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평범한 주부입니다.
10여 년 만에 대학교 동창과 연락이 됐는데 그만 사랑에 빠졌어요.
짜릿함과 행복을 맛보지만 항상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우리 둘 다 가정은 지킬 거예요. 그 친구와 계속 잘 지내고 싶은데 괴로워요."
어떤 여인의 고민 상담에 김어준은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68혁명의 이 구호가 참 마음에 든다.
세상에 금지되어야 할 것은 없다.
단지 그 금지와 터부를 넘어설 때 치러야 할,
부당하지만 혹독한 대가를 감수할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그녀의 죄의식은 사실 '사회적, 제도적, 법적 압박을 스스로 내재화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을 도덕률의 최소 기준으로 삼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녀에게 돌을 던질 권리를 갖는 유일한 사람은 배우자일 것이다.
그것도 물론 당사자들끼리 일부일처제,
즉 '상대방에 대한 성적 독점의 권리를 갖는다'는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의 얘기다.
혹자는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경우를 예로 들며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 상대방의 바람기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 받고 질투심에 시달렸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독점에 대한 욕망'은 어쩔 수가 없는 걸까.
암튼 그녀가 웃기는 건,
일부일처제의 세뇌된 윤리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승인(죄의식)하면서도
'짜릿함과 행복함'의 인간적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키려 한다는 거다.
“나는 일부일처제를 지지하지만, 일부다처제 혹은 일처다부제로 살고 싶어.”
형용모순이다.
물론 출구는 있다.
'성적 독점권'이란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된다.
사회적 압박과 제재에 당당히 맞설 내공만 갖출 수 있다면 <노 프라블럼>이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에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사회적, 제도적, 의식적인 압박을 벗어던진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마도 그건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집을 나올 때
내가 챙긴 거라곤 옷 보따리 몇 개가 전부였다.
딱히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윤창중이처럼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버티고 싶진 않았다.
했으면 한 거고, 안 했으면 안 한 거지
애매모호한 말로 상대방의 복장을 터뜨리는 짓거리는 차마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도리이자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 같은 장삼이사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책이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