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소설-풀문 파티(1회)
코로나19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지 여러 날 되다보니 심심해서 여행소설을 썼어요.
댓글 10개 넘으면 다음 편 올릴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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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소설 「풀문 파티」 ― 1회
공항으로 가는 길은 붐볐다. 신림사거리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남부순환도로를 지나 올림픽대로로 접어들자 도로 위는 자동차로 가득했다. 이 차들이 모두 공항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던 혈육의 주검을 확인하러 가는 길에 동행이 없다는 건 쓸쓸한 일이다.
‘며칠째 똑바로 누워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몇 년 전, 형이 필리핀의 엘 니도라는 섬에서 보내온 엽서는 그렇게 시작했다.
‘어제 낮에 낚시를 갔다가 햇빛에 등을 태워먹었다. 30분이 될까 말까한 시간이었는데 밤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등이 따갑다. 살인이라도 저지르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햇빛이다. 이놈의 햇빛과 모기만 없다면, 이곳은 파라다이스다. 미칠 것 같은 열대의 낙원!’
짧은 내용이었지만 들떠 있는 기분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었다. 이제야 형은 마음의 정처를 찾은 것일까. 무엇이 ‘미칠 것 같은’이라는, 그답지 않은 표현을 쓸 정도로 형을 매혹시킨 것일까.
그것이 형에게서 온 마지막 연락이었다. 그리고 어제, 3년 만에 다시 형의 소식을 들었다.
“송민수 씨 되십니까?”
자정이 다 된 시각에 핸드폰을 통해서 들려온 목소리는 30대 중반은 됐음직한 남자였다.
“예, 전데요.”
“여기 태국입니다.”
산간오지에 있는지 전화는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고함을 지르다시피 하는 사내의 목소리는 지하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송민하 씨 아시죠?”
“제가 동생입니다. 무슨 일이죠?”
“송민하 씨가 어제 사망했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말라버린 기분이었다. 회칼로 한쪽 폐를 도려내는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지만 어금니를 깨물며 참았다.
“어, 어떻게요?”
“말라리아 때문입니다.”
말라리아, 그 단어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병명이 아니라 이탈리아 가극의 아리아 제목처럼 들렸다.
“뒷수습을 하려면 가족 중 누가 이곳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내는 사무적으로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 형제의 죽음을 통보하는 낯선 사내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나는 되도록 빨리 결정해서 연락을 드리겠다고 한 다음 사내가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전화를 끊고 담배를 꺼냈다. 육신에서 이탈한 영혼처럼 뿌연 불빛이 유리창 밖 전봇대에 매달린 가로등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짜식, 직장도 그만 두고 이사까지 해버리면 어떡해? 찾느라고 애먹었잖아.”
다니던 무역회사에 사표를 내고 자취방을 정리해서 고시원으로 옮긴지 1주일쯤 되었을 무렵, 형이 불쑥 찾아왔다.
“별일 없어?”
“나야 항상 똑같지, 뭐.”
형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저녁이나 먹자면서 비좁은 고시원 방을 반이나 차지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 내일 태국 간다.”
상추에 싼 삼겹살을 입 안 가득 욱여넣으며 형이 말했다.
“태국엔 왜?”
“매달 보름달이 뜰 때마다 꼬 팡안이라는 섬에서 파티가 벌어진대. 별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남국의 바닷가에서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군상들이 벌이는 풀문 파티. 어때, 멋지지 않냐?”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행로를 결정해버리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형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몇 달 만에 나타난 형은 조그만 수첩 하나를 내보였다.
“너 이게 뭔 줄 알아?”
그 수첩의 겉장에는 ‘선원수첩’이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배를 타려면 꼭 필요한 신분증 같은 거야.”
형은 당첨이 확정된 복권을 바라보듯 행복에 겨운 눈길을 그 수첩에서 떼지 못했다.
“외항선을 탈 거야. 외항선을 타고 전 세계의 항구란 항구는 죄다 방문해서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 벽에다 내 이름을 새겨놓을 거야. 내 꿈이 뭔지 알아? 세상의 모든 항구에 있는 술집을 섭렵한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는 거다.”
나는 형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그처럼 황당한 일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얼마 뒤 형은 진짜로 외항선을 탔다. 그리고 2년 뒤, 지독한 성병을 앓는 몸이 되어 내 자취방을 찾아왔다.
“재수 없게 병에만 안 걸렸어도 기록을 세우는 건데.”
꽤 오랫동안 비뇨기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형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침내 완쾌되자 형은 다시 훌쩍 떠났다.
“직장은 왜 그만 뒀냐?”
웬만큼 배를 채웠는지 형은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시면서 물었다.
“좀 쉬고 싶어서.”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형에게 내 계획을 낱낱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넣어 둬라.”
계산을 하고 식당 밖으로 나온 형이 수표 몇 장을 내밀었다.
“나도 돈 많아. 퇴직금 받은 것도 있고.”
형은 억지로 내 주머니에 수표를 쑤셔 넣었다.
“받아 둬, 갚으란 소리 안 할 테니까. 네가 왜 이런 곳으로 이사 왔는지 나도 알아. 네가 목표로 삼은 일이 하루 이틀 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르는데 돈이라도 넉넉해야지.”
형은 악수를 청하더니 ‘수고해라’ 한 마디를 던지고는 사라졌다. 그게 형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두 대의 담배를 연이어 피운 나는 핸드폰을 꺼내 조금 전에 받아 적은 열네 자리 숫자를 천천히 눌렀다.
“죄송하지만 형의 유골을 한국으로 보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전화를 받은 상대가 아까 통화했던 사내라는 걸 확인한 나는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그렇게 부탁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뜬금없이 알려온 형의 죽음에 대한 진위 여부가 미심쩍었다. 형의 죽음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는 있었다. 사법고시 2차 시험이 한 달도 남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다시 1차부터 응시해야 한다. 이런 상황인데 낯선 사내의 전화만 믿고 외국까지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사내가 말했다.
“가족이 직접 유골을 수습하는 게 고인에 대한 마지막 도리가 아닐까요. 게다가 송민하 씨가 이곳에서 했던 사업도 정리해야 하고…….”
“사업이라뇨?”
“조그만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했거든요. 그걸 정리하려면 가족이 있어야 합니다.”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조그만 게스트 하우스라지만 처분하면 약간의 돈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걸 순순히 알려주는 걸 보면 사내가 사기꾼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문제는 역시 코앞에 닥친 시험이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무작정 전화기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통화를 마무리한 뒤에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권은 있으십니까?”
“네.”
무역회사 다닐 때 만들어놓고 아직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게 있었다.
“그럼 먼저 방콕 행 항공권을 알아보세요. 태국은 비자가 없어도 되니까 비행기 좌석만 있으면 내일이라도 올 수 있습니다.”
방콕이 종착지가 아니었다. 방콕에서 다시 치앙마이라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곳까지 오면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 나는 항공권을 구입하면 도착시간을 알려주기로 하고 사내와의 통화를 마쳤다.
형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가는 방법을 알아내긴 했지만 정말 그곳으로 갈 것인지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벼르던 내 인생 최대의 승부가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형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니 존재했던 유일한 혈육이 아니던가. 그제야 내가 이 세상에 외톨이로 남겨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것은 비에 흠뻑 젖은 외투를 입은 채 화려한 연회장으로 들어갈 때처럼 엿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아서 담배만 계속 피워댔다. 담배 한 대를 태울 때마다 생각이 바뀌었다.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하게 쌓이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거릴 즈음에야 겨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먼저 목욕탕에 가서 정성스레 때를 민 다음 아침으로 설렁탕을 먹고 고시원으로 돌아와서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오늘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을 알아봤다. 밤 9시에 출발하는 타이항공 비즈니스 클래스가 딱 한 자리 남아 있었다. 이코노미 클래스보다 두 배나 비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서 다시 공부에 몰두하려면.
방콕 도착이 자정 무렵 도착인지라 방콕 호텔 1박과 치앙마이 행 국내선 항공료까지 포함한 금액을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돌아오는 건 사흘 뒤였다. 방콕에서 1박을 하고 치앙마이로 가서 형의 주검을 수습한 뒤 게스트 하우스 문제를 처리하고 그 다음날 밤 비행기로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형이 남긴 유산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시신을 수습할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은가.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