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이사 경험기(1)
[Browning Version]이라는 영화에 명대사 하나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귀찮아서 하기 싫어하는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이사, 하나는 이혼이다]
移徙와 離婚, [이]라는 한자는 전혀 다르지만 정말 비슷하게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 달에 이 중 한 가지를 경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우리 부부는, 생활 기반을 우리나라에 놓아 두고 외국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닌
진짜 본격적인 우리나라 안에서의 이사를 했습니다.
무려 만 13년 만이었습니다.
게다가 13년 전의 이사는, 이사 갈 집이 확실히 정해져 있던 이사였고
이번에는 집이 팔린 후 갈 곳까지 제가 직접 알아보아야 했던 이사였습니다.
태사랑에 저의 이사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태사랑에는 연령층상 이사를 해 보신, 또는 해 보실 분들이 많은데다가
이번의 집을 결정할 때에 태국 여행에서의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꽤 많은 횟수의 태국 여행이 그냥 공으로 지나간 것이 아니라, 여러 호텔에 묵어 보면서
제게는 제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좀 생긴 터였습니다.
좀 많긴 하지만, 이런 것이었습니다.
1. 오래되지 않은 아파트 but 너무 새로 지은 것은 아닌 곳
(지은 지 1년 반에서 2년 정도가 가장 이상적.
호텔은 새로 지은 것이 좋지만, 아파트의 경우는
초기 입주자가 노력해서 갖추어야 하는 시스템이 너무 많아요)
2. 정남향-남동향-남서향 순으로 선호. 그 외의 집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할 것.
3. 겨울의 난방과, 여름의 한낮에 쨍쨍하게 내려쬐는 햇빛에 대한 대처는 확실히 되는 집
(한 마디로,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한 집)
4. 고층
5. 주변이 산이나 강인 곳.
전망도 좋고 시원할뿐더러 공기도 좋으니까.
하지만 산을 한참 올라와서 마치 유배된 듯 갇혀 있어야 하는 위치는 좀 곤란하다.
(아래의 12번과 연관됨)
6. 편의시설 가까운 곳(도심일 필요는 없지만 부심과는 멀지 않은 곳)
7. 위의 편의시설 중에서도, 특히 먹을거리가 풍성하고 저렴한 시장이 가까운 곳
8. 직장이나 교회 등에서 한 군데와는,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정말 가까운 곳
9. 지하주차장이 있는 곳
10. 부엌 선반이 넉넉하고(아일랜드 선호) 수납이 넉넉한 곳
11. 메인발코니 반대쪽에 다른 발코니나, 또는 큰 창문이 있는 곳(햇볕과 전망, 통풍 때문)
12. 교통시설이 200m 이내에 있는 곳
(태국이라면 BTS이겠지만 서울에서는 마을버스, 간선버스가 서는 정류장 또는 지하철 역이 가까운 곳.
개인적으로 전자 선호)
진짜 많죠?
이 이외에도 조금 더 있지만(뭐 어디어디가 가변형 벽면으로 되어 있고 하는 세세한 것들)
그것은 지나치게 개인 취향이라서 생략하고 굵직한 것들만 적어서 이 정도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번에 위의 조건들을 다 만족하는 집을 찾아낸 것 같아요.
그것도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가 아니라
어느 날 우연히 버스를 잘못 내린 덕분에요.
조선 시대에는 저희가 살았던 집이나, 또는 이사온 여기나 다 뭔가가 서 있던 장소였는데
저희가 이전에 13년 동안 살던 곳은 독서당터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정말 외지고, 조용하고, 서늘하고, 독서하거나 뭔가에 집중하기는 딱 좋은 집이었습니다.
(그 곳도 거주지로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혹시 그 쪽으로 이사가실 분들께는 강추해요.
서울에서 그만큼 녹지를 끼고 있는 곳이 아주 드뭅니다)
이번에 옮긴 곳은 그에 비하면 저자 한복판(은 아니지만)이어요.
독서당터에 비해서는 훨씬 복잡하고, 시끌시끌하고, 햇볕이 쨍쨍 내리쬡니다.
지하철역과(나름 더블역세권), 간선버스가 몇 십 대씩 정차하는 정류장이 바로 앞이어요.
하지만 백 걸음도 안 가서 울창한 산이 나오고, 집 앞은 전망 좋은 강이며
예전 독서당터는 딱히 우리의 생활권 어디에서도 가까운 곳이 못 되었지만
이사 온 곳은 매일 아침 남편이, 위에 말한 그 산을 가로질러 등산길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시장이 가까운 것을 제가 고집했던 이유는,
저녁 늦게 방짝이나 우돔숙 시장 등에서 장을 봐다가 숙소 냉장고에 쟁여 두는 그 느낌을 너무나 좋아해서였기 때문인데, 요즘은 그 경험을 거의 매일 저녁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의 느낌으로 볼 때에 이사하는 경험은
여행 때에 숙박할 호텔을 고르는 경험과 많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사하는 과정은 물론 힘들었지만, 모두 끝내고 난 후 지금은 정말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