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음악은?
아는 교수님이 곧 정년퇴임을 하는데 기념으로 <내 인생의 음악>이라는 책을 내겠다고 해서 쓴 글이에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내 인생의 음악>이 한 곡씩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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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심지다방을 드나들기 시작한 건 까까머리 고등학생 때였다. 심지다방은 대구 최대의 번화가 동성로 남쪽 끝 중앙파출소 맞은편 건물 지하에 있었다. 꽤 많은 LP판을 구비하고 있던 심지다방은 이창동 감독의 큰형 아성(본명 이필동) 씨가 운영하는 극단의 연극배우와 경북대 의대를 다니는 대학생들이 DJ를 하면서 최신 유행곡을 틀어주는 음악다방이었다. ‘서울에 학림다방이 있으면 대구에는 심지다방이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아직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문예반 선배들을 따라 심지다방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몸담고 있던 고등학교 문예반은 시인 서정윤, 소설가 겸 시인 박덕규, 문학평론가 하응백 등이 거쳐 갔고 시인 안도현과 시인 이정하가 3학년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들은 심지다방의 단골이었고 나도 곧 그들 못지않게 심지다방 마니아가 되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심지다방으로 출근해서 교모와 교복 상의를 구겨 넣은 책가방은 카운터에 맡겨 놓고 DJ박스 옆에 있던 우리들, 애송이 문인들의 지정석에 축 치고 앉아서 밤늦게까지 커피와 엽차를 홀짝이며 뽀끔 담배를 피우거나 김민기와 트윈폴리오와 양희은의 노래를 신청하거나 즉석 백일장을 열거나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을 읽었다. 그러다 우리들 중 누군가 용돈이 생겼거나 시골집에서 보낸 생활비가 도착했거나 현상문예 상금이라도 탄 날이면 가까운 염매시장으로 몰려가서 찌짐(부침개) 한 접시를 시켜놓고 막걸리를 들이키곤 했다. 그렇게 심지다방과 곡주사(막걸리집)에서 문청 선배들이 떠들어대는 개똥철학과 기상천외한 연애담을 숭고한 진리처럼 귀담아 듣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게 그 즈음 나의 일과였다.
심지다방에서 나는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몇 년 뒤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한 미완의 장정일과 이인화를 처음 대면한 곳이 심지다방이었다. 베스트셀러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약 중인 류시화(본명 안재찬)도 심지다방에서 처음 만났다. 시인 겸 소설가 문형렬, 문화평론가 하재봉, 시인 이문재, 소설가 김형경 등 대구 출신이거나 대구를 방문한 쟁쟁한 선배 작가들을 심지다방에서 만났다. 그들은 모두 나의 라이벌이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을 뛰어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가 되겠다고 별렀다.
심지다방에서 나는 참 많은 음악도 만났다. 수백 장의 LP판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DJ박스는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운영되었다. 연극배우와 의대생 DJ가 한 시간씩 교대로 선곡을 담당했는데 이 두 부류의 DJ는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감정이 풍부한 목소리로 유머 넘치는 멘트를 남발하던 연극배우 DJ는 아바와 비지스 등의 최신 유행 팝송을 주로 틀었다. 국내 가요는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민해경의 「누구의 노래일까」 등이 주 레퍼토리였다. 이에 반해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시사성 있는 멘트를 조곤조곤 들려주던 의대생 DJ는 팝송은 레드 제플린이나 도어스나 퀸을, 국내 가요는 한대수의 「물 좀 주소」, 김민기의 「서울로 가는 길」, 양희은의 「백구」,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잌」 등을 자주 틀었다.
나는 두 부류의 DJ가 선곡하는 음악들을 차별 없이 좋아했다. 연극배우 DJ의 음악은 감성을 자극했으며 의대생 DJ의 음악은 지성을 일깨웠다. 그들이 틀어주는 음악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건 송창식의 「밤눈」이었다.
내가 「밤눈」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당시 심지다방을 드나들던 문청 선배 중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한참 만에 다시 나타났다. 푸른 군복을 입은 채로. 운동권이었던 그 선배는 ‘강제징집’을 당해서 최전방에 배치되었다고 했다.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을 바라보며 시대에 대한 울분과 청춘에 대한 절망을 곱씹던 선배는 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밤 북쪽이 설치한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 곡을 들었다. 그 노래를 듣는 내내 선배는 탈영하고 싶은 충동을 견딜 수가 없어서 너무나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 노래가 바로 「밤눈」이다.
송창식의 3집에 수록된 「밤눈」은 최영호 작사 송창식 작곡으로 알려져 있다. 최영호는 소설가 최인호의 동생으로 가수 이장희와 서울고 동기동창이라고 한다. 그런데 훗날 출간된 최인호의 자전 에세이에는 뜻밖의 내용이 등장한다. 「밤눈」의 가사는 최인호가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 밤에 쓴 자작시라는 것이다. 아래에 그 대목을 소개한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식 전날 밤 나는 빈 방에 홀로 앉아 강산처럼 내리는 어지러운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 빨리 졸업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그러나 막상 내일로 졸업식이 박두하자 설레이는 불안과 미래의 공포로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어린 날로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중략) 그때 나는 밤을 새우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전날 밤에 쓴 이 시에다 송창식 아저씨가 곡을 붙여서 「밤눈」이란 노래를 만들었다.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 소리도 없이 /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 지금은 얼마만큼 멀어져 왔나 / 아득한 먼 벌판에 눈 멎는 소리 / 당신은 못 듣는가 / 저 흐느낌 소리 / 잠만 들면 나는 그곳엘 간다 / 눈발을 헤치고 옛 이야길 꺼내 / 아직 얼지 않았거든 들고 오리라 / 아니면 다시는 오지를 않지 /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 소리도 없이 /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