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 해피 뉴 이어~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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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5 14:47
젊은 날, 어렵고 힘들게 보내던 시기가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주운 신문지를 역 대합실에 깔고 덮고 자다가
관절에 물이 차서 한동안 침을 맞기도 하던 때였다.
그러다 겨우 방 한 칸을 마련했다.
변두리 산기슭에 판자로 지은 가건물이었다.
자그마한 방과 부뚜막,
이른 아침에 토끼가 가끔 목을 축이러 오는 수도가 있는 마당이 전부인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인생에 대한 회의와 환멸로
하루하루를 탕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그날도 시내에서 버스가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고
두어 시간 동안 걸어서 귀가한 뒤 골아 떨어졌을 것이다.
새벽녘에 누군가 방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 밖에 서 있던 너댓 명의 사람이
갑자기 목청을 높이며 크리스마스캐롤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내 팔목을 잡아 흔들며 이렇게 외쳤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내가 얼떨떨해 하는 사이에 그들은 노래 부르기를 마치고
목례를 한 다음 여명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나는 한동안 마당에 서 있었다.
삭풍은 내 하체를 사정없이 후들거리게 했고
잿빛 하늘에는 새벽별 두엇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들의 축복 때문이었을까?
얼마 뒤 나는 기운을 차리고 변두리를 떠나
세상의 중심으로 한발 다가갈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생애 중에서
크리스마스에 관한 유일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