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모모오빠ອ້າຍ "글쓰기의 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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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모모오빠ອ້າຍ "글쓰기의 왕도"

몬테백작 2 477

 

글쓰기의 왕도



아래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착한 내 여동생 모모 다.

그래서 내 여동생은 큰 귀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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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펜데믹, 언텍트 시대에 적응하려고, 대형 모니터와 게임기,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한 마샬스피커, 바둑 게임도 구입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허전했다. 

신변잡기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믿음이 있다.

사람들은 즐거우면 되는 거지, 무어 그리 가리고 따지냐고 할지 모르겠다.

즐거움 그것만으로 일상을 채운다는 것은 마뜩잖은 일이다.

그러다 나는 최근 글쓰기 대가들을 만났다.

김동식 작가와 이슬아 작가이다.

 

먼저 김동식 작가에 대해 말해보겠다.

김동식 작가는 서울 성수동 단추 따위를 만드는 주물공장에서 10년을 일했다.

사방이 회색빛 색깔과 거무튀튀한 벽면, 졸린 듯 흐릿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눈을 감고서도 할 수 있을듯한 단순 반복 작업을 했다. 

10년 동안.

집과 공장만을 왔다 갔다 했다.

친구를 사귀지도 만나지도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즐거움을 찾았던 것은 인터넷 세상에서였다.

그는 서울로 상경하기 전에 대구의 피시방에서 3년을 일했다 했다.

김동식은 매일 퇴근 후 잠들기 전에 "오늘의 유모어" , 오유에 접속하여 게시판에 글을 읽고 댓글을 달거나 릴레이 소설을 써보기도 했다.

자기 글에 최초로 긍정적인 격려성 댓글에 감동했다.

마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식으로 김동식은 분발했다.

내가 김동식을 주목하게 된 것은 김동식은 어릴적 만화를 많이 봤다 했다.

나도 만화라면 누구 보다도 많이 봤다고 장담할 수 있다.

나는 만화방 가게 아들이었다.

내가 배다른 아버지의 마누라와 그의 자식(내게는 배다른 형들이다)들의 구타와 학대에 견디게 한 시간도 따지고 보면 만화 보는 즐거움이었다.

만화의 세계는 모든 것을 이루어지게도 하지만, 무엇 하나 실체적이지 않은 것을 특징으로 한다.

볼 때는 삼매경, 무아의 경지이지만,  만화책을 덮을 때쯤이면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은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김동식은 중학교 1학년 학력의 끝으로 학교에 가지 않았다 했다.

그 사정도 나와 같다.

 

김동식은 곧장 서울로 가지 않았다.

대구의 피시방에서 3년을 일했다 했다.

3년 동안 저임금으로 이용만 당했다고 술회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터넷과 오유를 알게 해 주고, 간단히 피시를 다룰 수 있는 지식을 피시방에서 배웠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에게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 아버지로서 처음 내게 훈화를 했다.

"얘야, 나쁜 일이 생겼다고 낙담하지 마라.  옛날에 말을 키우던 사람이 말을 잃어버리고 크게 낙심하고 있었는데, 그 말이 새끼를 낳아서 집을 찾아온 일이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와 같다면서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에게 그 당시로 내게는 거금이라 할 2,000원의 비상금을 주었다.

아버지는 비상금 2,000원을 주면서, 사흘을 굶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기 전까지는 비상금을 절대 쓰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으나 나는 그것을 금방 지키지 못했다.

잠깐 이야기가 딴 곳으로 흘렀다.

 

김동식은 두려움 없이 인터넷을 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피씨방에서 갖추었고, 오유에서 격려성 댓글에 크게 감동을 하였다.

그는 한 편, 두 편 글을 올릴 때마다 그가 살아오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칭찬과 격려를 접했다.

나도 그랬다.  학교 다니면 상장은커녕, 담임선생의 모진 매질과 동급생끼리 가끔의 주먹질 싸움의 경험, 학교는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규율과 금기만이 존재했다.

김동식은 댓글 격려에 답하기 위해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벽을 보거나, 단순 반복 노동을 할 때 머리속은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상상을 했다.

나도 신발공장을 다닐 때 이 공장을 때려치우고 고속버스를 타고, 어느 낮선 도시에 내려서 자립해서 살아가는 상상했다.

그 상상만이 콘베어 벨트를 타고 흘러오는 단순, 지루한 12시간의 노동을 견디게 했다.

김동식은 계속, 꾸준히 매일 같이 글을 썼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3일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썼다고 했다.

1년 몇 개 월간 300편이 넘는 글을 썼다고 했다.

그러는 그에게 은인이 찾아온 것은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강의하든 시간 강사의 눈에 띄었다.

강사는 김동식의 1년의 넘는 기간 동안 독자였다.

강사는 김동식의 글을, 재능을 키울 수 방법을 모색했다.

강사는 이미 책을 내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아는 출판사 사장에게 20여 편의 글을 보여 주었다.

사장은 당장 책을 내자고 했다.  기왕이면 더 쓴 글이  있으면 묵어서 3편을 내자고 했다.

김동식의 대표작 "회색인간" 시리즈들이 그래서 세상에 나왔다.

김동식은 자신의 글이 세상에 나온 비결이 꾸준함에 있다고 했다.  동의한다.

 

중국의 고사나 상술에도 부자가 되는 비결은 1. 운이 따라야 하고, 2. 둔해야 한다.(팔랑귀가 되어 여기저기 금방 천방지축 날뛰며 변화를 만들지 말라는 뜻 같다. 일본의 상술책에도 어떤 업종이든 시작했으면 3년을 해보라고 했다.

3. 근면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운, , 근이야 말로 부자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는 가치관에는 공감한다.

 

김동식을 대하는 기성작가들의 반응이나, 인터뷰 태도들을 보면 뜨악한 표정들이다.

자기들 기준으로 보면 김동식 이 괴물은 뭐야?”라는 표정이다.

기성작가들 처럼 문예창작과를 나왔다거나, 교직에 있는 자도 아니고, 자기들 기준에서 보면 일자무식꾼에 불과한데 생각의 실타래를 문자화 했다 해서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놓고 작가 대접해주는 게 몹시 어색해 하거나 내키지 않는 듯 했다.

한마디로 기성작가들은 당황했다.

자기들은 평생 쓰도 김동식이가 1년 몇 개월만에 쓴 작품에 반에 반도 못 미칠 것이기에 그들은 당황했다.

정말 글을 이렇게 써도 되는 것일까 하고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편으로 보기에는 통쾌해 보였다.

그들은 글이란 이렇게 쓰는 거야 하고 폼 잡고 쓰는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김동식의 글쓰기는 한국의 글쓰기 풍토에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사실로 보였다.

  

오늘은 김동식의 글쓰기 동인의 에너지를 이야기했다.

인터넷 특성상 길면 잘 읽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다.

다음에는 이슬아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추신 : 나도 김동식군 처럼 격려성 댓글이 달리면, 김동식작가 흉내는 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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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들국화야 2021.02.27 23:29  
혼자힘으로 검정고시
방통대를..공인중개사까지
성실과 끈기가 아니면
이룰수없는 일이지요~
응원합니다~
몬테백작 2021.02.28 09:47  
요즘 저런 지난한 노력 보다는, 주식해서, 사업해서, IT해서, 유튜브해서
돈 번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한다는 거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오이디스 컴플렉스 였으며, 주홍글씨 였습니다.
어쨌건 "쇼생크의 탈출" 처럼 그 저주스런 단어들로부터 탈출했습니다.
기뻤고, 해냈다는 성취감이 우주를 손에 쥔듯 기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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