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해독기 사건을 아시나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모 대학교에서 주최한 현상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상금이 제법 두둑했다. 그 돈으로 오래 전부터 갖고 싶었던 최신형 크로바타자기를 샀다. 상금을 몽땅 털어서 산 타자기를 쓰다듬으며 나는 잠시 흥분에 잠겼다.
이제 이 타자기로 수많은 명작을 창작할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모든 작가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움화화화!!!
며칠 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도시의 문학청년(문청)들 아지트였던 심지다방에서 보란 듯이 타자기를 꺼내놓고 틱톡거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때, 문청 선배 하나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그는 내 또래 문청들이 구루처럼 여기던 시인지망생인데 방위병으로 복무하는 중이었다. 퇴근을 하고 바로 왔는지 군복 차림의 그는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완준아, 내가 내일까지 부대에 꼭 제출해야 하는 문서가 있는데 타자기 하루만 빌려줄래? 그 문서 제출 못하면 나 영창 가야 해...”
카리스마 넘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한없이 부드러운 그의 태도에 홀린 걸까. 아니면 나를 부러워하는 그의 모습에 허세를 부리고 싶었던 걸까. 나는 흔쾌히 그에게 타자기를 빌려주었다.
이튿날, 타자기를 돌려받기로 한 심지다방에서 밤늦게까지 기다렸지만 선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거의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그런데 빈손이었다. 나는 대뜸 물었다.
“형, 타자기 어딨어요?”
그러자 선배는 몹시 우울한(이라고 쓰고 비굴한,이라고 읽는다) 표정을 한 채 사연을 들려주었다.
나에게 타자기를 빌린 선배는 집으로 가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 반가운 마음에 한잔 두잔 하다 발동이 걸려서 방석집에 가게 되었다. 술시중을 드는 여자가 나오는 방석집에서 젓가락 장단에 맞춰 고래고래 노래까지 부르며 기분 좋게 마시다보니 술값이 꽤 나왔다. 방위병 주제에 그 돈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선배는 꾀를 내었다.
“이게 뭔지 아시오?”
술값 계산서를 들이미는 마담 앞에 선배는 나에게 빌린 타자기를 꺼내놓았다. 마담이 멀뚱한 표정으로 쳐다만 보고 있자 선배는 타자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가 척척 찍혀 나왔다.
“나는 ××사단 정보부에서 일하는데 이게 암호해독기요!”
타자기를 난생 처음 본 순진한 마담은 선배의 ‘암호해독기!’라는 말에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게 없으면 우리 정보부는 기능이 마비되오. 내일 아침 일찍 돈을 가지고 와서 찾아갈 테니 잘 보관해놓으시오!”
군복차림을 한 선배의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마담은 타자기, 아니 암호해독기를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근데 완준아, 그 타자기 얼마짜리냐?”
사연을 들려주던 선배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10만원 주고 샀는데요?”
“외상 술값이 30만원이다. 그 타자기는 찾지 말고 내가 하나 새로 사줄게.”
곰곰 생각해보니 선배의 말이 맞았다. 10만원짜리 타자기를 30만원 주고 찾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날 이후 그를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암호해독기 사건 외에도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켰던 선배는 영창을 드나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얼마 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도시로 이주하면서 한동안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선배는 꽤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몇 년 전에는 큼직한 상도 받았다. 그 상의 상금은 타자기 수백 대를 사고도 남을 돈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에게서 타자기를 돌려받지 못했다.
나는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만약 그때 내가 선배에게 타자기를 빌려주지 않았다면, 선배가 술값 대신 타자기를 맡기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타자기가 온전히 내 곁에 있었다면, 그래서 그 타자기로 열심히 글을 썼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괜찮은 작가가 되었을까?
떠나간 모든 것은 아름답고 흘러간 모든 일은 그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