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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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를 위하여

짤짤 8 463

어릴 적 아버지는 거대한 벽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눈길이 마주치는 것조차 두렵고

숨소리마저 들킬까 조심스러웠던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습니다.

나이 사십이 넘도록 그 울렁증은 제 안에 원죄처럼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은 건 8년 전이었습니다.

“오빠, 여기 적십자병원이야. 아빠 뇌경색이래. 좀 와줄래….”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여동생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습니다.

“큰오빠는 해외출장 중이고, 나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니 버겁네.”

여동생의 성격상 그런 전화를 하기까지 적잖은 갈등을 했을 게 분명하지만

저는 선뜻 그러마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버지와 연을 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아버지 뵐 면목도, 볼 자신도 없었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돌아서는 순간, 현기증 같은 것이 아뜩하게 밀어닥쳤습니다.

 

적십자병원에서 길병원으로,

차병원에서 다시 안양병원으로 아버지의 병원 순례는 계속되었습니다.

치매환자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체계가 그렇게 되어 있다더군요.

병원을 옮길 때마다 형과 여동생 사이에는 다툼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도대체 종합병원을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시설 좋은 요양원도 많은데….”

“난 1%의 가능성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이미 치매까지 와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양반이야. 의사들도 가망이 없다는데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이번 기회에 요양원으로 옮기자고.”

그러나 여동생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믿음은 완고했습니다.

그 집착은 거의 맹종에 가까웠습니다.

 

여동생이 집을 나온 건 대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빨래판이 쪼개지도록 얻어터진 다음날이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그날 이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니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할 때까지 여동생은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 4학년 가을 무렵, 회사 근처라며 여동생이 전화를 했습니다.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웠기에 갈비탕이나 한 그릇 먹여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웬일이야?”

“교생실습을 나가야 하는데 변변한 정장 한 벌이 없네.”

여동생이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녀가 제게 부탁이라는 것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날 제가 여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만 원짜리 열 장이 전부였습니다.

그건 제 한 달치 용돈이기도 했습니다.

지갑을 탈탈 털어주고 나니 갈비탕 한 그릇 사줄 돈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 넘도록 저는 아버지의 병실을 찾은 적이 없었습니다.

병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형이나 여동생을 만나 아버지의 근황을 듣는 게 전부였지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안양병원 근처 다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여동생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나는 아빠가 나를 찾아올 줄 알았어. 근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는 거야. 오죽했으면 졸업하면서 과사무실에 내 연락처를 남겼을까….

언젠가 휠체어를 태워드리면서 물었어. 그때 날 찾지 않았냐고.

그랬더니 아빠가 그러더라. 몰랐다고… 몰랐다는 거야….”

테이블 저편에서 여동생이 울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제 누이가.

모르기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여동생이 그런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안 그랬으니까요.

“오늘은 뜬금없이 해오름이 소식을 물으시더라. 대학생이 되었다고 했더니 깜작 놀라는 표정을 지으시데. 아마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러더니 통장에서 500만원만 찾아 주라는 거야. 등록금 하라고….

내가 왜 아빠한테 집착하는지 알아? 이제야 겨우 아빠를 안아주고 쓰다듬어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사람들은 쉽게 말하곤 합니다.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정말 그럴까요.

인디언 말로 친구는, 상대의 아픔을 대신 등에 지고 가는 이라는 의미랍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수학공식이나 과학이론을 이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문제겠지요.

 

인천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모신 첫날, 아버지가 누워계신 병실을 찾았습니다.

여동생의 거듭된 설득에 못이기는 척 따라나선 거지요.

침대 발치에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도 생경했습니다.

삭발을 한 채 초점 잃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그만 목이 메고 말았습니다.

“아빠, 작은오빠 왔어. 짤짤이오빠. 알아보겠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던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아버지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렸습니다.

저는 어색하게 아버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병실을 나올 때 아버지는 제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셨습니다. 어쩌면 지나간 시절에 대한 회한일지도 모를 그리움으로 오랫동안.

8 Comments
잡초야 2014.12.07 13:25  
참  세월이란.....  해결사 !!
시골길 2014.12.07 16:41  
부모님...살아생전 보다는 떠나신 후가... 더 힘들더이다.
아마도 짤짤님과 누이분도 그러하시리라 짐작하네요..ㅡ,.ㅡ
cafelao 2014.12.07 17:54  
마음이 참 짠하네요.
전 울아버지는 평생 안돌아가실줄 알았어요.
그래서 자주 뵈러 가지도 못했고 늘 제 생활이 더 급했었지요.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정말 정말 눈물이 났어요.
한 2년을 아버지 단어만 나와도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엄청 후회했어요.
살아계실때 한번더 뵙고 내손으로 밥이라도  먹여드리는건데 하구요.
홀로 계신 엄마는 절대 아버지때 처럼 그렇게 보내드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도 카페 로스팅기 분해해서 청소 하고
울마미 털신사러 백화점 한바탕 쏘다녔네요.
이제 코스트코가서 한컬레 더사서 낼 택배로 보내드릴려구요.
그나저나 짤짤님 가슴속도 뭔가 가득 차 있군요.
이제 하나 하나 비워보세요.
시골길 2014.12.07 21:09  
카페가 어디에용..? 로스팅기 소제후에 뽑은 커피...땡깁니더.. ㅡ,.ㅡ
짤짤 2014.12.08 22:05  
추위를 안 타는 편인데
두 달만에 돌아와보니 제일 적응이 안 되는 게
이놈의 겨울날씨네요. ㅠㅠ
참새하루 2014.12.08 02:40  
짤짤님의 가슴을 뭉클하게하는 포스팅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더욱 마음이 짠하네요

가족사에 얽힌 가족간의 사랑
이 일관된 주제는 영원한 우리 삶의
뿌리가 아닐까 합니다
짤짤 2014.12.08 22:03  
토요일날 귀국했습니다.
마지막 행선지가 하노이였는데,
케이비젼 사장님께서 참새하루님 오셨을 때 챙겨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 전해달라더군요.
참새하루님은 유명인사 가토~^^
참새하루 2014.12.09 04:00  
헉~~ 저의 정체가 드러났군요^^

케이비젼 사장님의 마인드라면
꼭 성공하실겁니다

동남아 여행중에 보기드문
서비스 마인드를 가지신 분이지요

여행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짤짤님 힐링되고
다시 한번 화이팅하는 기회가 되셨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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