 말투와 행동을 했다. 게다가 접견이 끝나자 국서에 대한 답신을 줄 테니 백리나 떨어진 포구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토요토미의 무례한 모습에 조선통신사 일행은 화가 치밀었지만 참았다. 그런데 포구에서 기다리다가 답신을 받아든 조선통신사 일행은 깜짝 놀랐다. 토요토미가 보내온 답신에는 조선의 임금을 일본의 신하로 취급하면서 우리는 명나라를 칠 것인데 조선은 일본의 신하가 되어 앞장서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15912, 우여곡절 끝에 1년여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조선통신사 일행은 각자 보고서를 선조에게 제출했다.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의 보고서는 일본은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김성일의 보고서는 달랐다.“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정황은 보지 못했습니다. 황윤길은 쓸데없는 말로 민심을 어지럽게 하므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서로 반대 정파였던 황윤길과 김성일이 상대를 인정하기 싫어서 각기 다른 의견을 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사실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제대로 정탐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일본이 정해준 숙소에 머물면서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황윤길은 당시 떠돌던 소문을 토대로 전쟁 경계론을 편 것이고 김성일은 가뜩이나 살기 힘든 백성들에게 전쟁 준비한다고 성을 쌓는 일 따위를 시켜서 더욱 어렵게 할까봐 전쟁 낙관론을 주장한 것이었다.

 

1592413,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 김성일은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구의 노략질 수준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대부대가 몰려왔다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게도 부정하고 싶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왜적의 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고을을 지키던 관리들과 병졸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데다 왜적의 기세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경상우도 병영이 있는 창원으로 급히 달려갔다. 마침 정찰하러 나온 왜군을 잡아 처단한 다음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왜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이 한 목숨을 바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일입니다.”

 

짧지만 강력한 내용이었다. 비록 자신의 오판으로 적의 침입에 대비하지 못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선조는 김성일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통신사로써 잘못된 보고서를 올린 죄를 따지기 위해서였다. 그 소식을 들은 김성일은 자신을 잡으러 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서울을 향해 말을 달렸다.

 

왜 김성일은 잡히면 죽을 게 분명한데도 다른 관리들처럼 도망가지 않고 서울로 달려갔을까? 그렇게 하는 게 며칠이라도 더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김성일이 충청도 직산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어명이 전달되었다.

김성일의 죄는 즉시 큰 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나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는지라 우선 적을 물리치는 일에 신명을 다할 것이며 죄는 나중에 다시 따지기로 하겠노라.”

선조가 이런 명령을 내린 것에는 당시의 상황이 워낙 다급했던 탓도 있지만, 김성일이 일부러 오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조정의 판단도 있었다. 특히 왕세자였던 광해군과 우의정으로 있던 류성룡이 김성일을 적극 변호했다.

김성일이 불성실해서 잘못된 보고를 한 게 아닙니다. 일본이 우리 통신사를 속이려고 술수를 꾸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김성일을 처벌하면 일본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술수에 넘어간 죄도 가볍지는 아니하나, 지금은 벌을 내리는 것보다 전쟁터에 나아가 싸워서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게 더 중요합니다.”

 

간언이 받아들여져서 체포령은 해제되었고 김성일은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었다. 초유사는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한편 의병을 모집해서 국란 극복에 앞장서는 지위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일본에 속수무책으로 밀린 것은 남쪽을 지키던 대부분의 장수와 병사들이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미처 전쟁을 대비하지 못했을 뿐더러 일본의 신무기인 조총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갈수록 전세가 불리해졌고 민심도 흉흉해졌다. 선조가 중국으로 망명할 거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게 되면 조선은 일본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어가는 꼴이 되는 것이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극적인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의병들의 궐기였다. 경상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이들은 오로지 내 가족과 내 삶의 터전을 왜적으로부터 지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때문에 사기가 드높았고 죽기 살기로 싸워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의병을 일으키고 그 의병들을 잘 조직해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계기를 마련한 데에는 김성일의 공이 컸다. 국조보감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성일은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진주를 잘 지키고 있었다. 이 두 사람 때문에 적은 호남으로 들어갈 수가 없자 금산을 거쳐서 호서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 역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순신과 김성일이 바다와 진주를 잘 지킨 덕분에 난리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1593, 해가 바뀌어도 조선 땅은 여전히 왜적과의 싸움에 휘말려 있었다. 오랜 전투로 백성들은 지쳐갔고 먹을 게 부족해서 고통 받는 사람도 늘어갔다. 김성일은 식량과 약품 등 필요한 물자를 보내달라고 조정에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김성일은 곡기를 끊고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하기로 했다. 보좌하는 장수들이 건강을 생각해서 식사를 하시라고 여러 번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돌림병까지 번져서 환자가 발생했다. 김성일은 환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병세를 살폈다. 보좌관들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백성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던 김성일은 결국 돌림병에 걸리고 말았다. 워낙 허약해진 몸이어서 이내 자리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어쩌면 김성일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차하게 생명을 부지하다가 전란이 끝난 후에 다시 논란에 휘말리느니, 차라리 이쯤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자신의 실수에 대한 속죄이며 스스로에 대한 명예회복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해 429, 김성일은 진주성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행동이다.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온갖 변명을 늘어놓거나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서 물 타기를 하거나 침묵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실수나 잘못을 지적한 상대에게 오히려 갖은 비난이나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있다.

 

뻔뻔함과 염치없음으로 무장한 오합지졸들이 횡행하는 오늘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그것을 만회하려고 애썼던 김성일의 모습은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고 백남기 농부님의 명복을 빕니다.

1 Comments
emille 2016.09.28 01:1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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