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와 민폐
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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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30 01:19
예전, 어렸을적 만화책을 보면,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라는 대사를 종종 보았다.
요즘은 민폐라는 단어를 자주 쓰지만, 이는 쓰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해 제 3자나 피해 당사자가 민폐라는 단어를 쓰는 반면,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말은 예의상 던지는 의례적인 말이다.
억지로 비슷한 표현을 우리 말에서 빌자면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정도가 될까?
어느 정도 자라서 폐를 끼쳤다는 말이 일본어의 표현임을 알고서야, 어릴때 만화책에서만 그런 표현을 보고 실제생활에서는 그런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폐를 끼쳤다는 표현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들의 가정교육의 기본은 바로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원래 예의의 첫 출발이 내 싫은 것은 남한테도 싫은 것이라는 배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면, 일본인들의 '폐'에 대한 집착은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인들이 군국주의 문화에서 뿌려놓은 수많은 병폐-폭력을 동반한 권위주의와 그에 따른 변태적 행위들-는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우리 생활 속에 많은 흔적을 남겨놓았는데, 일본인들의 예의인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몸가짐은 전혀 우리 생활에 남아있질 못하다.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조심스런 몸가짐 대신에, 기죽이지 않고 내 자식 키우기라는 모토에서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모들이 관대하다.
그리고 인터넷 상에 생활 이야기 중에 많은 소재가 '민폐를 끼치는 기죽지 않고 나대는 아이들과 그 부모'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어쩌면, 비극적인 일제 강점기 속에서 그나마 배워야 할 부분은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말아야 할 부분은 배워버린게....우리의 또다른 불행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도 한 번 쓴적이 있는데...우리 전통 예절도 나쁘지 않다.
다만, 나이로 연결되는 종적인 예의가, 상호 존중이 아닌 아랫사람만 알아서 기어야 하는 점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근데 몇 달 전, kbs에서 우리네 전통문화 시리즈 선전 중에서 처음으로 스승을 모시는 예식을 보고 놀란 점이 있다.
제자들이 스승을 모시겠다고 절을 올리면 스승은 겸손히 절을 받고, 그 후에 스승이 제자들에게 역시 절을 한다. 제자들은 고개를 돌려 조심스레 스승의 절을 받았다.
그러한 상호간의 절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이를 예서 찾아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오니 삼가 절을 올리옵니다.'
'세상에 허명이 높아 제자를 두기에 두려움이 마냥 앞서니, 허물은 빼고 나은 점만을 배워 가시게'
그게 정말 우리의 전통 예절이었다면...일제는 우리 예절에 사악한 권위주의만 심어놓은 원흉이란 점이 또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