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에 대하여
<바이블>은 고대 희랍어로 <The Books>에서 유래했습니다.
과거의 전통에 대해 열려 있고
앞으로도 새롭게 해석되어질 열린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 아래서
그들의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그들의 신인 여호와(혹은 야훼)께 묻고 있습니다.
성서는 중동 지방과 유럽, 북아프리카의 설화, 역사, 정치,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집대성한 유대의 사제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물론 성서는 현대적인 의미의 역사서는 아닙니다.
그 저자들이 현대 고고학 기법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고,
연대를 설정하고 자료를 조사하는 방식이 현재와 달랐으며,
역사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판단하는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성서의 주된 관심은 기본적으로 가나안이라는
작은 지역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역사서들은 이 지역에 상대적으로 작은 지면만을 할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성서는 오늘날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고대사에 대한 성서의 견해는
역사서보다 오히려 폭넓게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가 무대 저편으로 사라진 후 그의 가르침은
기억과 구전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살아생전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건 석가모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구전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는 늘 논란의 소지를 남기게 마련입니다.
예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말씀을 인용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같은 내용일지라도 사람의 입맛에 따라
다른 형태로 전달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 이용되기도 했고요.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가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해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진술이 전혀 달라지는 경우 말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단순히 유대교의 개량으로 받아들이는 쪽과
유대교의 급진적 변경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전자는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도 모세 율법의 우위를 주장했을 것이고,
후자는 이를 부정했을 것입니다.
거의 동일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4대복음서>를 비교하면서 읽다 보면
이런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유대적인 색채가 가장 짙은 마태는,
예수를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율법의 자구를 능가해야 한다고 가르친 인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간통을 삼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정욕을 품는 것조차 용납해서는 안 된다,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모세 율법은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했을 경우 동종의 보복을 허용하고 있지만
예수는 아예 보복을 않는 것을 높이 샀습니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쉽다,
그것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 하는 자연스런 경향이다,
도덕적 완성을 원하는 사람은 그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하지 않느냐?”
여기서 세리는 최악의 예로 제시되었습니다.
세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로마의 세금 체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던 로마는 세금징수에 필요한 조직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부자들에게 조세징수권을 도급으로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거액을 상납하고 특정 식민지의 조세징수권을 샀습니다.
로마 입장에서 보면 그들에게 받은 돈이 세금이었던 셈입니다.
징수권을 구입한 사람들은 식민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서
자기들이 지불한 금액을 벌충해야 했습니다.
이것도 사업이므로 많은 이익을 기대하는 건 당연한 이치겠지요.
그들의 토색은 가혹할 수밖에 없었고, 유대인들에겐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예수가 말한 세리는 그 부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말단 고용인들을 지칭한 말이지요.
어떤 면에서는 이들이 훨씬 악독했습니다.
죽어가는 아이의 옷도 벗길 만큼 무자비했으니까요.
이들 대부분은 생계수단을 위해 세금 징수원으로 나선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일제로부터 36년의 지배를 받는 동안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로마인은 맞서 싸워서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로마인의 존재를 용인하고 그들에게 세금을 내는 것도 나쁘지만,
그들 대신 세금을 거두어 바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거리였던 겁니다.
성서도 이런 식으로 접근해 보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책이랍니다.
역사, 문화, 정치, 사상이 망라되어 있거든요.
선입견도 문제지만 모르면서 용감하게 외치는 것도 옳바른 태도는 아니겠지요.
참고로 저는 신권주의와 인본주의는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