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살고 싶은 청년
가난하게 살고 싶은 청년 <by 첫 휴가, 동남아시아>
“가난하게 살고 싶어. 그게 더 행복하니까.”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여행을 하며 가난하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사람은 종종 봤지만, 가난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살며 처음 만나보는 유형의 인간. 그가 궁금해졌다.
늦은 밤 방콕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아늑한 휴게실로 내려가 쇼파 위에 쿠션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내게 한 청년이 먼저 눈인사를 건넨다. 그의 첫인상은 뭐랄까, 프렌치의 시크함과 홈리스의 누추함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무심한 듯 소탈한 듯 가난한 듯. 그를 잘 모르지만, 왠지 그다워 보였다.
남프랑스 출신이라는 클레멘트는 5개월째 아시아를 여행하는 중인데 얼마 전 태국에서 스무 살을 맞이했다고 한다. 유치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엄마 앞에서 또박또박 설명하는 아이처럼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는다. 그나 나나 은유나 비유 없이 솔직한 영어를 쓰는 외국인이었기에 대화는 끝말잇기처럼 단순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태국에 와서 웃는 법을 배웠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전엔 안 웃고 살았어?”
“아니, 그전에 웃었던 건 진짜 웃음이 아니었던 것 같아.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은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웃어. 여기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 같은 웃음. 나는 그게 정말 좋아. 스무 살에 이런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 기뻐.”
내 기준에 그는 지나치게 순수했다. 가난하게 살고 싶다느니, 그게 더 행복하다느니, 넉넉하게 가진 프랑스 사람들은 불행하다느니, 말도 안 되게 이상적인 얘기다. 어쩌면 그는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 프랑스에서 자라난 덕에 찢어지게 가난한 삶은 실제 구경도 못 해봤겠지. 그렇긴 해도 돈의 권력을 모를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기에, 나는 그의 철학에 기꺼이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어째든 자신을 둘러싼 삶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일이니까.
돌아보면 스무 살의 나는 가난이라면 진저리가 났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닥치는 대로 쉴 틈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래도 겨우 입에 풀칠할 만큼의 돈밖에는 손에 쥐지 못했다. 늘 바닥을 보이는 통장 잔고는, 한 달이라도 아르바이트를 쉬었다가는 밑바닥을 뚫고 내려갈 듯했다. 스무 살의 나는 진심으로 부자가 되고 싶었다. 아무리 열심히 써도 다 쓰지 못할 만큼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무모한 바람을 비웃듯이, 스무 살엔 돈이든 사랑이든 행복이든 붙잡으려 달려가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곤 했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던 스무 살은 늘 애타고 분했다.
만약 스무 살의 내가 지금의 클레멘트를 만났더라면, 분명 ‘행복이 밥 먹여주는 줄 아는 멍청이, 가난이 뭔지도 모르는 순진한 녀석’이라고 생각한 채 등을 돌렸을 것이다. 그와 나의 스무 살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으니까.
스무 살의 나는 항상 돈이 없다는 것만 부끄러워했지, 정작 삶의 철학이 없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다.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방패 삼아서 삶이 던지는 질문을 요리조리 피하며 비겁하게 굴었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없다는 것임을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다.
스무 살의 클레멘트는 자신을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당당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문득 허름한 부랑자같은 클레멘트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가 어떻게 생겼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으니까. 어쩌면 나는 이 청년의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