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론리 데이즈(Happy Lonely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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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론리 데이즈(Happy Lonely Days) <명로진>

조화나라 0 195
 
해피 론리 데이즈(Happy Lonely Days)   <명로진>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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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각을 품기 위해선 일단 머리를 비워야 한다. 머리를 비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떠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해외를 다녀오면서 확신하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그 형체를 드러내지 않던 희미한 생각들이, 나리타 공항이나 푸동 공항에 내리는 순간 퍼뜩 떠오르곤 한다는 것이다. 명동 지하철에서는 생각나지 않던 것이 긴자 지하철역에서는 잘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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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자유여행이다. 패키지 상품도 없고 가이드가 나타나 갈 길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삶의 중간 중간에 끊임없이 길을 물으며 가야 한다. 나 대신 길을 물어줄 사람도, 내 갈 길을 대신 가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을 물으며 가는 것, 길을 잃으며 가는 것, 묻고 또 잃으면서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다 보면 묻는 것이 지혜가 되고, 잃는 것이 얻는 게 된다.
그러므로 가끔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과 노닥거려라. 15분 단위로 시간계획을 짜는 일 따위는 접어둬라.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내 이야기는 조금만 해라. 내일의 일정은 미루고, 오늘 여기서 차와 와인을 마셔라. 하루를 일찍 마치고 집에 들어가 봐야 우릴 기다리는 것은 연속극뿐이고, 인생길을 먼저 달려가 봤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종장을 알리는 검은 막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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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라를 방문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언제 여길 또 오겠어?’ 이런 생각에 무리하게 걷고, 무리하게 뛰고, 무리하게 사진 찍는다. 그러다 보니 정작 누굴 만났는지는 다 잊어버린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헤어졌는지......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갔는지가 아니라 누굴 만났는지인데도.
어쨌든 나는 일정과 경비에 쫓기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멘트를 생각해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이렇게 마음먹으면 일정은 한결 여유로워진다. 내일 어딜 꼭 가야한다는 계획도, 오늘 밤에 뭘 꼭 해야 한다는 결정도 일말의 부담없이 보류된다. 한 번 이 멘트를 날리고 나면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우리가 사는 곳을 벗어나서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곳의 시간대로 산다면 여행이 아니다. 다음에 다시 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면 시간은 서울보다 두 배는 더 천천히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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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멕시코의 지방 도시 치와와로 방송 촬영을 간 적이 있다. 치와와의 중심지에는 남미의 도시들이 흔히 그렇듯 성당과 광장이 있었다. 그곳의 광장에서 세 명의 소녀를 만났다. 나는 약간의 스페인어로, 그녀들은 약간의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일본 사람인가요?”  “아니, 코레아노야.”
“이곳에는 무얼 하러 왔죠?”  “촬영을 하러 왔어.”
“무슨 촬영인가요?”  “멕시코의 아름다운 자연을 한국인들에게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지.”
“그렇군요. 혼자 왔나요?”  “아니, 두 명의 친구들이 더 있어.”
“그럼 모두 세 명이군요. 우리도 세 명인데....(까르르 웃는다)” “(기가 막혀 하며)그래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어요.”  “우리는 삼십대 후반이야. 너희는 몇 살이니?”
“우린 열여섯이에요.” “우린 모두 결혼했어.”
나의 이 말에 소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중 한 명이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Que problem?" "뭐가 문제냐”는 뜻이었다. 이 한마디가 내 뒤통수를 쳤다.
한국인 남자 기혼자이며 대졸자인 동시에 우물 안 개구리인 나를, 고교생인 그녀의 한 마디가 깨우치게 했다. 그녀들은 낯 선 동양인들과 친구가 되려 했다. 나는 원조교제 같은 이상한 관계만 떠올렸다. 그녀들은 순수했고, 나는 불순했다. 그녀들은 거침이 없었고, 나는 불편해했다. 그녀들은 자유로웠고 나는 억압받고 있었다. 고정관념이라는 괴물에 의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 기혼과 미혼 사이의 남녀, 지구 반 바퀴 저쪽에서 사는 남녀사이는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되는가? 정말 그런 것인가? 아니,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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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내 모습이 얼마나 행복했었나를 확인하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늘 지금 이곳을 떠나서야, 지금 이곳에서의 내가 얼마나 행복한 존재였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녀 봤으나,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언제나 가장 편안한 곳은 대한민국 서울 변두리에 자리 잡은 스무 평 남짓한 내 집임을 깨닫는다. 그곳에 나를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산악인 가스통 벨뷔파는 “정상에서의 희열도 파트너와 함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을 했다. 세계적인 명소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반감한다.
지상낙원이라는 칸쿤 해변에서 어느 날, 나는 울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서였다. 혼자 하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 명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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