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저동 꼬마에게 드리는 작별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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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저동 꼬마에게 드리는 작별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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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대한민국방에 올렸던 여행기 중 하나다
. 2009 10 23 일에 작성한 것이니까 작년 고국방문기가 아닌 재작년 여행기인 셈이다. 이미 보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문득 박완서 님의 현저동 꼬마 시절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실은……추모 글을 올릴까 하다가 그만뒀다.


대신 나 자신의 안국동 꼬마 시절 이야기를 가져왔다.
 

안국동 꼬마가 현저동 꼬마에게 드리는 작별인사인 셈인가?

좀 수정 가필했다
.



 안국동 꼬마 소풍 (?)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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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길은 즐겁다. 나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고향이라면 의례 시골 마을을 연상한다. ‘서울이 고향이라는 말을 하면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하다못해 부산 사람들도 자기 고향이 부산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데 서울 사람이 자기 고향이 서울이라고 말하는 건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오기가 나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내 고향은 서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종로구 안국동 113 번지다. 어찌된 일인지 본적은 중구 서소문동으로 되어 있지만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안국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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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쿄~ 이 집이 sarnia 님의 생가(?).  안국동 113 번지


 

초딩 3 학년때 까지 sarnia 님이 살던 곳이다. 2 층 테라스와 앞마당이 없어지고 창문 구조가 조금 바뀐 것 이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찾는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집이니 최소한 60 여 년이 넘은 고옥이다. 주변의 나지막한 한옥들은 옛날 그대로다. 그 때는 이 집 2 층 테라스에서 남산 케이블카가 보였었다. 비가 온 뒤 공기가 청명해질 때면 남산의 푸른 숲이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 오곤 했다. 물론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다.


 

(근데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집이라는 말은 잘못된 정보였다. 이 집은 선친께서 1950 년대에 새로 건축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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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안동교회 부설 안동유치원과 재동초등학교가 모교다. 당시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교장은 조광호 선생님. 담임은 이재학, 김봉수, 장갑골 선생님……  심재복 선생님 ㅎㅎ 심재복 선생님은 오는 구정 LA 에서 팔순을 맞는 sarnia 님의 작은엄마다. 여군장교 출신으로 당시 양호 선생님이었다. (ㅎ 그러고 보니 박완서 님과 작은엄마는 동갑내기네)  


 

안동유치원 시절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겼다. 뻑 하면 대공포를 쏘아대는 불량이웃 청와대를 둔 덕에 총소리가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1.21 사태 당시 안국동, 청운동, 삼청동, 효자동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분들이라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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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 학년때 동교동으로 이사 갔지만 전학을 가지는 않았다.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소년 sarnia 님이 탄 8 번 새한버스가 중앙청 앞에서 좌회전해서 아치를 지나고 있다. 이 버스는 구 조흥은행 덕수지점 앞에서 우회전, 서소문-아현동-이대입구-신촌오거리를 지나 동교동에 sarnia 님을 내려줬다. 


 

8 번은 당시 우이동에서 성산동 사이를 운행하는 좌석버스였는데 말이 좌석버스지 출퇴근 시간에는 운전기사가 S 자로 꺾어야 차장(안내양이라는 용어는 한참 뒤에 나온 말이다)이 승객을 안으로 간신히 밀어 넣을 수 있는 만원 짐짝버스였다.


 

‘…… 통화는 간단히


 

저 체신부 (지금의 정보통신부) 건물에는 이런 구호도 걸려 있었던 것 같다.


 

대망의 1980 100 억 불 수출 1000 불 소득!!’  


 

그 구호의 주인공은 '대망의 1980 년'을 불과 67 일 앞두고 비명횡사 했다.


 

그가 죽던 그 해. 두 번이나 유괴됐던 정효주 양이 살아 돌아왔다.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하직하던 마지막 해에 자기의 업을 조금이라도 덜고 저 세상에 가려던 것이었을까?


 

무사히 돌려 보내면 선처하겠다는 대통령 성명이 나간 바로 그 날 밤 효주 양이 무사히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밤...... 대한민국은 일제히 안도하고 환호했다.


 

, 참 그리고 이 사진 sarnia 님이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직접 찍은 건데 이런 경우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몰겄다. , sarnia 님에게 있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낙관을 넣지는 않았다.


 

sarnia 님은 어렸을 때부터 차에 관심이 많았다^^ 아직도 차를 보면 자동으로 차종 이름이 나오는데 맨 왼쪽 아래부터 크라운-포드 20 M- 뉴 코티나-마주 보이는 택시는 코로나, 맨 오른쪽 아래 있는 차는 잘 모르겠는데…… 코티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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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앞이다. 2009 년 당시에는 봉봉분향소로 더 잘 알려진 곳이었다. (봉봉분향소 = 봉하마을 가면 봉변 당할 문상객들이 조문했던 분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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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쌀람들이 여기 웬일이야?


 

첫 로맨스의 기억이 남아 있는 창덕여고를 가 보았다. 창덕여고는 재동초등학교 대각선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추억의 여학교 간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헌법재판소’라는 엉뚱깽뚱한 간판 하나가 떡 하니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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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들 그때 미안했습니다. 이 학교 교문에다 대고 꾸벅


 

재동초등학교의 개구쟁이들은 아는 누나들이 많았던 창덕여고 대신 약간 멀리 떨어진 풍문여고로 원정을 가곤 했었다. 이 학교를 다녔던 50 대 초 중반의 누님들이라면 하교시간에 작대기를 들고 나타나 자기들을 괴롭히곤 하던 정체불명의 그 소년들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여자 중 고등학교 앞에서 행패(?)를 부리던 개구쟁이들이 우리만은 아니었다. 그 동네에는 유달리 아이들이 많았는지 초등학교들이 많았다. 우리가 똥통학교라고 놀려대던 교동을 비롯하여 청운, 경복, 수송, 삼청 등등……


 

이 학교 길 건너편에는 신민당 중앙당사가 있었는데 그 앞에서는 아저씨들이 작대기가 아닌 각목을 들고 패싸움을 벌이곤 했었다. 이 장면은 특히 내가 8 번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많이 목격했던 것 같다. 풍문여고와 신민당사 사이에는 육교가 있었는데 어떨 때는 그 위에 올라가 구경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이 동네는 애새끼들은 애새끼들대로 작대기를 들고 동네방네를 휘젓고 다니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각목을 들고 패싸움을 자주 벌였으며 한 귀퉁이에 있던   파란기와집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공중에다 총을 갈겨대는, 한마디로 약간 맛이 간 동네였던 것 같다.   


 

풍문여고는 그대로 있었지만 신민당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최초로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중앙당사도 이곳이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40 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그 자리 앞에는 인사동 입구임을 알리는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일대가 다 변했지만 가장 많이 변한 곳은 인사동이다. 인사동은 여렸을 때 살던 곳과 지척에 있는 곳이지만 별로 가 본 기억은 없다.


 

이름만 들어도 고리타분하던 그 동네는 이제 이 일대에서 가장 활기찬 동네가 되었고, 대한민국에서 영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잘 통하는 국제동네로 탈바꿈 해 버렸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방문했던 동네도 인사동이다. 일단 이 동네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해진다. 아마 오랜 외국생활로 약간 탈 한국화된 내 정서와 문화로도 비교적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동네가 이 동네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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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 있는 스타벅스는 간판도 한글이다. 영어 이외의 스타벅스 간판을 본 건 처음이다. 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그 회사가 Zionist 단체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의외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어떤 회사의 상품의 매입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지금 같은 국제 자본 지배 및 연결구조 아래서 그런 식의 상품 불매운동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가 이 브랜드의 커피를 마시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다. 커피인지 탕약인지 맛을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010 년 한국에 다시 갔을 때 기어이 이 한글간판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5000 . 비싸다.


 

그날은 큰 형 부부하고 시간을 보냈었는데 인사동에서 점심값과 커피값은 모두 내가 냈다. 물론 점심에 내가 쏜 비용은 그 날 저녁 하얏트 호텔 레스토랑에서 큰 형 부부에게 일거에 덤탱이를 씌움으로써 모조리 회수하고도 남은 것 같다.  ㅍㅎㅎ    54.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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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걷는 것이다."

아마 보리와 병정에 나오는 말일 것이다.

지금 내게는 여행이 걷는 것이란 말이 더 실감이 난다. 매년 가도 사람도 도시도 놀랄 만큼 변해버린 서울이 내게는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피곤하지가 않다.

물어물어 찾던 박당표구사 간판이 조그맣게 보인다. 그 간판을 찾은 이유는 표구사에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가게 뒷골목에 있는 8 천 원짜리 꽃게장 백반집을 가기 위해서다. 그 저렴한 가격에 별미를 즐길 수 있다는 것, 내가 고국을 자주 찾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 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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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차로에서 인사하는 sarnia . 안뇽~~~~ 43.gif


바로 저 자리에서 카메라를 손에 든 채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게 짠하고 불쌍해 보였는지 웬 아줌니가 한 장 찍어주고 가셨다.  


 

아래 사진은…… 라오스 단사오 마을 같은데 영화 엽문’ (염문이 아니고) 에 나오는 영춘권법 자세로!

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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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_29.gif?rv=1.0.1 현저동 꼬마 박완서 선생님, 오랫동안 기억할께요 etc_29.gif?rv=1.0.1


 

6 Comments
plantubig 2011.01.23 14:45  
제 나이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 무렵 쯤이였지요.

워커힐에서 구리 방향으로 강변을 따라 가다보면 아차산 산자락 아래 강을 향해 작은  마을이 하나  나타납니다.

동네 이름은  잘 모르고 그때는 '우미내'라고 불렀어요....그 동네를......

그곳에서 부군은 돌아 가시고 미망인 되신 박 완서 선생님을 아차산 등반 하산길에 뵈었었는데,,,

마당에 있는 작은 채마밭을  손 보고 계시더군요.

시원한 오미자 차 한잔  얻어 마시고 왔었읍니다.


어젯밤  늦게까지 잠이 오질 않아 마당에서 서성거리다가  밤하늘의 별을 세어 보았읍니다

아,,,,,,밤하늘에,  별이 하나 더 늘었네요.

명멸하는 별이 되셨나 봅니다.


좋은곳에서 편안히 영면 하시길  바랍니다.
sarnia 2011.01.24 02:05  
저는 사실 그 분 팬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자꾸 그 분 이야기들이 떠 오르는군요. 날카로움보다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는 정겨운 인상도 눈에 밟히고요. 아주아주 아까운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기분이 자꾸……

서울은 계속 추운가요? 여긴 영상 4 도랍니다^^
sarnia 2011.01.24 02:08  
ㅎㅎ 아마 아직은 이야기 보따리…… 시작 안 하셨을 것 같은데요. 23 년이나 헤어져 있었던 아드님과 해후부터 하시지 않을까요?

이 배경음악-희망은 내게 잠들지 않는 꿈 ...... 갑자기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십 수년을 헤어졌던 김탁구와 그 어머니.
참새하루 2014.10.13 14:19  
sarnia님의 어린 시절을 엿볼수 있는
여행기였습니다
그 오랜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시네요
아직도 명명한 세상돌아가는 일이며
비판적인 시각과 명쾌한 결론을 보면
sarnia님은 나이도 안먹는듯
하긴 얼굴을 보면 이건 완전 생생동안이시니

늘 추억의 수십년전의 일은 생생한데
어제 일은 이제 가물하니
저만 늙어가는듯 합니다^^
Robbine 2014.10.14 18:17  
저도 참새하루님 글에서 링크타고 왔습니다~

박완서 작가님 글을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신 일화는 기억나네요.

노트북이 고장나서 수리기사를 불렀는데
다 고쳐주고서 나가는 수리기사가
"할머니, 이거 잘 모르면서 막 만지고 그럼 안돼요. 그러니까 고장났잖아요"
했다고 하네요.

그런 큰 문인을 눈 앞에 두고도 바보짓 하지 말고 평소에 교양을 쌓으라는 뜻으로 해주신 이야기겠지만, 정작 박완서님은 자신을 평범한 할머니처럼 대해준 수리기사가 재밌기도 하고 오랜만에 좋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sarnia 2014.10.14 22:07  
와우,, 이 오래된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두 분 께 감사드려요..
전 사실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이지만, 박완서님 작품은 몇 편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많던 싱아..' 와 '한 말씀만 하소서' 가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두 작품 모두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싱아... 는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말씀...'은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심정을 담고 있지요. (참고로 작가는 1988 년 당시 25 세였던 막내아들이 죽는 불행을 당합니다)

.. 오늘은 LA 작은엄마에게 전화나 해 보아야겠어요.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만, 두 분이 동갑내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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