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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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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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바둑 좀 두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세돌이나 정환이 같은 실력의 소유자는 아니고요.

그들이 강호를 호령하는 맹주라면

저는 뒷골목에서 아이들 삥이나 뜯는 똘마니라고나 할까요.

 

저에게 바둑을 가르쳐준 분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마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을 겁니다.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은 아버지는 제게 9점을 깔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기력은 동네 5급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바둑판 위에서 아버지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해왔고,

초보자인 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번 그랬습니다.

바둑이 끝나고 무참하게 죽어 나자빠진 돌들을 들어내면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둑을 둬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지.

너는 성격이 소심하니까 늘 물러서는 거야.

나 봐,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적이잖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제 바둑 실력은 일취월장했지만

아버지와 대국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항상 밖으로만 떠돌았던 탓에 서로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드물었으니까요.

제가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수담을 나눈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바둑이나 한 판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황급히 바둑판을 들고 거실로 나갔습니다.

“어떻게 둘까?”

“다섯 점만 놓으세요.”

아버지는 말없이 화점 위에 돌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어지럽게 판을 짜나갔습니다.

변화무쌍한 행마를 거듭하면서 호시탐탐 흑의 대마를 노렸습니다.

제가 워낙 강압적으로 몰아붙이니까

아버지는 우왕좌왕하면서 뒷걸음질 치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항서를 쓰고 말았습니다.

이후 두 판인가를 더 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두실래요?”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바둑돌을 쓸어 담고는 안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바둑에는 상수의 프리미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접바둑의 경우 상수가 공격을 하게 되면 하수는 물러설 수밖에 없습니다.

기력의 차이 때문이지요.

괜히 오기로 맞붙어 싸웠다가는 십중팔구 피를 보게 마련입니다.

당연히 상수는 공격적이 되고, 하수는 수성하는 입장이 됩니다.

물론 맞바둑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기풍이라는 것이 있는데, 각자의 성향이 드러나는 것은 그런 진검승부에서지요.

“나 봐,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적이잖아!”

저는 아버지의 그 말씀을 30년 넘도록 곱씹고 또 곱씹으면서 살았습니다.

가슴에 피멍이 들 정도로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바둑판을 앞에 놓고 복기를 하면서,

“보세요, 비겁하게 물러서는 건 아버지잖아요.

공격적인 건 오히려 저라고요”라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그 말씀은 한낱 호기에 불과했습니다.

어리석게도 그 말에 비분강개하면서 오십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재작년 겨울,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입관하는 날, 염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망에 사로잡혀 살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공유했던 추억이 이다지도 없단 말인가, 하는 자괴감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생에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세요.”

마지막 순간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5 Comments
songhee 2014.12.16 09:16  
참 짠하네요~~~
참새하루 2014.12.16 10:23  
짤짤님의 글은 늘 짠합니다

아이디를 짠짠으로 바꾸심이...^^

저도 아버님을 일찍 여의었고
늘 마음속에 그 한을 품고 삽니다

저는 아버님과 장기를 두었는데
중학교 내내 늘 지던 장기를
 별세하시기 한 일년전쯤
고 2때인가
늘 지던 장기를 처음으로
이기고 나서 쾌재를 불렀는데

장기판 들고 묵묵히 일어서던 아버님의
뒷모습이 왜 그리 작아보이던지...

그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게 장기를 두었던 마지막 판이었던거지요

저도 아버님과 이리도 추억이 없었는지
후회됩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에게는 그  추억을
남겨주려고 애쓰고 삽니다
queenst 2014.12.17 11:04  
그저 ㅠ_ㅠ ㅠ_ㅠ ㅠ_ㅠ ㅠ_ㅠ ㅠ_ㅠ
지구별행성인 2014.12.17 13:46  
아쉬우시겠습니다..
떠나가신 분 잘 가시라고 남은 인생은 다르게 살아보셧으면 합니다. 응원할게요!
라오라오라오스 2014.12.18 17:41  
멋진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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