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맨부커상, 강남졸부,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홈 > 커뮤니티 > 그냥암꺼나
그냥암꺼나
- 예의를 지켜주세요 / 여행관련 질문은 묻고답하기에 / 연애·태국인출입국관련 글 금지

- 국내외 정치사회(이슈,문제)등과 관련된 글은 정치/사회 게시판에 

그냥암꺼나2

한강, 맨부커상, 강남졸부,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필리핀 9 820


 

 

나는 어떤 이의 집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책꽂이가 있는지를 둘러본다.

책꽂이를 발견하면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를 살펴본다.

책꽂이에 꽂힌 책으로 그 집 주인의 성향을 짐작하기도 하고

내 집 책꽂이의 책과 어떤 책이 겹치는지를 비교하면서

그 집 주인과 나와의 정서적 교감의 농도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그것은 새로운 집을 방문했을 때만 맛볼 수 있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즐거움이자 일종의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런 즐거움이 차츰 사라지고 있다.

책꽂이가 있는 집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독서율이 하락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책 대신 인터넷이나 SNS에 빠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웅진그룹 창업주인 윤석금 씨는 1970~80년대의 신화적 세일즈맨이다.

당시 그가 팔았던 물건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1768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처음 나온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현재까지 영어로 출판되고 있는 백과사전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세 권짜리로 시작해서 열 권, 열여덟 권, 스무 권, 스물한 권으로 늘어났다.

대영제국의 영향력과 함께 전 세계로 펴져나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현대사회의 지식 기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 하다.

윤석금 씨는 한때 전 세계 판매량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웠다.

그때 모은 돈으로 웅진그룹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윤석금 씨의 이러한 활약은 영국 본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직 개발도상국가에 지나지 않는 아시아의 소국에서

세계적 수준의 백과사전을 이렇게나 많이 사들이다니!

게다가 한국어판도 아니고 영어판을!

그랬다. 윤석금 씨가 판 것은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아니라

영어판, 즉 원어로 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한국에서 영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미친 듯이 팔렸을까?

이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대한민국에서 강남신화가 불이 붙던 시절이다.

허허벌판이던 강남땅에 아파트와 고층건물이 마구 들어섰다.

논밭 팔아서 돈벼락 맞은 사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들은 막 지어진 아파트에 앞 다투어 입주했다.

새집으로 이사를 하고보니 거실이 썰렁했다.

TV와 오디오와 냉장고를 사도 허전함은 메꿔지지 않았다.

그때 혜성같이 나타난 이가 바로 윤석금 씨였다.

그는 졸부들의 아파트 거실에 책꽂이를 들여놓고

그 책꽂이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으로 채우라고 꼬드겼다.

세계 최고의 백과사전으로 거실을 장식하라는 전략은

졸부들의 콤플렉스를 자극하여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얼마 전 한강 씨가 쓴 장편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채식주의자>는 상당히 잘 쓴 소설이고 매우 수준 높은 소설이다.

세상의 그 어떤 상을 받아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 수상을 둘러싸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행태가 가관이다.

일개 출판유통업체가 만든 상을 세계 3대 문학상이라고 떠벌이는 언론의 호들갑...

10년 동안 6만부 팔린 책을 불과 하루만에 2만부나 사들인 독자들의 기민함...

이 장면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강남 졸부가 겹쳐지는 건 왜일까?

 

<채식주의자>는 분명 훌륭한 소설이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소설이다.

평소 소설책을 안 읽던 독자는 소화하기 힘든 소설일 수도 있다.

출판계는 한강 씨의 맨부커상 수상을 계기로

침체기에 빠져 있는 한국문학이 살아나기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의 생각을 한다.

한강의 소설을 읽고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 독자들은

영영 한국문학을 떠날지도 모른다.

출판계 종사자들은 솔직해야 한다.

무턱대고 졸부를 꼬드기던 윤석금 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2년 전에 내가 쓴 소설책을 직접 사인해서 보내준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들 중 내게 소설에 대한 독후감은 고사하고

책 잘 받았다.”라는 의례적인 말이라도 한 사람은 단 1명뿐이다.

그 사람들이 순무식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 직원도 서너 명이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이도 두어 명이나 된다.

우리 사회에서 지적으로 중산층 이상은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책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도 아닌,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의 책조차도.

 

책은 지식이 쌓이게 해준다.

인터넷이나 SNS는 정보가 쌓이게 해준다.

지식은 논리적 사고의 바탕이 된다.

정보는 감각적 판단의 바탕이 된다.

얼마 전의 모임에서도 느꼈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뛰어나지만,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미숙하다.

때문에 대화가 서너 마디 이상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서너 마디 대화라는 것도 연예인 뒷담화가 대부분이다.

돌아서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에 남지도 않는...​

지금처럼 독서율이 갈수록 떨어진다면,

책을 단순히 폼 잡는 도구로만 여기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의 지적 수준은 점점 낙후될 것이다.

 

오늘도 방구석에 처박혀서 치질이 도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며 팔리지도 않는 책을 쓰고 있을

이 땅의 이름 모를 작가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싶다. 

 

9 Comments
sarnia 2016.05.29 22:41  
독서량과 사고력이 그다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타고난 능력’ 보다는 후천적으로 개발될 사고력의 폭이 더 넒은 것이다,, 라고 믿는 편이었는데,,, 상당한 독서량을 보유하고 있을 법한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에서 드러나는 한심한 논리의 빈곤을 목격하면서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10 분 독서하고 한 사간 사고하면서 남의 것을 그대로 암기해서 저장만 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재생산하는 훈련을 거듭하지 않으면 저런 이상한 인텔리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 몇 번 있었습니다.
나 이 책 샀어요! 하고 책수집을 자랑하는 일이야 귀여운 짓으로 봐 줄 수도 있지만,  방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엉뚱한 소리를 지껄여대는 지식인들은 참 대첵이 없어요.
분당리모부 2016.05.30 02:28  
나 이 책 샀어요.. 자랑하는 분이 한 분 계시죠.. ㅎㅎ 뿜었습니다.
sarnia 2016.05.30 03:04  
그 책 수집가 께서 얼마 전 청정도론이라는 불교서적을 4 년 째 읽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참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지요. 저는 빌려온 옛날 추리소설 제5의 사나이를 화장실에서 넉 주 째 읽고 있는 바람에 한인도서관에서 빨리 책을 반납해 달라는 독촉문자가 오기 시작했는데 말이죠. 

그 분께서 수집했다고 광고하신 책 중에는 국내 종교학자가 쓴 신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게 있는데, 저는 완독을 하기는 했지만 히브리경전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전혀 재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분께 긴 댓글까지 달아가며 독후감을 좀 올려주십사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반 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아직 답이 없지만 말이죠.
필리핀 2016.05.30 07:58  
책을 읽긴 읽어도 출세하는 법 돈 버는 법...
이따위류의 성공학 서적만 본다는 게 문제죠...
그런 책 읽으면 자연히 졸부의 세계관을 갖게 되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만 잘 되면 된다...
철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인문학 서적을 읽어야
영장류로써의 최소한의 지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데...
요즘 인문학의 위기는 심각한 상태에요... ㅠㅠ
요술왕자 2016.05.29 23:04  
저는 가뜩이나 책 한장 넘기는데 오래 걸리는데... 어렵다니 한참 걸릴 듯하네요...
필리핀 2016.05.30 08:01  
아이고! 요왕님께서 웬 엄살을... ^^;;;
시나 소설 등 문학작품은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문장에 스며들듯이 책장을 넘기세요...
그러다보면,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가슴 속에 뭔가 뭉클한 게 남을 겁니다...
그게 바로 감동이죠... 그거면 족합니다... ^^
요술왕자 2016.05.30 08:17  
특히 등장인물이 많은 소설은 이사람 누구지? 하면서 앞으로 가서 그사람 나오는 대목을 다시 찾아 읽고와야... -_-;;
문학 이해력이 떨어지는가 봅니다. 저는 만화책도 무척 오래봐요... ㅎㅎ
zipper 2016.05.30 11:34  
아리러니 하게도 영문판 백과사전이 그렇게 많이 팔렸던 시기에
영어를 쓰면 벌금을 물어야 하는 시기였죠.

길거리 간판에 외국어로 되어 있다고 신고를 하면 벌금을 물리던 황당한 시기에
영문판 백과사전이 그렇게 많이 팔렸다니,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아프로벨 2016.05.31 05:54  
책을 사는 사람들.
그게  지적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이던,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던,
서재를 꾸며놓고  빈 서고를 채우기 위한 액세서리 정도 쯤 이던,
다~~ 좋아 보이기만 합니다.

저의 선친께서도 워낙 책 사시는걸 취미로 하셔서 엄마와자주 다투셨는데,
아버지의 책사랑이 어찌나 대단하셨는지
엄마가 1년에 열여섯번 지내는 기제사에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궁핍한 살림에 보태고자
아버지가 사오셨던 책 한질을  이웃 부자집 여선생댁에 팔았는데
엄마는 그날 바로 쫒겨나서 옆동네 팔판동 사시던 고모네집으로 피난가셨고,
아버지는  이웃 여선생의 남편에게 사정 사정 통사정하셔서 겨우 책 한질을 반송 받으셨었지요.
고모의 중재로 사흘만에 겨우 집에 오신 엄마는 책이라면 넌더리가 난다고 하시며
아버지하고 오랫동안 말 안하고 사셨어요.
저희 4남매가 평화의 메신저 비둘기가 되어.....
마누라보다 더 소중하고 자식만큼 사랑했던 그 많은 책들을 두고 어찌 그리 일찍 가셨는지...

신새벽..... 대체 제가 뭔 호랑이 담배 피우던시절 애기를 하는지,,,ㅎㅎㅎ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