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음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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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음악은?

필리핀 25 818

 

 

 

아는 교수님이 곧 정년퇴임을 하는데 기념으로 <내 인생의 음악>이라는 책을 내겠다고 해서 쓴 글이에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내 인생의 음악>이 한 곡씩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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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심지다방을 드나들기 시작한 건 까까머리 고등학생 때였다. 심지다방은 대구 최대의 번화가 동성로 남쪽 끝 중앙파출소 맞은편 건물 지하에 있었다. 꽤 많은 LP판을 구비하고 있던 심지다방은 이창동 감독의 큰형 아성(본명 이필동) 씨가 운영하는 극단의 연극배우와 경북대 의대를 다니는 대학생들이 DJ를 하면서 최신 유행곡을 틀어주는 음악다방이었다. ‘서울에 학림다방이 있으면 대구에는 심지다방이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아직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문예반 선배들을 따라 심지다방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내가 몸담고 있던 고등학교 문예반은 시인 서정윤, 소설가 겸 시인 박덕규, 문학평론가 하응백 등이 거쳐 갔고 시인 안도현과 시인 이정하가 3학년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들은 심지다방의 단골이었고 나도 곧 그들 못지않게 심지다방 마니아가 되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심지다방으로 출근해서 교모와 교복 상의를 구겨 넣은 책가방은 카운터에 맡겨 놓고 DJ박스 옆에 있던 우리들, 애송이 문인들의 지정석에 축 치고 앉아서 밤늦게까지 커피와 엽차를 홀짝이며 뽀끔 담배를 피우거나 김민기와 트윈폴리오와 양희은의 노래를 신청하거나 즉석 백일장을 열거나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을 읽었다. 그러다 우리들 중 누군가 용돈이 생겼거나 시골집에서 보낸 생활비가 도착했거나 현상문예 상금이라도 탄 날이면 가까운 염매시장으로 몰려가서 찌짐(부침개) 한 접시를 시켜놓고 막걸리를 들이키곤 했다. 그렇게 심지다방과 곡주사(막걸리집)에서 문청 선배들이 떠들어대는 개똥철학과 기상천외한 연애담을 숭고한 진리처럼 귀담아 듣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게 그 즈음 나의 일과였다.

심지다방에서 나는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몇 년 뒤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한 미완의 장정일과 이인화를 처음 대면한 곳이 심지다방이었다. 베스트셀러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약 중인 류시화(본명 안재찬)도 심지다방에서 처음 만났다. 시인 겸 소설가 문형렬, 문화평론가 하재봉, 시인 이문재, 소설가 김형경 등 대구 출신이거나 대구를 방문한 쟁쟁한 선배 작가들을 심지다방에서 만났다. 그들은 모두 나의 라이벌이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을 뛰어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가 되겠다고 별렀다.

심지다방에서 나는 참 많은 음악도 만났다. 수백 장의 LP판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DJ박스는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운영되었다. 연극배우와 의대생 DJ가 한 시간씩 교대로 선곡을 담당했는데 이 두 부류의 DJ는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감정이 풍부한 목소리로 유머 넘치는 멘트를 남발하던 연극배우 DJ는 아바와 비지스 등의 최신 유행 팝송을 주로 틀었다. 국내 가요는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단발머리,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민해경의 누구의 노래일까등이 주 레퍼토리였다. 이에 반해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시사성 있는 멘트를 조곤조곤 들려주던 의대생 DJ는 팝송은 레드 제플린이나 도어스나 퀸을, 국내 가요는 한대수의 물 좀 주소, 김민기의 서울로 가는 길, 양희은의 백구,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잌등을 자주 틀었다.

나는 두 부류의 DJ가 선곡하는 음악들을 차별 없이 좋아했다. 연극배우 DJ의 음악은 감성을 자극했으며 의대생 DJ의 음악은 지성을 일깨웠다. 그들이 틀어주는 음악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건 송창식의 밤눈이었다.

내가 밤눈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당시 심지다방을 드나들던 문청 선배 중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한참 만에 다시 나타났다. 푸른 군복을 입은 채로. 운동권이었던 그 선배는 강제징집을 당해서 최전방에 배치되었다고 했다.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을 바라보며 시대에 대한 울분과 청춘에 대한 절망을 곱씹던 선배는 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밤 북쪽이 설치한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한 곡을 들었다. 그 노래를 듣는 내내 선배는 탈영하고 싶은 충동을 견딜 수가 없어서 너무나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 노래가 바로 밤눈이다.

송창식의 3집에 수록된 밤눈은 최영호 작사 송창식 작곡으로 알려져 있다. 최영호는 소설가 최인호의 동생으로 가수 이장희와 서울고 동기동창이라고 한다. 그런데 훗날 출간된 최인호의 자전 에세이에는 뜻밖의 내용이 등장한다. 밤눈의 가사는 최인호가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 밤에 쓴 자작시라는 것이다. 아래에 그 대목을 소개한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식 전날 밤 나는 빈 방에 홀로 앉아 강산처럼 내리는 어지러운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 빨리 졸업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그러나 막상 내일로 졸업식이 박두하자 설레이는 불안과 미래의 공포로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어린 날로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중략) 그때 나는 밤을 새우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전날 밤에 쓴 이 시에다 송창식 아저씨가 곡을 붙여서 밤눈이란 노래를 만들었다.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 소리도 없이 /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 지금은 얼마만큼 멀어져 왔나 / 아득한 먼 벌판에 눈 멎는 소리 / 당신은 못 듣는가 / 저 흐느낌 소리 / 잠만 들면 나는 그곳엘 간다 / 눈발을 헤치고 옛 이야길 꺼내 / 아직 얼지 않았거든 들고 오리라 / 아니면 다시는 오지를 않지 /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 소리도 없이 /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25 Comments
이런이름 2020.05.19 14:44  
오! 한번쯤은 들어본 것도 같은 사람들 이름이 나오니 흥미진진해서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글을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게는 딱히 인생음악이랄 게 없네요.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소름이 돋아던 곡들이 몇 개 있는 한데 인생음악은 아닌 거 같고 좋아하거나 자주 듣는 음악도 대충 10년 주기로 바뀌는 거 같아요.

인생음악 하나 없는 저는 불쌍한 사람인가요?
타이거지 2020.05.19 19:03  
지난해..
카오락의 힘든 시간들속에..
올려주신..뱀부 플룻 소리가..아직도 가슴에..
이런이름님은..가슴이 따듯한 분이십니다^^!.
이런이름 2020.05.20 02:18  
이 곡도 bamboo flute으로 연주했어요. 곡명이 아마 난홍(亂紅)이라고 했던 거 같아요.

https://youtu.be/Ar7nVbjAsEw
(동영상 총길이 5분 15초)

저는 이 곡을 들으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느린 걸음으로 (석양을 배경으로) 멀리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듯 한 느낌이 들어요.
타이거지 2020.05.20 05:45  
차를 마시며 들으니,마음이 차분한 아침입니다.
감사히 듣겠습니다........^^!
필리핀 2020.05.19 19:43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소름이 돋으면 그게 인생음악이져!!

어떤 음악이 이런이름님 누선을 자극하고 피부를 까칠하게 했는지 궁금하네요?
이런이름 2020.05.20 02:26  
그게 그때 그때 달라져요. 가장 최근에 소름이 돋았던 건 김진호가 불후의 명곡에서 부른 '살다가'를 들었을 때였어요. 집사람하고 같이 보고 있다가 둘 다 과일 먹던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게 노래에 빠져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노래가 끝나고도 잠시 말없이... 현장에서 육성으로 들었었으면 하는 욕심이 나더군요.

살다가 - 김진호
https://youtu.be/P6IXyHIxERo
(동영상 총길이 5분 36초)
향고을 2020.05.19 18:18  
내인생의 음악은,
송창식의 "나는 피리부는 사나이다,"
난 피리불면서 유유자적 홑홑한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요,
난 사실 필리핀님과 친하고 싶은데요,
아마 필리핀님과 나의 연배는 거의 비등비등 예상하기에,
확실히 필리핀님 필력은 고졸 본인과는 차이가 분명한걸 느끼는바입니다,
언제 시간 되시면 대전 함오세요,
막걸리 한병 쏘리다,ㅎ
타이거지 2020.05.19 18:44  
비등비등...ㅡ..ㅡ''..헐~!
필리핀님..영맨이야요 ㅠㅠ
지금 짬빱 따지면..꼰대소리 듣지만,
하루에 세끼에다가..가만있자..일년은..365일..에다가..음..모지?
곱하기..넷?!..헐~ 낮은 포복으로..팔꿈치 좀 까지지여~!! ㅡ..ㅡ"
믓지구리~필리핀님..
인생음악 하나 읍다는..거..썰일껄요?! ㅡ..ㅡ" 이런 이름님^^!
피리불다..좇된 아좀마..그 음악 시러해요 ㅠㅠ ㅡ..ㅡ"
필리핀 2020.05.19 19:45  
사람마다 문장 스톼일이 조금씩 다른데
그건 학력과는 무관한 각자의 개성 같아요

대전...두부두루치기가 유명하다던데
꼬로나 물러나면 번개 함 할까요? ㅎㅎ
타이거지 2020.05.19 18:29  
허허..
제 인생의 응악은 그때 그때 달라요 ㅡ..ㅡ"
어느 길 위에서..
어느 음악이 꽃혔는가에..따라..ㅡ..ㅡ"
이 곡은..
니가다깽,,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스테이쥐~
징그럽게 눈이 오던 날..유자와온천..히노끼 야외온천탕에서 눈 막이 꼬깔콘 모자 쓰고
일본소주를 홀짝이며..들었던..송오빠 노래^^ ㅡ..ㅡ'..
갑자기..
니가다역전..400엔 모밀국수도 생각나고 ㅠㅠ
폰슈칸..아싸가오리~ 오백엔 시음코너..프리~시식 코너 생각이 ㅠㅠ
향고을 2020.05.19 19:05  
장정일 62년생
타이거지님 62년생
아마 필리핀님 62년생,
본인은 소띠 61년,철부지 ㅎㅎ
타이거지님 대전 함 오세요
막걸리 한병은 대접하리다
필리핀님과 함께 손잡고 오셔도 무관함요
타이거지 2020.05.19 19:37  
할매꽃도 ,꽃은 꽃이요~~~!!
흙더미..무거워 몬가요 ㅠㅠ
나비는 늙어도..천천히 나비짓..
천천히 오셔요..산넘고,물건너~!! ㅡ..ㅡ"
막갈리에 전신 목간통..대접하리다~~~!!
재난지원금도 있고..ㅡ..ㅡ"
민쯩 까자고 들면..꼰대 소리 듣는다니깐요 ㅠㅠ
필리핀님..열 받구리 ㅠㅠ
영맨~!! ㅡ..ㅡ"



간요
필리핀 2020.05.19 19:50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민증 까봐야 뭔 의미가 있겠으요?

강호에서 만난 사이인데 아래위 10년은 맞먹는 거죵~ㅎㅎ
향고을 2020.05.19 21:45  
그래맞아요
숫눔이 이동하는게 좋을듯합니다,ㅎㅎ
대전에서 번개해도 아마 소수일듯하니
코로너 잠잠하거든 타이거지님이 인천에서 번개함하세요,
적어도 인천에서 번개때리면 열분이상은 확실할걸요,ㅎ
sarnia 2020.05.19 20:21  
강집당했던 그 선배라는 분도 녹화사업대상이라고 의심받지 않았는지 궁금해요.
녹화사업=보안사 프락치공작.
그래서 강집당했다가 휴가나오면 동료들을 안 만나는 게 서로 맘편한 일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지요.

나도 인생음악이란 게 없어요.
예전에 노래방에서 부르던 음악은 대개 진짜 좋아하는 노래보다는 부르기 쉬운 노래를 선곡해서 불렀죠. 
학림다방은 음악을 들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 음모를 꾸미러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들은 음악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학림다방은 아직도 건재해서 지금은 비엔나커피가 유명한 커피맛집이 되었는데 대구의 심지다방은 없어진 모양이군요.
필리핀 2020.05.19 20:40  
고3때 서울에 놀러왔다가 밤에 선배가 알바하는 레스토랑에서 의자 붙여놓고 잤는데 그게 학림 1층이었어요
학림은 1982년부터 2년 동안 거의 매일 갔어요
그 무렵 혜화역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던 게 기억이 나네요
그때 학림에서 주로 틀어주던 음악은 <노예들의 합창>이나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세미클래식이었어요
후니니 2020.05.20 10:54  
그때 고3은 지금 고3보다
입시강박에 덜 시달려서 그런 감성적인 활동을 많이 했을까요?

그땐 유난히 선배들이 어른스러워 보이긴 했죠 특히 서양철학자 어록
몇마디 흘리면 대단해 보였는데

특히 문학지망  선배들이 특출 난 걸로 기억합니다

필리핀님도 엔간히 후배들에게 주목 받으셨을 듯 합니다
필리핀 2020.05.20 15:30  
그때는 까까머리에 일본식 교복에 교련시간에...
어찌보면 지금보다 더 깝깝했을 수 있죠
문예반이나 미술반 같은 특별활동은 지금보다 활발했기에
그런 부서 소속된 나같은 애들만 까졌지 다른 애들은 범생이~ㅋ
후니니 2020.05.20 16:19  
미술부였던 전 그리 까지지않았답니다
다만 술 담배는 좀 일찍 배웠지만..( 담배는 애아빠 되고 끊었습니다)
필리핀 2020.05.21 10:43  
허허...까지지 않고서 어찌 미술을...
농담이구여...ㅋ
후니니님이 미술부였다는 거 첨 알았네요!
후니니 2020.05.21 11:10  
안믿으실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미술부원들 작품으로 73년
명동 설파다방에서 전시회했답니다
유화는 재료값땜에 못하고
수채화나 목탄뎃상화로 했지요

마담이 예술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여걸이였는데
그 당시
그림 그리는 현역화가 선배가 주선해서 고고후배들 전시회할 수 있게 했답니다
캘리아저씨 2020.05.20 13:09  
아~ 심지다방 , 연매시장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추억의 단어입니다.
제가 어릴 적 집이 대구백화점 옆이어서 그쪽으로 오다가다 많은 추억이 있는데
이글과 음악이 감사함과 처량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여 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옆 동내 출신인 김광석 세대인데(82학번) 책에 내용으로 보아 몇 해 선배들의 젊은 날 초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암튼 오래전 애틋한 추억을 다시 한번 반추하게 하여 주신 글 잘 보고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경북대학교 남가주 동문회 게시판에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모두들 힘든 시기에 멋진 옛 추억의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필리핀 2020.05.20 15:32  
오! 대구백화점 근처면 부자동네 사셨네요? ^^;;
저도 82학번이에요!!
일찍부터 까져서 58년 개띠들과 놀았죠~ㅎ
출처만 밝히신다면 펴가셔도 됩니다~^-^
다람쥐 2020.05.21 07:29  
대학교때, 담배가게 아가씨 노래 때문에
동내 모든 담배가게를 돌아다니며, 이쁜 아가씨가 담배파는지 친구들 끼리 전부 확인했는데,
없어다는.................. ㅠㅠ
필리핀 2020.05.21 10:44  
우리 동네 담배가게도
할배나 할매가 담배 팔았어요ㅠㅠ
송창식 아저씨 나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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