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망해 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망해 가고 있습니다!"(펌글)
미국은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방치되고 쌓인 상태에서 코로나바이러스를 맞닥뜨렸습니다. 부패한 정치, 융통성 없는 관료주의, 활기를 잃은 경제, 여기에 시민들은 편을 갈라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바이러스가 활개를 치더라도 이를 막아내고자 힘을 모으는 미국의 모습은 애초에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나타났던, 명백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했던 증상들을 무시하고 외면한 결과 미국 사회는 팬데믹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가장 먼저 쓰러져버릴지 모르는 ‘고위험군’에 속한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위기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발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사회적인 기반이 조악하고 제 기능을 전혀 못 하는 정부나 보여줄 법한 전형적인 후진국의 대응으로 일관했습니다. 정치 지도자는 심각하게 부패하고 너무 멍청한 나머지 모두가 힘들어지고 고통받는 길로 우리를 내몰았습니다. 정부는 처음 두 달의 결정적인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대통령은 우악스럽게 현실을 외면했고, 분노를 배설할 대상을 찾아 손가락질하기 바빴으며, 쓸데없는 것을 자기 공으로 돌려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 쏟아졌습니다. 대통령이 터무니없는 음모론에 불을 지피고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기적의 치료제를 운운하는 사이 몇몇 정치인과 기업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의 잘못을 지적하고 진실을 알리는 대신 혼란에 빠진 대중을 현혹이 자기 잇속을 챙기려 들었죠. 정부 조직 안에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는 이들이 물론 없지 않았습니다. 바이러스의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백악관은 그때마다 바이러스는 트럼프 정권을 흠집 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며 편을 갈랐습니다.
2020년 3월은 그 모든 부정과 부패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기 시작한 첫 달로 기록될 겁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완전히 실패한 나라라는 사실을 꼼짝없이 확인하게 되는 하루하루는 미국인들에게 무척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이런 심각한 위기에서도 국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알아서 하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가정과 학교, 기업이 알아서 책임지고 각자 살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문을 닫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을지 모든 게 불확실했습니다.
코로나19 진단 키트와 마스크, 가운 등 보호장비, 인공호흡기 등 가장 중요한 물자가 턱없이 부족하자 주 정부는 연방정부에 급히 도움을 청합니다. 매뉴얼 대로라면 주 정부를 뒷받침해줘야 할 백악관은 뭘 해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민간 기업에 손을 벌립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의료 물자를 생산하는 준비를 해온 적 없던 민간 기업은 당연히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그 결과 주 정부와 지방정부, 시 정부도 알아서 눈에 불을 켜고 진단키트와 마스크를 구하는 경쟁에 뛰어듭니다.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니 가격은 치솟고, 사람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는 사이에 한쪽에서는 폭리를 취하는 기업이 생겨납니다.
미국 보건 당국은 의료진과 환자들이 써야 할 마스크를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건강한 사람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방침을 한동안 유지합니다. 그러나 결국 가급적 마스크를 쓰는 것이 좋다는 권고가 나오자 사람들은 수납장 구석에서 낡은 재봉틀을 꺼내 헝겊과 옷감으로 마스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러시아와 대만, UN에서 미국으로 인도적 지원 물자를 보내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이 자국민의 목숨을 지키는 데 필요한 물자를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시종일관 코로나19를 철저히 자신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취급합니다. 재선이 걸린 선거가 있는 해에 터진 팬데믹을 두고 트럼프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자신을 전시 대통령이라고 칭하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가 마음에 둔 전시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비시 정부를 이끌며 나치에 부역한 필리프 페탱 원수였던 것 같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대신 쳐들어온 적에게 협력하고 적의 편의를 봐준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페탱 원수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1940년 프랑스처럼 2020년 미국도 무능한 지도자의 탓으로만 돌리기 어렵습니다. 그보다 미국이 근본적인 결함을 드러낸 끝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훗날 팬데믹을 돌아보고 분석하는 역사가들은 미국의 실패를 “의외의 패배”라고 기록할지도 모릅니다. 숭고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용기 있는 개인들이 끝없이 등장했지만, 이는 미국이란 나라의 처참한 실패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미국인은 이제 지금까지는 물을 필요가 없던 질문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목숨이 달린 위태로운 상황에서 우리는 정치 지도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믿고 공동의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나? 우리에게 스스로 통제하고 다스릴 자치 능력이 있을까?"
코로나19 팬데믹은 미국이 21세기 들어 세 번째 맞는 위기입니다. 첫 번째 위기는 2001년 9.11 테러였습니다. 21세기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 미국인들은 여전히 20세기를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죠. 대공황, 세계대전, 냉전의 기억이 아직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던 시절이었다는 뜻입니다. 가장 큰 공격은 뉴욕시에서 일어났으니 다른 주나 시골에 있던 미국인들은 직접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뉴욕의 아픔은 곧 미국의 아픔이었습니다. 인디애나주에 있는 소방관들이 1300km나 되는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그라운드 제로에서 벌어진 구호 작전에 자발적으로 힘을 보탰습니다. 함께 애도하고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하는 일은 미국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모든 시민의 책무로 여겨졌습니다.
9.11테러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은 갈수록 정책적으로 대립했고, 이라크 전쟁을 포함해 정부가 잇단 실정을 저지르면서 통합의 가치는 점점 빛이 바랬습니다. 정치권을 향한 국민의 불신은 갈수록 깊어져 회복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2008년 두 번째 위기인 금융위기가 닥칩니다. 불신과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죠.
여기서는 경제적인 계급에 따라 금융위기 이후의 회복세가 너무 달랐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초당적인 합의가 이뤄지면서 대형 은행과 대기업에 막대한 공적 자금이 흘러 들어갔고, 경제적으로 최상위 계급에 속하는 자본가들은 금방 상처를 털어냈습니다. 경제 시스템을 지켜야 한다는 목표만큼은 확실하게 공유했던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의 관료들, 연준과 재무부의 경제 전문가들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초점을 제2의 대공황을 막는 데 맞췄습니다. 대형 은행들은 무책임한 대출로 이런 위기를 불러온 데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정작 대형 은행 임원이나 주요 경영진이 기소돼 법정에 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자기 재산을 고스란히 지켰고, CEO나 임원직을 보전한 이들도 꽤 있습니다. 그리도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금융권에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월스트리트의 한 트레이더는 제게 2008년 금융위기가 가진 자들에게는 잠시 숨을 고르는 ‘과속방지턱’에 불과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중산층과 서민층에 금융위기는 그렇게 쉽게 이겨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경제적 취약계층은 일자리를 잃으면서 당장의 소득원이 없어져 생계가 막막해졌습니다. 노후를 대비해 저축해둔 돈도 금방 바닥납니다. 주택담보대출의 불어난 이자를 갚지 못해 살던 집까지 잃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이들은 영영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무너졌습니다. 금융위기가 한창일 때 성년이 된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가난하게 살아갈 운명에 처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경제적인 불평등은 1970년대부터 계속 심해졌고,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격차는 더 벌어졌습니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확연히 달라진 건 경제적인 상류층과 서민층뿐이 아닙니다. 공화당과 민주당, 도시에 사는 사람과 시골에 사는 사람,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과 이민자, 일반 국민들과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도 점점 더 눈에 띄는 차이가 생겨납니다. 수십 년째 줄곧 느슨해지고 옅어지던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의식은 이제 아예 찢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왔습니다. 의료보험, 금융 규제, 친환경 에너지를 비롯해 오바마 정권 때 시도한 모든 개혁은 의미 있는 시도였을지 몰라도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그쳤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계속된 경제 회복을 통해 기업과 투자자, 일부 고소득 전문직 등 가진 자들의 배는 계속 불러갔지만, 노동자와 서민은 계속 외면받고 궁지로 몰렸습니다. 결국, 정치적 양극화도 더 심해지고 사람들은 권위를 불신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정부를 향한 불신의 골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어졌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잘못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더 근본적인 현상입니다. 민주당도, 공화당도 이 문제를 처음부터 똑바로 인식하지 못했고, 결국 포퓰리즘의 득세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 전조는 버락 오바마가 아니라 새라 페일린이었습니다. 부통령이 될 만한 그릇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도 부통령 후보가 된 페일린은 전문가를 경멸하고 인기만 좇다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선거에서도 졌지만, 페일린이 있었기에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가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페일린은 트럼프의 세례 요한이었던 셈입니다.
트럼프는 공화당의 전통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공화당 지도부를 맹렬히 비난하고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습니다. 물론 대통령 후보가 되자 미국의 보수 세력은 트럼프와 기꺼이 타협했고, 트럼프의 당선에 힘을 실어줬죠. 무역이나 이민 문제에 관해서는 트럼프의 의견에 차마 동의할 수 없던 이들도 더 근본적인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모든 영역에서 정부와 공공 부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시장 논리에 맡겨 민간 자본이 마음껏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죠.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는 명제를 맹신하는 공화당 정치인과 부자들 가운데서도 공화당에 돈을 대는 이들은 공공재의 공급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를 운영하고 통치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무능해서) 작은 정부’의 꿈을 실현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이들은 기꺼이 트럼프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 바싹 마른 숲에서 불장난하는 위험천만한 아이처럼 트럼프는 미국에 남아있던 시민의 삶을 모조리 태워버렸습니다. 트럼프는 취임한 첫날부터 단 한 번도 전체 미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인종, 성별, 종교, 국적, 교육 수준, 지역, 지지 정당을 비롯해 모든 요건마다 차이를 부각해 우리를 갈라놓고 서로 손가락질하고 욕하게 부추기는 일이었습니다. 트럼프에게 통치란 거짓말로 일관하는 불장난 같은 것이었습니다. 트럼프 집권 4년 차를 맞은 미국은 대략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먼저 트럼프가 하는 말을 여전히 철석같이 믿고 트럼프에게 부화뇌동하는 이들, 반대로 트럼프의 거짓말에 맞서 진실을 알리려 무던히도 애쓰는 이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진저리가 나서 그냥 다 포기해버린 사람들입니다.
전임 오바마 행정부는 집권 내내 극우 세력의 이념적 마녀사냥에 시달렸습니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양대 정당의 교착 상태가 계속됐고, 정책을 시행하는 데 필요한 재원이 나올 정부의 금고는 오래전에 텅 빈 채 빚만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트럼프는 집권과 동시에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정책을 다 중지하고, 정부 부처의 손발을 잇따라 잘라내 버립니다. 미국 정부 부처와 산하 기관에서 가장 유능하고 경험 많은, ‘일 잘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짐을 쌌습니다. 나라가 굴러가려면 꼭 있어야 하는 주요 자리마저 공석이 됐습니다. 이제 트럼프는 그 자리를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채웁니다. 전문성이나 능력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개인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의지만 있다면 됐습니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감세 정책은 기업과 부자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겼습니다. 부자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돈의 일부를 기꺼이 트럼프에게 감사의 표시로 되돌려줍니다. 트럼프의 재선 캠페인은 기록적인 후원금을 모았습니다. 트럼프 거짓말로 일관하며 엉망으로 만든 통치의 결과 미국 정부는 구제 불능의 부패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가 미국을 덮칩니다. 세계 경제와 문화를 선도하는 미국 유수의 대도시에서 일하는 고소득,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글로벌 시티즌으로서 많은 혜택을 향유하지만, 사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위태롭기 짝이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고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수많은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들이 지탱해주는 덕분에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겁니다. 반대로 이런 도시의 화려함이 미치지 않는 시골 지역은 도시화와 세계화를 향한 반감만 남은 커뮤니티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소셜미디어는 이렇게 다른 두 세상을 이어주는 대신 상대방을 향한 증오를 여과없이 표출하는 전쟁터가 됐습니다. 코로나19가 오기 전의 미국 경제가 유례없는 호황이라는 분석이 공허하게 들렸던 이유는 바로 끝없이 배를 불린 자본과 이렇게 투명인간으로 전락해버린 노동자들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공무원들을 쫓아내고 백악관을 차지한 사기꾼과 상식적인 사고를 포기한 그의 추종자밖에 남지 않은 워싱턴에 기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은 냉소적인 패배주의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도, 미래를 향한 약속 같은 건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됐습니다.
팬데믹이 트럼프 대통령의 비유대로 정말 전쟁이라면, 이번 코로나19는 미국 땅에서 150여 년 만에 처음 일어난 전쟁이 됩니다. 침략과 정복은 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평상시에는 대충 넘어가서 잘 드러나지 않던,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실제로 잘 몰랐던 문제가 민낯을 드러내죠. 그 문제는 오랫동안 방치됐을수록 썩은 내가 진동하기 마련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명백한 외부의 적이 등장할 때 미국인들의 자연스러운 대응은 하나로 똘똘 뭉치는 겁니다. 이 나라 지도자가 달랐다면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미국이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했는지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바이러스는 민주당과 공화당,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퍼져나갔지만,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잘 아는 지지 정당에 따라 정확히 갈렸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군인만 골라서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빚쟁이처럼 빚이 있는 사람만 찾아서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이러스로 인한 피해는 공평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나머지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린 불평등의 굴곡을 따라 상대적으로 안전한 사람과 취약한 사람이 갈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 두려움에 떨던 그때 미국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사람을 생각해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겁니다. 리얼리티 TV쇼 진행자이자 모델인 하이디 클럼, NBA 브루클린 네츠 선수단 전원, 그리고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코드가 맞는 동지들은 어떻게 찾았는지 몰라도 코로나19 검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의심 증상이 없던 사람도 다 검사를 받았습니다. 사회 전체의 방역과 공중보건상 필요에 따라 가장 먼저 검사해 감염 여부를 추적해야 하는 사람이어서 검사를 받을 수 있던 게 전혀 아니었죠. 그러는 사이 고열에 시달리며 호흡이 가빠져 병원을 찾은 일반 시민들은 오랜 시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습니다.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기약도 없었고, 오히려 아파서 병원을 찾은 다른 환자들에게 감염될 우려도 있는 상황이었죠. 병원은 병원대로 침상도, 인공호흡기도 부족했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있는 정도라면 코로나19에 감염된 가능성이 커 보이는 환자도 다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조적인 농담이 참담했던 미국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코로나19 검사를 받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돈 많은 사람 얼굴에 대고 재채기를 하면 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누군가 너무도 불공평한 상황에 대해 물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공평하지 못한 상황이 잘못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렇지만 뭐, 원래 인생이 다 그런 거잖아요.”
코로나19 시대의 업무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필수 업무와 그렇지 않은 업무죠. 그런데 필수 업무로 분류되는 일 중에는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출근해서 물리적으로 ‘일터를 지켜야 하는’ 업무가 많습니다. 물류창고에서 화물을 분류하는 노동자, 마트의 재고를 정리하는 노동자, 대신 장을 봐주는 사람들, 배송 트럭 운전기사, 시 정부와 지방정부의 일선 공무원,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진, 간병인, 장시간 운전해야 하는 화물차 기사들은 모두 우리 사회와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필수 업무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가장 많이 칭송받고 영웅 대접을 받는 이들은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의료진이지만, 사실 열심히 손 세정제를 발라가며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계산해주는 계산원 노동자나 인터넷으로 주문한 물건을 눈코 뜰 새 없이 배달하는 UPS 기사들도 모두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볼 수 있도록 사회를 유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숨은 영웅들입니다.
스마트폰에서 터치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에 가려진, 그래서 우리도 어느새 까맣게 잊고 살던 자명한 사실이 다시 확인된 겁니다. 먹을거리를 비롯한 생필품을 누가 만들고, 누구 덕분에 우리에게 신선하고 안전하게 당도하는 건지 새삼 생각하게 된 거죠. 아마존 프레시 서비스를 이용해 유기농 샐러드 채소를 싼값에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에 바로 집 앞에 채소가 배달되죠. 그런데 그 채소를 기르고 수확하고 포장하는 사람, 신선도를 유지하면서 배송하는 사람, 다시 물건을 분류하고 목적지에 맞춰 출고하고, 또 우리집 현관문까지 배달해주는 사람들은 코로나19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사실 목숨 걸고 일터를 지키고 있는 겁니다. 사실 스마트폰에서 주문 버튼만 누르면 꿈만 같이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던 것이 다 이 사람들 때문이었던 거죠. 그런데 이런 서비스직 종사자들은 대부분 저임금 노동자들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꿈만 같던 편리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이들 노동자에게는 반대로 아프면 쉴 수 있는 병가나 유급 휴가를 받는 일이 여전히 꿈만 같은 일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런 필수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이 아프면 집에서 쉬면서도 생계 걱정을 하지 않도록 우리가 좀 더 비싼 값을 치르고, 배달이 며칠 늦어도 이해해줘야 할 때 아닐까요?
필수 업무로 분류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 중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켈리 뢰플러 상원의원입니다. 뢰플러 의원은 선거를 통해 의회에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조지아주 주지사가 전임 상원의원이 건강상의 이유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자 공석에 뢰플러 의원을 임명했죠. 임명된 이유는 뢰플러의 어마어마한 재산 외에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상원의원이 된 지 3주 정도 흐른 뒤 뢰플러 의원은 연방 상원의원으로서 비공개 기밀 브리핑을 듣습니다. 아직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운 신종 바이러스에 관한 브리핑이었습니다. 브리핑을 듣고 나서 뢰플러 의원은 주식시장이 폭락하기 전에 주식을 대거 처분했습니다. 그러고도 민주당을 향해서는 바이러스를 정치적으로 악용해 대통령 흠집 내기에 나서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죠. 자신이 대표하는 조지아주 주민들에겐 이미 바이러스를 완벽히 틀어막았을 수도 있다고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뢰플러 같은 부자들이 공직에 욕심을 내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는 모두 똑똑히 봤습니다. 이런 기생충 같은 인물이 연방 상원의원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는 것부터 미국 정치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허무주의와 정치 혐오를 부르는 인물은 어떤 의미에서 트럼프 대통령 본인보다도 백악관 선임 보좌관이란 직함을 달고 정권을 멋대로 주무르는 트럼프의 사위 제러드 쿠쉬너입니다. 아직 불혹이 되지 않은 쿠쉬너도 길지 않은 인생을 온갖 부정과 편법으로 살아온 인물입니다. 실력 있다는 이미지도, 그가 누리는 인기도 모두 허상이고 거품이죠. 제2의 도금시대(옮긴이: 경제적 불평등이 극에 달한 시대)를 연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1981년에 쿠쉬너는 부동산 재벌 집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저 그런 성적에 전혀 돋보이지 않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아버지가 250만 달러, 약 30억 원을 하버드대학교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덕분에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죠. (정식 기부 입학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찰스 쿠쉬너는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는 아들에게 1천만 달러를 융통해줍니다. 제러드 쿠쉬너는 이어 이미 아버지가 300만 달러를 기부한 뉴욕대학교에서 법학대학원과 경영대학원을 모두 수료하죠. 제러드는 아버지에게 받은 은혜를 최선을 다해 갚습니다. 2005년에 찰스 쿠쉬너가 탈세 등의 혐의로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을 때 가족 간의 법적 다툼을 손수 매듭짓죠. 이 과정에서 매제에게 성매매 여성을 보내고 대화와 성관계 사실을 촬영한 뒤 협박하는 등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지만, 어쨌든 쿠쉬너에게는 목적을 이뤘다는 게 중요하겠죠.
부동산 사업도, 신문사 경영도 참담하게 실패했지만, 그때마다 제러드 쿠쉬너에게는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밉니다. 자기가 능력이 없어서 자꾸 실패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본인만 모르는 상황이 반복되고, 그렇게 실력 없이 자존감만 높은 괴물이 탄생한 겁니다. 안드레아 번스타인은 저서 “미국의 재벌(American Oligarchs)”에서 제러드 쿠쉬너가 어떻게 자신을 위험을 무릅쓰고 혁신을 추구하는 ‘신경제에 어울리는 미국의 기업가’로 포장했는지 분석합니다. 자신이 멘토로 삼은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을 따라 쿠쉬너도 돈과 정치와 언론을 복잡하게 섞은 자신의 제국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해상충이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사업모델을 고스란히 따라한 것도 머독의 제국과 정말 닮았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를 통치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인이 덜컥 대통령이 되자, 쿠쉬너는 곧바로 백악관을 접수해버렸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특징적인 기조라 할 수 있는 아마추어리즘, 정실주의, 부정부패가 모두 쿠쉬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쿠쉬너가 (철저히 이스라엘 관점에서 추구하는) 중동 평화 정착 업무에 진정으로 매진한다면, 어차피 아무런 결과도 나지 않을 테고 쿠쉬너의 시간과 관심이 미국 말고 다른 데 쏠리는 만큼 미국인들에게는 정말 다행일 겁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고 조언하고 자신을 보좌하는 업무를 사위에게 맡깁니다. 미국 정부가 내놓는 코로나19 대책은 그렇게 재앙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길을 택했습니다.
3월 중순, 코로나19 특별 보좌관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나선 브리핑에서 쿠쉬너는 끔찍할 만큼 무능하고 부패한 모습을 드러냈으며, 위험천만한 발언을 태연하게 이어갔습니다. 쿠쉬너가 썼거나 쓰는 데 참여한 대통령의 원고는 대통령의 권한 밖에 있는 일을 대통령이 하겠다고 대책 없이 우기고, 보안 절차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며, 이해상충의 소지가 다분한 데다 연방법은 물론 헌법을 어길 소지가 있는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트럼프는 트럼프대로 터무니없는 약속을 남발하고 기적을 운운했습니다.
“연방 정부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그러라고 정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쿠쉬너가 코로나19 드라이브스루 검사소를 설치하는 문제를 자신과 연줄이 있는 기업을 통해 요청하겠다고 하면서 한 말입니다. 쿠쉬너가 약속한 드라이브스루 검사소는 추진조차 되지 않고 없던 일이 됐습니다. 기업들은 대통령이 국방물자생산법(DPA)에 있는 권한을 이용해 기업들에 인공호흡기를 생산하도록 명령하지 말아 달라는 로비의 창구로 쿠쉬너를 십분 활용했습니다. 쿠쉬너도 어차피 정부가 기업에 물자를 생산하라고 명령하는 데 거부감이 있기도 했고, 제네럴모터스와 개별적으로 진행한 협상도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납니다. 일선 의료현장에서는 인공호흡기가 부족해 살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갔습니다. 자기의 신념이 틀렸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던 쿠쉬너는 미리미리 의료 물자를 확보하지 못한 주 정부에 책임을 돌립니다.
지금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리더십도, 능력도, 아무것도 없는 재벌 집 자식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악관을 멋대로 주무르고 있는 모습은 트럼프 행정부, 나아가 미국이란 나라가 통치할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라는 걸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콘트롤타워가 되어야 할 정부는 경영대학원에서 주워들은 단어를 이따금 맥락 없이 내뱉는 호사가 한 명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트럼프와 보수 세력이 그토록 경멸하던 과학자, 전문가, 자기 분야에 잔뼈가 굵은 공무원들은 부패한 엘리트이거나 미국의 정치 권력을 사유화한 위험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같은 위기에 꼭 필요한 필수 업무 노동자들입니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그들을 쳐내고 잘라내고 내쫓은 결과 미국 사회는 코로나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붕괴 직전으로 내몰렸습니다. 트럼프와 보수 세력이 주문처럼 외던 기민하고 효율적인 기업들은 팬데믹에 맞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재빨리 생산해내지 못했습니다. 그 일은 원래 기업이 할 일이 아닙니다. 연방 정부가 키를 쥐고 계획을 세우고 지시를 내려야 할 일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입만 열면 정부를 깎아내리느라 바빴던 지난 몇 년은 정부의 의지를 끝내 꺾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혹독한 대가를 엉뚱하게도 미국 국민들이 치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목숨까지 잃어가면서 말이죠. 정부가 주도하는 프로그램은 죄다 돈줄이 끊겼고, 비축 물자는 진즉 바닥이 났습니다. 이를 다시 채우려는 계획을 세워봤자 “정부는 뒤로 빠지라”는 주장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은 어느덧 2류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2류 국가가 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보면 코로나19에 무너진 미국을 보고 “의외의 패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2류 국가에 세상에 처음 나온 치료제와 백신 없는 바이러스는 어렵지 않은 상대였을 겁니다.
우리는 팬데믹을 이겨내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도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지금 미국 사회의 건강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과 슬픔이 정말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트럼프 정권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9.11 테러와 2008년 금융 위기가 전통적인 정치권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사건이었다면, 2020년의 팬데믹 위기는 덮어놓고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증명한 사례로 기억될 겁니다. 그러나 트럼프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트럼프 행정부가 저지른 참사를 수습하는 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는 분명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명백히 드러난 미국이란 나라의 민낯이 우리에게 준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계속 지금처럼 뿔뿔이 흩어져 고립된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로 이야기하기를 피하며 사회적 연대를 지워가는 길입니다. 아니면 바이러스로 일상이 멎어버린 지금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영웅들이 누구인지 한 번 차분히 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코로나19 환자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눈물이 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스마트폰을 들어주는 간호사들,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던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애틀란타의 의사들, 공장의 생산 설비를 즉시 가동해 한시라도 빨리 인공호흡기를 생산하자고 뜻을 모은 매사추세츠주의 우주항공산업 공장 노동자들. 실업수당 신청이 급증하면서 전화나 인터넷으로 노동부 실업급여 지원팀에 닿지 못하자 급한 마음에 관공서를 찾아간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위스콘신주 시민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우편 투표를 확대하고 투표 기한도 늘려달라는 주지사의 요청을 기각한 법원의 판결에 따라 바이러스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도 내 손으로 지역의 정치인을 뽑기 위해 투표장으로 갔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우리는 무능함과 부정부패가 실제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 곧 필수 업무입니다. 연대하지 않고 고립되는 쪽을 택하면 그 덕분에 득세하는 세력이 이 사회를 낭떠러지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비싼 값을 치르고 배웠습니다.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마스크를 벗는 날에도 우리는 동료 시민의 일에 나 몰라라 하며 연대하지 않았을 때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애틀란틱, George Packer)
*원문 : https://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20/06/underlying-conditions/610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