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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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기억들,

향고을 9 941

내가 사는 동네에서 면사무소가 있는 국민학교는 약 십리가 넘는 길이다.  

내가 태어나서 우리 동네에서 십리 밖으로 나간것은 내가 여덜살때 
국민학교 입학식날 처음 읍내에 나간것이 처음 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입학식날 우리 엄니는 집에서 밥도 해야하고 빨래도 해야하고 
그리고 읍내 국민학교에 가는데 마땅히 변변히 입고갈 입성도 변변치 
못한지라 나는 그래도 그시절 좀 신식물을 먹었다는 작은 엄마와 
학기 삼촌을 따라 그먼 먼지 폴폴 날리는 신작로를 따라 십리길을 걸어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식날 내가 가장 신기 했던건 여선생님이 한두분 보였던것, 
나는 1학년1~2반중 2반이 되었는데 우리 1학년2반 우리 담임 선생님은 
국민학교가 있는 읍내로 들어서기전 복수개 아랫 동네에 살고 계신 오명환 
선생님이었고 1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은 읍내에서 멀지 않은 냇가 건너 
곡마리에 살고 계신 처녀 선생님 이었는데, 신기한건 처녀 선생님이 입고 계신 
단색으로 곱게 차려 입으신 투피스옷, 치마가 무릎위로 살짝 올라가 있고 
여선생님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도 나긋나긋하게 하시는 여선생님이 
아름답고 신기하게 보였다. 

나는 우리 옆반 1학년1반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다. 
어쩌면 저렇게 예쁘신 선생님도 계실까 어린 마음속에 1학년 1반 여선생님은 
내가 태어나서 본 여자중에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옛날 시골에서야 맨날 보는 얼굴이 이웃집 처녀들도 농사일을 하느라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 댕기 머리에 좀 꼬질꼬질 보였지만 여선생님은 
단발 머리에 화사한옷, 분을 바른 얼굴에 옆을 스쳐 지날때 마다 
향긋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자극 하는것이 우리 동네 처녀들과는 
비교 할수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 됐다. 

그리고 국민학교 입학하고 신기 했던건 국민학교 앞에 점빵이 두개가 
있었는데 점빵안에 진열된 난생 처음 보는 물건들이 신기하게 보였다. 
우리야 시골에서 맨날 신는것이 꺼먹 고무신인데 학교앞 점빵에는 
운동화가 한쪽 구석에 수북히 쌓여 있는데 신어보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일었다. 
그리고 하얗게 크림이 발라진 빵이 보였는데 이것은 세상 머리털 나고 
먹어본 기억이 없고 맨날 시골에서 먹는것이라야 보리밥에 보리개떡을 먹는데 
학교앞 점빵에서 본 하얀 크림이 발라진 빵은 보기에도 참먹음직 스럽게 보였다. 

국민학교 입학하고 얼마후 담임 선생님은 말씀 하셨다. 
가정 통신문을 나눠 주며 도장을 받아 오라는내용이었다. 
가정 통신문 내용은 이러한듯 했다.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녀를 두신 학부형 께서는 학교에서 일이 있어 
부역을 해야 하는데 농사일에 바빠 부역을 못나오시는 학부형들께서는 
학교에 나와 부역을 하는 대신 돈 500원을 학생편에 담임 선생님께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우리 엄니에게 가정 통신문 종이를 드렸더니 
다음날 아침 이웃집에서 돈500원을 융통해 오셨는지 나에게 담임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아버지 학교 부역 대신 돈500원을 주는것이었다. 

나는 돈500원을 잊어 버릴새라 꼭움켜 쥐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우리 담임 선생님은 아침 조회를 하고도 
학교 부역 대금 500원을 내라는 소리를 않는것이었다. 
나는 돈500원 간수 하는것도 어렵고 빨리 내라고 하면 좋다고 
생각하며 선생님이 돈을 내라고 말하는것을 기다렸으나 선생님은 
내가 아버지 학교 부역 대금을 가지고간날 결국 돈내라는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나는 학교안에서 돈500원을 간수 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결국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학교앞 점빵을 지나면서 일을 터졌다. 
나는 학교앞 점빵에서 하얀 크림이 잔뜩 발라져있는 
보기에도 정말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빵에 유혹에 벗어나지 못하고 
점빵 안으로 들어가 하얀 크림이 발라져 있는 10원짜리 빵을 집어들고 
돈500원을 점빵 아줌마에게 건네 주었다. 

그런데 거스름돈을 10원 짜리로 아홉장을 받았으면 괜찮았을듯도 한데 
마침 구멍가게가 맨날 1원5원 짜리가 들어 오다 보니 종이돈 10원짜리가 
없었는지는 몰라도 하필 거스름돈 90원을1원짜리 5원짜리 동전으로 비닐 봉지에 
한웅큼 담아 주는데 무게가 철렁하니 들고 집으로 가는데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학평 마을을 지나 냇가보를 건너 보뚝방에서 생각하기를 돈을 들고 
털레털레 들고 집으로 들어 갔다가는 여지없이 우리 엄니에게 들킬게 뻔해 보였다. 

그래서 동전 비닐을 비가 들어가지 않게 칭칭 감은후 보뚝방 바위틈에다 
숨겨 놓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좀처럼 돈이 걱정되어 밤잠을 설칠 지경이었다. 
아무튼 그날 이후 나는 바위틈에 숨겨둔 돈을 야금야금 꺼내 눈깔 사탕을 사먹었다. 

그런데 이웃집 사는 홍식이가 낌새를 챘는지 안챘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엄니 한테 내가 눈깔 사탕을 돈이 어디 있어서 사먹고 다닌다고 
일러 바치자 홍식이 엄니는 또 우리 엄니 한테 이일을 일러 바친것이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우리 엄니가 어린 나를 부르더니 왠돈이 어디서 
나서 눈깔사탕을 사먹고 다니냐며 닥달을 하시는데 나는 안불고는 
못배길듯 싶어 이실직고 하고 다음날 학교 갔다 돌오다가 보뚝방 바위틈에서 
남은 동전 봉다리를 우리 엄니에게 바치고서야 나는 내가 지은 죄를 
사면 받을수 있었다. 
 

나의 외갓집 가는길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서 산골짜기 
뱀골을 따라 원고개 느티 나무를 지나고 수리들을 지나 
남살미 바람 구멍을 지나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몇백년 묵은 아름드리 느티 나무가 마을 입구에 
서있어 오고 가는 길손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느티 나무를 지나면 오르막 길이 마을 까지 이어지고 마을 입구 오른편에 
최씨 문중을 알리는 비석과 오랜 세월 빛바랜 사당 하나가 반듯이 서이다. 

외갓집 동네는 최씨 집성촌으로 약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조그만 골목길을 따라 길옆으로 초가집들이 다닥 다닥 붙어 있었다. 
우리 외갓집 구성원은 외할머니에 외삼촌 하나와 아직 시집 안간 
이모 두명이 도회지로 안나가고 시골 고향집에 남아 보리밭도 매고 
인삼밭도 가꾸면서 밥도 하고 빨래하고 가정일을 꾸려 나가며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어린시절 어쩌다 외갓집에 가보면 나이 어린 이모들은 
매일 농촌일 보리밭에 김매기 하느라 바쁘게 보였다. 
보리밭 매랴 저녁에야 집에 돌아 오면 사랑방 아궁이에 장작불로 
쇠죽을 쑤어 소밥도 줘야지 아궁이에 삭다지로 불을 때 밥도 지어야지 
밥을 먹고 설거지도 해야하지 정말 눈코뜰새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저녁상을 물리고 설거지를 마치면 동네 처녀들이 
나의 외갓집 손바닥만한 안방에 모여 호롱불 밑에서 눈깔 사탕내기 
민화투를 치는데 이제 코흘리게 나는 이모들 민화투를 치는것을 
호감어린 눈으로 바라 보다가 까루룩 잠이 들곤 하는데 밤이 깊었는지 
민화토가 끝났는지 이모들은 모두들 히히덕 거리며 눈깔사탕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다음날 이모들은 아직 먼동 트기도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나 다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짖고 사랑방 아궁이엔 쇠죽을 끊이느라 
여간 바쁘게도 안보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날뜨겁기전 선선한 바람 불때 보리밭 한이랑 
이라도 더매야 한다고 호맹이를 들고 불이 나게 보리밭으로 달려갔다. 
점심때가 돼서야 집으로 잠깐 돌아와 찬밥 한술 물에 말아 된장에 고추를 
찍어 먹고 다시 들로 밭으로 일을 나갔다. 

그래도 이모들은 농사철이 지나고 농한기 겨울에는 좀 한가한 시간을 
보냈는데 아직 장가 안간 외삼촌은 농한기인 겨울에도 산에서 땔감을 
해다 날라야 추운 겨울 온가족이 따뜻하게 지낼수 있었다. 
외삼촌은 아침 일찍 지게를 지고 뒷산으로 가서 나무 한짐 해서 지고 내려 왔다. 

외갓집 동네 사람들은 농한기인 겨울철에 날씨가 따뜻한 날이면 
동네 삼거리 길거리에서 막걸리 내기 윷판을 벌이는데 
외갓집 동네 남정네들이 다나와서 말판을 기웃거리며 떠들썩 
흥을 돋군다. 

눈내리는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버드나무 가지에도 물이 오르고 
눈망울을 터트릴때면 동네 사람들은 논두렁 밭두렁에 들불을 놓고 
농사일 준비에 분주하다. 
농기구도 손봐야 하고 각종 채소 씨앗 파종도 해야하고 
고추장에 상추쌈이라도 해서 먹으려면 부지런히 퇴비도 만들어야 하고 
읍내에 가서 비료도 몇포대 사다 놔야 한다. 

농사철이 오면 또 시집 안간 이모들은 바빠졌다.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까지 눈코 뜰새 없이 밭으로 들로 나가야 했다. 
이모들이 청보리밭에서 밭을 매고 있으면 뒤산에서 뻐꾹새가 
뻐꾹뻐국 청아한 맑은 소리로 울어댔다. 

그렇게 이모들은 산골짜기 다락논 뙤알밭에서 보리밥 먹고 일만 하다가 
몇년후 도회지에 사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아들딸 낳고 아둥바둥 살았다. 
이제 이모 들도 모두다 환갑이 지난 나이 아들딸 시집 장가 보내고 
쉴만도 하련만 자식들에게 짐되기 싫다고 아직도 식당을 운영 하느라 
비쁘게 살아간다. 
그런데 나는 나만 홀로 이렇게 동남아를 떠돌고 있으니 때론 외롭지만 
그옛날 보리밭 매던 이모들을 생각 하면서 잠시 외로움을 잊어본다. 

 

내가 아마 열살이었던가, 

어느해 가을 동네가 빠알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을 정취가 물씬 묻어나던 오후,

보따리 하나 달랑들고 우리집 명과나무 사립문앞을 

나보다도 열살쯤은 많아보이는 단발머리 누님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단발머리 누님은 우리 동네에 아무 연고도없이 떠들어온 누님이었다.

 

사람들은 누님이 홍식이네 친척일거라 생각했었다.

어쨌든 누님은 당분간 홍식이네집에서 

아이들을 돌봐두면서 밥이나 얻어먹고 있었다.

그런데 홍식이네집도 양식이 풍족한것은 아니어서 

누님은 감나무집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누님은 감나무집에서 집안청소와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살았다.

누님은 단발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

자그마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가 아름다웠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누님은 동네에서 보이지 않았다.
소문은 ~가 누님을 눈독들이자 ~이 차비만줘서 내보냈다고 하는데

누님이 동네를떠난 정확한 이유는 알수없다.

 

세월이 흐른후 ~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옛날 우리집 명과나무 사립문앞을 보따리하나 달랑들고

나폴나폴 걸어가던 단발머리 누님의 뒷모습을 그려보며 

나는 누님을 그리워 했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초반까지 내가살던 고향마을에는 

군대입대후 월남에간 아저씨가 몇명되는데 그중 간간히 고향으로

미군에서 보급되는 통조림 깐스메하며 초코렛 과자 커피 껌등  

그당시 시골에선 좀처럼 보기힘든 물건등을 잔뜩 챙겨가지고

월남에서 휴가를 나오는 월남아저씨가 있었다.

 

휴가를나온 아저씨 고향집에선 귀한아들 살아서 돌아왔다고 

온안집이 울음바다가되었고 월남아저씨는 늠름한 검게 그을린 모습으로 

걸을때마다 링소리가 철컹거리는 삐까번쩍 군화를 신고 온동네를 주름잡고 다녔다.

월남 아저씨가 가는곳은 항상 동네 친구들이 월남아저씨를 따라다니며 

월남 전쟁 이야기에 대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듣고싶어했다.

그러면 월남아저씨 한껏 어깨에 힘좀주고 화랑담배 궐련 한개피 입에물고

담배연기 하늘로 멋지게 뿜어올리며 잔뜩 뜸좀 들이다가 월남 전쟁이야기를 하는데 

좀 과장되게 말을하는듯 말을하지만 동네 친구들은 월남아저씨가 하는말을 

하나라도 허투로 들을새라 귀를쫑긋 열고 경청하였다.

 

어느해인가는 우리동네 앞을 흘러가는 앞바위 냇가에서 월남아저씨는 

월남전쟁터에서 수류탄을 던져봤나 의심스럽지만은 뭘그리자신만만했던지 

월남에서 휴가를 나와 동네 친구들과 냇가에서 물고기를잡아 철렵을 하려고 했던지는 모르지만

위험한 깡이라는 폭팔물을 물속에 던지다가 뭐가잘못되고 무슨 실수를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월남아저씨는 그자리에서 몇번 버둥거리다가 죽고말았는데 월남아저씨 가족들이 달려와 

대성통곡을 하는데 눈뜨고는 못볼 가슴쓰린 광경이었다.

월남 아저씨가 죽고 한동안 앞바위 냇가에는 사람이 얼씬도 하지않았는데

얼마후 앞바위에서는 성대한 굿판이 떠들썩하게 앞바위 너른 들판을 흔들었다.

 

우리동네 윗말 날망집에는 내가 어린시절보던 머리가 하얗고 

얼굴에서 풍겨지던 온화한 인상이 좋은 할머니가 살고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손자들과 함께 살고있었는데 이유는 할머니 아들이 

6.25때 공군 조종사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쟁중 전사를 했다고 한다.

어쩐일인지는 모르지만 며느리는 보이지않는걸로봐서 아마 재가한듯 보였다.

그런데 할머니 손자 두명중 한명이 결혼을 하고 월남을 갔다가 제대를 하고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느 여름방학때보니 못보던 소녀하나와 소년이 

날망집을 오고가고 들낭달낭하는게 보였다.

 

그런데 소녀와 소년의모습은 우리 시골아이들하고는 뭐가달라도 한참 달라보였다.

옷을입은 옷때깔하며 우리들이 신고있는 꺼먹 고무신하고 다른 앙증맞은 구두를 신고 있엇는데

얼굴 피부도 어쩜그렇게 희고 뽀얀한지 우리 시골 아이들하고는 뭔가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달라보였다.

 

어린 내가보기에도 서울서온 소녀는 내가늘봐오던 우리동네 제일 예쁘다는 

미자보다 백배는 더예쁘게 보였다.

그리고 어느날보니 우리가 평소볼수없는 뭐이상하게생긴 가루를 물에타서 마시는데 

지금생각해보면 소녀가 물에 타서 마시던것은 커피가 확실한듯 보이는데 

아무튼 뭔가 이상한 가루를 물에 타서 맛있게 마시던 소녀를 바라보던 심정은 

내마음속 어느 아름다운 별나라에서 내려온 천사로 보였다.

 

마당에 커다란 힌색 치알이 쳐저있고 치알아래에는 짚으로만든 멍석이 깔려있는데 

멍석위엔 손님상을 봐둔것인지 군데군데 둥그런 도렛상과 직사각형 접이식 앉은뱅이 

식탁이 놓여져있는데 힌두루마기를 걸치고 힌수염이 길게난 할아버지들이 사기그릇에 

막걸리를 마시며 떠들썩하다.


안방마루 앞에는 상주들이 문상을 할때마다 아이고아이고 처량하게 곡을할때면 

명과나무 사립문에는 연신 부고전보를 받고 달려오는길인지 

눈물,콧물 통곡을하며 들어오는 여인들이보인다.

 

초상집에 밤이되면 재떨이라고 상여꾼들이 상여를메고 예행 연습을 하는데

흥행 여부는 온전히 요량재비 몫이다.
요량재비가 얼마나 구성지게 처량한 목소리로 북망산천 뻔한 레파토리로

흥을 돋궈놔야 그래야 동네 사람들도 흥이나서 구경할맛도 나면서 

요량재비 잘한다고 추켜세우는 말도 듣지만 요량재비가 시원찮으면

상여꾼들도 흥도안나고 구경꾼들도 별신통치않은 반응이다.

 

그래도 그옛날 동네에 초상집이라도 있어야 동네가 한바탕 시끌벅적하니 

사람사는 동네처럼 느껴졌다.

그시절만해도 때거리가 부족한 시절이어서 초상집이라도 있는날이면 

동네사람들은 그래도 돼지비계에 막걸리,떡한쪽이라도 먹을수있었고 

동네아이들도 초상집을 기웃거려야 부침개 하나라도 맛볼수있었다.

아무튼 동네에 초상집이라도있어야 동네사람들이 다함께 모여 

서로돕는 모습들이 그당시로는 아주 맛깔나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장례문화는 옛날에비해 사람들이 바쁜지는 몰라도 

장례식장에 얼굴한번 삐쭉내밀고 육계장 한그릇 비우고 장례식장을 떠난다.

지금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에비해 정말 바쁘게 살아간다.

직장인들은 잠자는 시간빼고나면 눈만뜨면 일이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잔업에다가 특근까지 눈코뜰새가 없다.

 

나는 가끔 생각해본다,현대와 옛시절을,

그런데 지금사람들이 옛시절 사람들보다 과연 행복할까? 

 

눈이 소담스럽게 펑펑내리면 온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

우리 어린시절만해도 지금처럼 겨울에도 비닐하우스 재배 시설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시골사람들은 겨울 농한기가 되면 햇빛좋고 따뜻한날에는 산에가서 땔감이라도해오지만 

눈내리는날 하는일이라야 새끼를 꼰다든지 아니면 이웃집으로 마실을 다니며 

민화투를 치는것이 일이라면 일이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은 안방에 틀어박혀 화롯불을 가운데놓고 

동네 가정사 누구네집 누가 혼사가 오간다든지 누구네집은 땅을 팔자를 내놓고 

이사를 간다더란 이야기를 나누며 한겨울을 보내는것이 전부였다.

 

학생들은 겨울방학을 맞아 방학숙제는 내팽개치고 썰매타기에 바쁘고

눈내리는날에는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하면서 바람부는 왜둑에서

연을 날리기도 하는데 하루종일 바깥을 쏘다니느라 때를 거르기 일쑤였다.


그리고 눈이펑펑내리는날은 솜씨좋은 중학생 형은 멧새잡는 새탁치기를 만들어 

호두나무밑에 놔둬보지만 어디 멧새란놈이 그리 호락호락 걸려들지는 않지만은 

새탁치기에 멧새가 요행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하루종일 눈빠지게 

새탁치기에서 눈을 떼지못했다.

 

겨울 동장군도 물러가고 시냇가 버드나무에 물이오르면 사람들은 

논으로 밭으로 나가 들불을 놓고 봄농사 준비를 한다.

 

그래도 옛날 시골농촌 농한기 겨울풍경은 아름다웠다.

가을에 거둬들인 알곡과 배추 무우 고추 참깨가 헛간에 가득하기에

마을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화롯불을 가운데 두고 한가롭게 담소나 나누며

겨울 한철 편안하게 걱정없이 겨울을 날수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골에도 농공단지가 들어서고 시골사람들도 공장에나가

일을하며 겨울이나 여름이나 상관없이 일을 해서 돈을 벌어다가 

시골에다 근사하게 슬라브 빨간 벽돌집도 짖고 잘살고 있는듯 하지만 

어째 요즘은 시골에가봐도 시골 냄새도 안나는것이 

청년들은 눈을씻고봐도없고 어린아이들은 볼래야 볼수도없는것이

하여튼 예전 우리네 살던 모습과는 딴판이란 생각이 들어서

지금 현재가 더풍요롭고 행복한지 의문을 가질수밖에 없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서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까지는 꼭 십리길이었다.

그리고 이길은 새로확장한 신작로를 따라간다면 꼭십리길이고 

국민학교까지 해찰하지않고 부지런히 걸어간다해도 

한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신작로를 따가가지않고 지름길인 산을타고 가다가 배티재를 넘어가면 

그만큼 거리도 가깝고 걸어가는 시간도 짧았다.

그런데 대부분 여자 아이들은 새로난 신작로를 따라 학교를 오고갔지만

남자 아이들은 대부분 산길을 타고 배티재를 넘어 학교를 다녔다.

어느새 겨울방학도 끝나고 3월이되어 새학기가 시작되면 

냇가에도 얼어붙었던 얼음이 녹아내리고 버드나무 꽃망울,

아지랭이 너울너울, 배티재 아래 마늘밭은

들불이 야금야금 타들어가며 까맣게 재로 변했다.

 

어느 화창한 봄날 배티재 산등성이마다 진달래가 붉게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살랑이던 반공일 이었다.

내가 아마 국민학교 3학년때이던가 하여튼 반공일이라 오전 수업만 마치고

동네 형들과 다같이모여 양지소골 철다리를 지나고 배티재 아래 

까맣게 재로변한 마늘밭사이 논둑길을 지나 진달래꽃 흐드러진 

배티재를 올라서고 있었다.

 

그런데 배티재를 중간쯤 오르던 6학년 형들이 갑자기 배티재아래 마늘밭에서

들불을 놓고있던 양지소골 농부 아저씨를 향해 바윗돌을 굴리는것이었다.

바위돌을 굴리면서 농부아저씨를 골리려고"아버지 돌 굴러가유"

 

마늘밭 농부아저씨 배티재를 올라 쫒아오는데 6학년 형들은 히히덕거리며

배티재 넘어 바위뒤에 숨었다.


그런데 6학년 형들도 집에가면 마늘밭 농부아저씨가 쫒아왔다는걸 알고

집에 내려가지도못하고 배티재 바위뒤에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진달래꽃을 따먹으며

날이저물고 마늘밭 농부 아저씨가 돌아간 뒤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살던 마을 뱀골 골짜기 수름지 아래에 쌍바위가 있었다.

쌍바위는 아주 커다란 바위 두개가 붙어있어 마을 사람들은 쌍바위라고 불렀다.

그리고 쌍바위는 아이들한테는 아주 중요한 놀이터가 돼주었고

마을 어른들에게도 농사철이 시작될무렵 아주 요긴한 철렵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농사철에는 마을 사람들이 들농사를 마치고 쌍바위 밑에서 

시원하게 멱을 감는 장소로도 아주 요긴한 장소였다.


겨우내 얼어 붙었던 땅도 녹아내리고 지천으로 달래,냉이,씀바귀,

가시내들이 논두렁에 앉자 나물을 뜯을때면 아이들도 어항을 들고

쌍바위 밑으로 모여들었다.

우선 쌍바위 밑에서 가재를 잡아야 하는데 가재를 잡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개구리를 잡아 개구리 뒷다리를 끈으로 묶은후 쌍바위 가재 굴속에 놓아두고 기다리면 

가재란놈이 가재 굴속에 있다가 개구리 뒷다리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개구리 뒷다리를 묶은 막대기를 들어올리면

가재란놈을 아주 손쉽게 잡을수있었다.

의외로 이렇게 가재를 잡는 방법이 재미가 있었다.

아이들은 가재굴에서 가재가 개구리 뒷다리에 달라붙어 끌려올때마다

가재가 도망갈까봐 조마조마하지만 가재는 여지없이 끌려나오고 말았다.
 
한쪽에서는 큰 넓적돌을 주워다가 아궁이를 만들고 삭다지를 줏어다가

불을 붙이는데 우선 검불에다 성냥불을 그어대지만 바람도 불고 딱성냥이 질도 떨어져

딱성냥으로 검불에 불을 붙이기도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하여튼 검불에 불이붙고 연기가 피어오르면 검불위에 삭다지를 하나씩 올려놓으면

금새 불이 활활 타오르고 양은 솥단지물이 끓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그러면 아이들중 한명이 논두렁위로 올라가 마늘밭에서 실한놈으로

마늘 서너뿌리를 뽑아오고 양념을 솥단지 안에 넣고 쌀도넣고

잡은 가재도 넣고 징거미도 넣고 어항으로 잡은 피래미 모래무지도 넣고

마지막으로 바늘밭에서 뽑아온 마늘 서너 뿌리를 손으로 뚝뚝 잘라넣고

삭다지를 불아궁이에 한번더 끊여 주면은 언제나 자주 맛볼수없는 특별식이 되는데

아이들은 땀을 뻘뻘흘리며 맛있게도 먹었다.

특별식 가재탕 어죽을 맛있게 먹은 아이들은 또다른 놀이감을 찿아야 하는데

쌍바위 냇가옆에는 지천으로 버드나무가 물이올라 푸른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다가 호드기를 만들어 부는데

호드기를 길게 만들어 불면 소리가 굵은 소리가 배어나왔고

호드기를 작게해서 불면 호드기 소리가 아기우는 소리처럼 맑고 청아하게 들리는데

아이들이 다함께 호드기를 삐하고 불때면 뱀골 쌍바위 수름지에선 

뻐국이가 뻐국뻐국 맑고 청아한 소리로 울어댔다. 

 

닥밭골은 내가 살고있는 동네에서 조그만 개울 옆으로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닥밭골앞 개울 징검다리 건너 골짜기 샛길을 올라가면 드넓은 보리밭이 있는 골짜기가

우리 할머니가 매일 보리밭을 매러다니는 닥밭골이다.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한후부터 닥밭골에 심부름을 다녀야했는데

심부름은 우리 어머니가 노란 양재기에 보리밥에 된장,고추를 한보따리 밥부재에 싸주면

나는 가기싫은 어머니 심부름이지만 어쩔수없이 어머니가 챙겨주는 밥부재통을 들고 

뜨거운 태양볕에 삐질삐질 산길을올라 닥밭골에서 보리밭을 매는 

할머니 점심을 가져다 드려야했다.

 

내가 산길을 오르다 닥밭골로 들어서는 개울 징검다리를 건널때는

개울 맑은 물속에 새끼를밴 가재가 엉금엉금 기어다니는게 보였었다.
나는 밥부재 보따리를 내려놓고 한참 가재를 잡다보면 시간가는줄 모르다가

보리밭을 매고있을 할머니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골짜기를 오르다보면

바로 닥밭골아래 논가생이 오동나무에서 매미가 찌름찌름 깨롱깨롱 우는데

내가 한번 돌멩이를 던지면 매미는 잠시 울음을 멈췄다 다시 귀청따갑게 울어댔다.

어린손자가 보리밥통 보자기를 들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보리밭에 들어서면

우리 할머니는 밭을 매시다가 감나무 그늘밑으로 나오신다.
할머니는 보리밭 가생이 옹달샘에서 시원하게 땀을 씻어내시고

찬물 한바가지를 퍼가지고 오셔서 찬물에 보리밥을 말아 고추에 된장을 찍어 

달게도 잡수신다. 

나는 할머니가 보리밥을 달게 잡수실동안 골짜기 옹달샘에서 가재를 잡는데

가재는 조그만 굴속으로 들어가서 약만올릴뿐 호락호락 잡히지 않는다.

우리 할머니는 닥밭골 천평 보리밭을 매려고 매일 닥밭골에서 살다시피 하는데

해가 기울고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래도 그시절은 일년 양식이 풍족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땅이 부족하고 식구수가 많은집은 응당 해마다 먹고살 양식이 부족하여
때이른 봄에 양식이 떨어지면 장릿빚을 내서 먹고살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우리집은 닥밭골 천평에서 나오는 보리쌀이 풍족했기에

양식이 떨어질일은 없었다.

그시절은 보리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보리농사를 지어야 

일년 먹을 양식을 보충할수있었는데 보리밭 김을 매는일이 큰일이었다.

 

그시절은 눈만뜨면 처녀든 아낙네든 할머니든 하여튼 여자들은 

보리밭을 매느라 눈코뜰새가 없었다.

우리 할머니가 햇볕 따가운 보리밭에서 땀을 뻘뻘흘리며

청보리밭을 맬때면 뒤산에서는 뻐꾹이가 온종일 뻐국뻐국 

맑고 청아한 소리로 울어댔고 논가생이 오동나무에서는 매미가 

귀청따갑게 하루종일 울어댔다. 

 

바람구멍 차가비에는 우리 외갓집 논 천평이있다.

논옆으로 실개천이 흘러가고 실개천 산길을 한참따라 올라가면 

몇백년은 묵었을 느티나무가 서있고 느티나무 아래에는 

시원한 산들바람에 나뭇꾼들이 땀을 씻어내며 쉬고있다.

 

모내기철이 되면 우리 외삼춘은 소달구지 구르마를 끌고 내려와 

바람구멍 차가비 천평 논에 챙기질을 한다.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리고 보또랑에 물이 흐르면 논에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하고 모내기 준비를 한다.

 

모내기를 할때는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품앗이로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온동네 모두다 모내기가 끝나야 마을 사람들은 허리라도 펼수있었다.

 

바람구멍 차가비 실개천에는 버들치,중태기,가재,다슬기가 많았다.

동네 사람들은 모내기를 마치고 해넘어갈 시간이면 

논옆 실개천에서 다슬기를 잡곤했는데 해가 넘어가서야 어둔 산길을 올라갔다.

 

바람구멍 차가비 짐바장 덜겅은 애장터다.

애장터 덜겅에는 깨금나무가 많았는데 애장터 주변으로 으름덩쿨에

짜악 벌어진 으름이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산길,애장터를 지나가려면 머리 끝이 쭈뼛서고

소름이 오싹 솟는것이 금방이라도 아기 울음소리가 내발걸음을 뒤쫒아 오는듯 했다.

 

바람구멍 차가비에서가까운 골짜기 가래울에도 애장터가 있었는데

애장터 주변에는 왜 그렇게 깨금나무가 많은지 모를일이었다.

옛날에는 마을에 아기를밴 임산부가 많았는데

아기가 태어나서 얼마있다가 죽는경우도 종종있었고

토사곽난으로 대여섯살 아이들도 죽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러면 어린사체를 거둬 애장터 덜겅속에 묻었다.

 

비가 내리는날 애장터를 지나가기란 여간 무서운게 아니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날 어머니 심부름으로 가래울 골짜기 애장터를 

올라가는 발걸음은 으시시 무섭고 떨렸다.

애장터 깨금나무 위로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산짐승이라도 퍼득 뛰쳐오르면

나는 가래울 애장터에서 혼비백산 놀라 걸음아 날살려라 산길을 뛰었다.

 

내가 어린시절,그러니까 내가아마 코흘리게 시절이었나보다.

나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동네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우리 작은 아버지댁

외딴집으로 쇠스랑을 가지러 마을을 벗어나 새마을 사업으로 

새로 확장한 왜둑길을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둑 신작로에서 산판 발매 나무를 싣어나르는 제무시 트럭 도락구가

길바닥 흙구덩이에 빠져,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고있었다.

도락구 제무시 운전기사는 심부름을 가고있던 나를보더니 목이말랐던지

아주 너 잘만났다는 반가운 표정으로 콜라병을 주면서 물한병만 떠다달라고 

부탁을 하는것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운전기사가 건네준 콜라병을 받아들고 오던길 되돌아가 

집에가서 우물물을 콜라병에 담아 제무시 트럭 운전기사에게 갖다줬는데

나는 집과 트럭을 오고가면서 그만 어머니 심부름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쨋든 나는 어머니 심부름을 까맣게 잊고 도락구 제무시 트럭 옆에서 

운전기사가 어떻게 움푹파인 흙 웅덩이에서 빠져나올까만 집중되었다.

제무시 트럭 운전기사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타이어 밑에다가 자갈도 갖다붇고 

다떨어진 가마니도 갖다 쑤셔넣는 광경이 어린 나이로봤을때 뭐가그리 신기하다고

골똘히 구경하다가 해는 기울었다.

 

해는 기울고 어둑어둑해지는 왜둑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째 돌아가면서도 무언가 이상하고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차 어머니 심부름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이거 큰일났구나

겁이 덜컹 오지게나는 것이었다.  

나는 집으로 걸어가면서도 어머니에게 혼줄이날 생각에

앞이 캄캄한것이 오금이 저려왔었었다. 

 

누구나 어린시절 주사맞던 기억은 무서웠을것이다.

나도 예방주사 맞던날의 어린시절 기억을 해보자면 학기마다 늦은봄

콜레라 장티푸스 예방접종 주사를 맞곤했는데 나는 정말 예방주사 맞기가

정말 싫었었다.

그리고난 유독 주사맞는것에 민감했는데 하여튼 어느 늦은봄 우리 학교에 

힌가운을 입은 보건소 간호사들이 예방접종을 하기위해 왔는데 

나를포함 학급생중 몇명이 학교앞 준식이네 집으로 도망을 쳤다.

 

어쨌든 우리는 학교앞 준식이네 집으로 도망을쳤기에 예방주사는 피할수있었지만

예방주사보다 더가혹한 시련에 시달려야했으니 예방주사 맞던날의

나의 기억은 아주 처참한 기억으로 내머리속에 남아있다.

 

우리는 예방접종이 끝나고 교실안으로 들어갔더니 

선생님 화가 머리끝까지나있었는데 방과후 교무실로 오라는것이었다. 

방과후 예방접종을 피해 달아났던 우리들이 교무실에 들어서니

담임선생님 우리를 보자마자 잡아끌듯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선생님은 교무실 입구 시멘트 바닥에 우리를 무릎 꿇리더니 

우리들 조그만 낮짝에 선생님 두꺼비 같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싸대기를 올렸다.

나는 내낮짝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겠고 내 낯짝이 얼얼하고

정신이 혼비백산 달아나버렸다.

선생님은 시간을 질질 끌며 화풀이를 하는데

우리는 쥐죽은듯 선생님 훈계를 들었다.


선생님은 한동안 화가풀릴때까지 닥달을 하고나서야 우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내일 부터 한달동안 교무실에 와서 반성문을 쓰라고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방과후 교무실 바닥에 꿇어앉자

한달동안 꼬박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예방접종 주사를 맞지않고 도망친 댓가를 치렀다.

 

형목이는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 같이 다니던 친구지만 국민학교를 
아홉살에 들어가서 나보다 한살 많은 국민학교 동창이다. 
형목이네 엄마는 형목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우리 동네 삼거리에서 
막걸리 주막집을 하면서 어린 자식들을 키우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형목이는 국민학교 동창인 나를 볼때마다 나를 자기집 뒷곁으로 
오라고 하고선 찌그러진 양은 노란 주전자에 막걸리 반주전자를 부엌 안쪽 
땅속에 막걸리가 시원하라고 묻어 놓은 장독에서 퍼놓고 대신 우물물,맹물 
한바가지를 술독에다가 쏟아 부어놓고 완전 범죄다 확신을 하는양 
힌이빨을 드러내며 한번 씨익 웃고 막걸리가든 주전자를 들고 짠지 한접시 하고 
주섬주섬 뒷곁으로 들고 왔다. 

이런날은 분명 형목이 엄마는 볼일보러 밖에 나가고 집에 없다는것을 
나는 짐작으로 눈치 채고 형복이가 사기그릇에 따라 주는 달콤한 막걸리 맛에 취해 
시간 가는줄 모르고 마시고 있으면 농사철이 아닌이상 막걸리 받으러 오는 사람도 드물고 
형목이네 앵두나무가 있는 뒷곁은 아방궁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나와 형목이는 죽이 잘맞아던지 같이 붙어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형목이네는 논골 방죽 위에 뙤알밭이 있었고 뙤알밭 뚝방에 커다란 밤나무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동네는 집집마다 감나무는 많았지만 밭에 밤나무가 있는집은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밤한톨 맛이라도 보려면 산밤을 따러 산으로 
올라가야 했던 시절이다. 
형목이는 항상 자기밭 뙤알밭 뚝방에 커다란 밤나무가 있다는걸 
자랑스러워 했고 언제나 가을철 밤이 벌어져 떨어질때면 누가 알밤을 주워갈까봐 
학교만 갔다오면 책보따리를 마루에다 집어 내팽개치고 지개를 지고 
뙤알밭 밤나무 밑으로 가서 밤나무를 지키며 어깨에다 잔뜩 힘을 주고 
자기가 벌써 어른이라도 된양 으시대면서 그때만 해도 비싸서 아버지들도 
피우지 못하는 아리랑 담배 궐련 한개피를 뽑아 물고 성냥 불에 불을 그어 
담배 연기 한모금 그럴싸하게 내뿜는데 형목이는 같은 또래들 보다 덩치가 커서 
그런가는 몰라도 나는 마치 형목이가 어른 같이 느껴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형목이는 국민학교를 졸업 하고 객지 밥을 먹으며 도회지를 떠돌았다. 
철공소에 다닌다고도 했고 주물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어쩐일인지 내가 군대 제대후 집에 와보니 형목이는 고향집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형목이는 사람이 많이 변해 있었다. 

형목이는 한때 주물공장을 다니며 착실히 일해서 목돈도 만져봤다고 
하는데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정신적 충격 때문에 도회지 이곳저곳 
떠돌다가가 벌어논 돈도 다까먹고 할수없이 고향집으로 돌아왔노라고 말했다. 
형목이는 항상 고향집에 돌아와 술에 취해 살았다. 
땅떼기라도 일궈야 먹고 사는데 형목이는 뭐라도 하려는 의욕을 잃고 
방황속에서 술만 마셔대는 날이 많아 보였다. 
그후 나는 고향집을 떠나 되회지로 취직을 해서 나왔는데 몇년이 흐른후 
형목이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죽었다는 형목이를 떠올리면서 그옛날 뙤알밭 밤나무 밑에서 의기양양 
호기를 부리며 궐련 연기를 멋지게 내뿜던 형목이를 그리워 하였다. 
 

내가 여섯살때이던가 우리 작은 아버지는 도회지 사는 여자를 옷보따리 
장사를 하는 할머니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한듯 싶다. 
우리 작은 아버지는 그당시 시골 고향땅에서 나고 자라서 고향땅을 떠나본적 없는 
순박한 시골 농촌 총각이었다. 
우리 작은 아버지는 그냥 시골에서 일만 죽도록 할줄아는 그야말로 무지랭이 
배움없는 일자 무식 농사꾼이었다. 
국민학교도 입학은 했지만 4학년을 다니고 배움에 뜻이 없어 그만 뒀다한다. 
우리 작은 아버지가 결혼 하는데는 결정적으로 우리 동네로 머리에 이고 다니는 
옷보따리 장사 할머니가 도회지 여자를 우리 작은 아버지 일잘하고 성실한 
성품을 보고 중매를 해줬기 때문에 맞선을 보고 장가를 갈수있었다. 

우리 작은 아버지 결혼식날 풍경은 진풍경이었다. 
그때만 해도 결혼식은 시골 사람들 대부분 시골집 마당에서 구식으로 전통 혼례를 치르고 
잔치 국수 한그릇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으며 막걸리 한잔 하는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우리 작은 아버지는 도회지 여성 회관이란 곳에서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택시를 대절해 
시골로 들어오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시골길도 좁고 길이 질퍽해 트럭도 발매 산판에서 나무를 싣고 나오다가 
질퍽한 길바닥에 처박혀 한동안 빠져나오려고 씨름을 하던 때였다. 

우리 작은 아버지가 결혼식이 끝나고 택시를 타고 들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네 아이들은 모두다 신랑 신부가 타고 들어 오는 택시를 구경 하러 간다고 
뙤를 지어 좁은 오솔길 왜뚝으로 득달같이 달려 나갔다. 
신랑 신부를 태운 초록색 택시가 들어 오는데 동네 아이들이 택시 꽁무니를 따라 
졸졸졸 따라 다니는 모습이 그옛날에나 볼수 있는 진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우리 작은 아버지 결혼식날 밤풍경은 뻑쩍지근 했다. 
동네 사람들이 막걸리에 취해 흥청망청 옛날 흘러간 노래를 부르고 진탕 놀아 제끼는데 
우리집 안방에서는 장구를 치며 덩실덩실 동네 노인들이 힌적삼 치마 저고리를 입고 
한바탕 장구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고 
마당에서는 깔아논 멍석위에 앉자 동네 아저씨들이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떠들썩 흘러간 구성진 노래를 박수를 치며 막걸리에 취해 신나게 불러 제끼고 있었고 
우리집 사랑방에선 멀리서 결혼을 축하해 주러온 축하객들이 모여 
막걸리를 돌리며 한바탕 질펀하기 놀고 있었다. 
별도로 옆집에서도 동네 총각들이 모여 질펀하게 눌러 앉자 술판을 벌이고 있었고 
마을 아낙들도 쌍둥이네 집에 모여 앉자 희희나낙 막걸리 술잔께나 주고받았다. 

결혼식날이 지나고 우리 작은 아버지는 제곱나기 전까지는 한동안 우리집 
사랑방에서 살다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솔정지 아래 외딴집을 사서 이사를 갔다. 
우리 작은 아버지가 이사를간 외딴집 앞에는 아름드리 미루 나무가 
밭뚝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고 미루나무 아래로 군데 군데 빠알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나무가 밭가생이로 군데군데 서있었다. 
그리고 집앞에는 상추밭이 있었고 그리고 상추 밭옆으로 우물물이 있었는데 
우물물 옆으로 싱그런 청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게 보였다. 
우리는 종종 어린 나이에 작은 아버지 인삼밭 일손을 도우러 외딴집 
우리 작은아버지 집에 갔었는데 우리 작은 아버지 일을 하면서 
우리가 일을 잘못한다고 소가지를 부리는데 그냥 돌아올수도 없고 
우리 작은 아버지 소가지 부리는것을 묵묵히 듣고 일만하다가 
저녁에나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우리 작은 아버지는 삼형제를 두었는데 시골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라 
고향땅에서 죽도록 일만하다가 어디 도회지를 나가 여행 한번 못해보고 
어린 삼형제를 키우기 위해 불철 주야 일만 하다가 퍽퍽하고 외로운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듯 하여 내가 어린시절 작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듯 하다. 

우리 작은아버지 형제는 남자만 오형제다. 
우리 고모가 있었긴 있었다는데 어릴때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가 장남이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작은 아버지가 둘째, 
세째 작은 아버지는 현재 서울에서 잘살고 계시는데 자식들도 다훌륭하게 
키워 놓고 안정된 삶을 살고 계신다. 
네째 작은 아버지는 한때 자영업을 벌여 큰돈을 벌은적도 있지만 IMF때 
직격탄을 맞고 상황이 안좋은때도 있었지만 현재는 다시 자영업을 하며 잘살고있다. 
마지막 종말이 작은 아버지는 현재 울산 대기업에서 성실히 일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데 얼마전 변호사 사위를 봤고 신수가 훤해진듯 하다. 

그래도 우리 아버지 형제중 그당시 어려운 형편속 오십리길을 하숙비를 
이고 지고 어렵게 도회지에서 공부를 마친 셋째 작은 아버지 자손들은 
지금 자식들도 훌륭히 성장해 결혼도 했지만 그당시 배움이 짧고 시골에서 
농사만 짖고 죽도록 일만하던 우리 둘째 작은 아버지 자손은 어쩐지 오십이 넘어가는 나이에 
아직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것을 봤을때 우리 둘째 작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이 밀려오는것도 사실이다. 

 

방죽 하면 저수지를 이르는 말인것은 확실한데 방죽이란 단어가 
사투리인지 표준말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지금 부터 나의 어린 시절 우리 동네 논골 골짜기에 있던 
방죽에 대한 기억과 내친구 명식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어린 시절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는 왜정 시대 만들어 졌다는 
보기에도 꽤 넓고 깊게 보이는 방죽이 논골 골짜기 아래 있었다. 
방죽에는 항상 물이 가득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농사일 모내기철이 
되면 모를 심느라 방죽의 물을 빼서 방죽 아래에 있는 논에 물을 대면 
방죽은 며칠 사이로 바닥을 보이고 방죽에 살던 참붕어며 우렁을 잡으려고 
동네 사람들이 바닥을 보이는 방죽 안으로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올렸다. 

금방 바닥을 보이던 방죽도 한두차례 소나기가 내리고 장마가 지면 
또다시 금방 방죽에 물이 흘러 들어 예전 처럼 호수를 이루었다. 
이처럼 방죽은 동네 주민들 농사짖는데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물이 가득 담긴 
보물 호수 였다. 

그리고 눈내리는 추운 겨울철엔 넓다란 방죽이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는데 
시골에서 겨울방학이면 할수 있는 일은 겨울 방학 과제도 미뤄놓고 
방죽에서 하루 종일 불을 피워놓고 썰매를 타며 보내는것이 재미중 으뜸이었다. 

산아래 방죽 밑에 살던 내친구 명식이는 친구들이 붙여준 별병이 방죽 주인이었다. 
하여튼 명식이는 눈만 뜨면 아침 부터 저녁 까지 방죽에서 붙어 살았다. 
방죽 뚝방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삭다지를 한다발 주워다가 
불을 피워 연기가 나지 않는 알불을 만들어 놓고 알불속에 고구마를 묻어 
뒀다가 썰매를 실컷 싫증 날때까지 얼음 위를 지치다가 한나절쯤 출출 해지면 
뚝방 한쪽 고구마를 묻어둔 모닥불 옆으로 와서 고구마로 점심 한끼 때우고 
있으면 방죽 아래 명식이네 명과나무로 만든 사립문 앞에서 명식이 엄마가 
명식이 점심 먹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명식이는 썰매 타는 재미에 푹빠져 
안먹는다고 방죽 아래를 향해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명식이 엄마 화가 났는지 이호랭이 깨물어 갈놈이 밥도 안쳐먹고 
노는데 정신 팔렸다고 고래 고래 소래기를 친다. 
명식이 자기 엄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쓴다는듯 피식피식 웃는다. 

그런데 명식이는 손재주가 좋아 썰매도 잘만들고 팽이도 소나무 죽은 등치를 
잘라다가 잘깎는데 명식이는 어쨌든 학교 가는걸 무지 싫어 했지만 
집에서 썰매를 만들고 팽이를 깎는 솜씨는 탁월 했다. 

명식이와 나는 나이는 같지만 홍식이가 열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학교로는 내가 2년 선배지만 우리는 같은 동네 같은 윗말에 살았기 때문에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 였고 같이 모종산에 올라가 소나무도 베어다가 
썰매도 만들고 팽이도 만드는데 정작 나는 손재주가 없어 명식이를 
따라다니며 보조만 잘하면 나중에 나에게도 별도로 하나 만들어 줬다. 

명식이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중학교 가는걸 그만 뒀다. 
내가 보기에도 명식이는 뭘 만드는 재주는 타고난듯 잘만들었지만 
공부를 하는데는 도통 흥미가 없어 보였고 결석도 심심치 않게 했던듯 한데 
그이유는 자기 집에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학교를 땡땡이 치는데, 
그리고 명식이는 학교에 가다가도 중간에 냇가에서 놀다가 학교는 안가고 
친구들이 집에 돌아가는 시간에 맞춰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갈때도 
가끔 있었는데 이것을 그당시 학생들은 중간 치기라고 불렀다. 

아무튼 그래도 명식이는 국민 학교를 무사히 졸업 하고 철공소에 취직이 돼서 
도회지로 나갔다가 삼일만에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후 명식이는 도회지로 나가 취직 하는것을 포기 했는지 도통 도회지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냥 시골 고향 땅에서 조그만 땅떼기를 붙여 먹으며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
 

정월 대보름 전날 밤이면 둥그런 보름달이 모종산 위에 둥실 떠있고 
동네 막걸리집 삼거리엔 아침부터 한잔 걸치고 흥청 망청 취한 동네 남정네들이 
어둠이 내리는 저녁 아직도 흥에 겨워 괭과리,장구,징,북을 두드리며 어깨춤을 들썩이고 
발걸음을 사뿐사뿐 내려 앉듯 빙글빙글 돌아가며 흥에 취해 있다. 
사물놀이 풍물패 주위로는 동네 사람들이 구경 하느라 빙둘러서서 동원네 아버지 
이상스런 몸동작을 하며 북을 쳐대는 묘한 풍경에 한바탕 너털 웃음을 쏟아낸다. 

우리 동네는 예전 부터 각종 마을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물놀이 풍물패가 
고정적으로 있어 동네 분위기를 한껏 끌어 올리곤 했다. 
그리고 특히 정월 대보름 전날 밤이면 사물놀이 풍물패들이 해야 할일이 
반드시 있었는데 그것은 사물놀이 꽹과리,북을 신명나게 두드리며 
마을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소금을 받아다가 밤늦은 시간 
수리산 오소리 바위밑에 묻어둔 장독에다가 소금을 묻고 와야 했다. 

그이유는 이렇했다. 
내가 어린시절은 거의 한두집 빼고는 마을 전체가 초가 지붕이었는데 
그리고 종종 불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불이나면 온동네 사람들이 집에서 쓰는 
양동이며 바께스를 들고 나와 한바탕 불을 끄느라 북새통 난리난리 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을이 초가집으로 오밀 조밀 모여 있기때문에 
불이 종종 일어난듯 싶다. 

내가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 오는 
전설이 있었는데 할머니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은 이랬다. 
옛날 부터 우리 동네는 불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이유는 초가집 이었기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른 동네 보다 
불이 자주 난듯 보인다. 
그런데 아주 오랜 옛날 어느날 스님 한분이 우리동네를 지나가다가 
우리 동네 풍수를 보고 혹시 불이 많이 나지 않느냐고 묻더란다. 
스님 말씀을 듣고 있던 마을 정자나무 아래서 노인 한분이 불이 나는 
막을 방책을 말해 달라고 말을 했더니 그스님 방책을 말씀 하시길 
정월 대보름 전날밤 악귀를 쫓기위해 사물놀이 괭과리,장구,징,북을치며 
동네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소금을 받아다가 수리산밑 구덩이에 묻으면 
불이 나는걸 방지 할수 있다고 말하더란다. 
그런데 단 아기 낳은지 얼마 안된집,병자가 있는 집은 안되고 
집이 화목하고 무탈한 집에서만 소금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우리 동네는 스님 말씀대로 그다음해 부터 정월 대보름 전날밤이면 
어김없이 사물 놀이 풍물 꽹과리를 치며 동네 집집 마다 돌아 다니며 
소금을 받아다가 수리산밑 오소리 바위밑 구덩이에 소금을 묻고 오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정월 대보름 전날 밤이면 온동네가 시끌시끌 
떠들썩 했는데 아침부터 풍물패가 동네 삼거리 막걸리집 앞에서 
풍물을 두드리며 흥을 돋구면 동네 사람들이 삼거리 막걸리집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 들었고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 속으로 빠져 들었다. 
정월 대보름 한달 전부터 정월 대보름 전날 사용하게될 경비를 십시일반 
조금씩 집집마다 추렴을 했는데 사물놀이 풍물패와 동네 사람들이 마시게될 
소주 댓병도 필요했고 돼지 한마리도 잡아 수육을 만들어 안주로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마을은 하루 종일 소주 댓병을 나눠마신 사람들 취기로 흥청됐다. 
그때 그시절만 해도 소주 댓병을 사서 마음 놓고 마실수 있는 
시절이 아니 었기에 이날 정월 대보름 전날 만큼은 소주 댓병도 
넉넉히 준비해 스텡 그릇에 따라 돌려 마시는데 너도 나도 술에 취한 
동네 사람들로 온동네가 소주 냄새로 진동을 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은 산아래 홍식이네 집에 모여 있다가 
모종산 아래 빈공터에서 아버지가 산에서 나무를 해온 소나무 삭다지를 
줏어다가 불깡통을 돌리면 도깨비 불마냥 둥글게 원을 그리며 
불이 타오르는 모습에 아이들은 코가 새까맣게 탄줄도 모르고 
밤이 깊어 가는줄도 모르고 불깡통을 돌리곤 했다. 
 

성권이는 내 국민학교 동창이지만 국민학교에 아홉살에 입학했기 때문에 
아마 나보다 한살 위일거라고 짐작이 간다. 
그시절만 해도 특히 여자들은 아홉살에 국민학교에 입학 하는것이 
다반사 였고 남자들도 한학급에서 서너명은 아홉살에 입학을 했다. 

성권이는 몸집이 유달리 큰컷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키도 큰편이고 
몸도 날렵한 편이었다. 
성권이는 학교에서 싸움 실력이 5위권은 된듯하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때 학교 전체에서 싸움 서열 순위를 말하는거다. 

싸움 서열 1위는 우리 동네 사는 나보다 한살 많은 기열이가 서열 1위 
싸움짱 이었고 그런데 기열이는 다른 학생들 보다 체구가 좋았고 
키도 월등히 컸다.그러니 당연히 서열 1위는 누가 봐도 기열이 였던것이다. 

서열 2위는 면사무소가 있는 읍내에 살고 있는 영길이였다. 
아마 영길이도 체구는 호리호리 하고 큰편은 아니었으나 나이는 
같은반 친구 보다 한살 많았던듯 싶다. 

서열 3위는 찬식이라고 역시 나이가 우리 보다 한살 많았는데 
얼굴이 거므티틱 한것이 장단지가 불끈 솟은것이 힘좀쓰게 보였었다. 
그러나 찬식이는 천성이 착해 보였고 힘세다고 같은반 아이를 괴롭히지 않았다. 

서열 4위는 재출이라고 우리 동네 건너편 마을에 사는 같은반 친구인데 
두뇌가 명석 해서 그런지 공부도 반에서 선두권을 달렸다. 
재출이와 나하고는 가끔 하교길에 코스모스 산들거리는 신작로를 따라 
함께 집으로 돌아 가곤 했다. 

문제는 서열 5위 성권이 였다. 
사실 성권이는 국민학교 6학년 올라오기 전까지는 사실 무명 이었다. 
싸움 서열 5위권이 확실한것이 아니었고 그냥 보통 일반적인 학생이었다. 
그런데 내가 6학년이 되고 얼마안된 따뜻한 봄날이었다. 
점심 시간에 김치,단무지 반찬에 점심 식사후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고 운동장 쪽으로 걸어 가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서 누가봐도 싸움 서열 1위 기열이 하고 그냥 무명에 불과한 성권이가 
싸움이 붙었는데 꼭 싸우는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장닭 두마리가 
싸우는 모습과 비슷할까,서로 한발자국씩 물러 났다가 서로가 발차기를 
하며 붙었다 떨어졌다 주먹으로 허공을 가르는데 내가 봐도 덩치큰 기열이 하고 
몸집이 날렵하고 왜소한 성권이가 싸우는 모습은 서로 한치도 물러섬 없는 
비등비등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싸움은 물러섬 없이 치열 했다. 
두사람의 붉게 물든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렸다. 
두사람의 싸움은 누가 지고 이기고 승부를 가르지 못하고 점심 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업 시작 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끝이났다. 
두사람은 수업 종소리를 듣고 비오듯 쏟아지는 얼굴에 땀을 옷소매로 
훔쳐내며 식식거리며 수업을 받기위해 교실로 들어갔다. 

그후 성권이는 국민학교 내에서 명실상부 싸움 실력을 인정 받았고 
당당하게 서열 5위권을 확실하게 보장 받은듯 싶다. 
그런데 성권이는 서열 1위에게는 맞짱을 떠서 싸움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서열 3위 찬식이에게는 감히 맞짱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세월이 몇년 흐른후 성권이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려 자살 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예전 그시절 만해도 그렇고 지금 현시대에도 비일비재 일어 나는 일이지만 
남녀 학생간 불미스러운 안좋은 일들이 간혹 일어 나곤 했다. 
소문으로는 도시에서 시골로 놀러온 여성을 어떻게 했다는 소문이었고 
자책과 괴로움을 못이겨 스스로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고 
내친구 상천이가 말해 주는데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옛날 국민학교 운동장 한쪽 공터에서 서열1위 기열이와 맞짱을 뜨며 
호기를 부리던 성권이가 떠올랐다. 

 

옛날에 내가 여덜살때쯤 국민 학교 다니던 시절은 각부락 마다 엿장수며 
아이스께끼 장수 들이 리어카를 끌고 골목 골목 다니곤 했다. 
그리고 각종 옷보따리 장사며 생선 장사며 잡다한 장사들이 
이동네 저동네 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러 다니곤 했다. 
그중 제일 많이 우리 동네로 물건을 팔러 들어오던 장사는 단연 엿장사가 
가장 많았는데 그많은 엿장사 중에 특이한 기인 처럼 보이던 엿장사가 있었다. 
그엿장사가 바로 꿈불엿이라는 별병을 가진 엿장사 였는데 그이유는 
엿을 팔러 다니며 북을 치며 신명나게 춤을 추면서 꿈불엿을 외쳐댔기에 
동네 아이들이 꿈불 엿장사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기에 꿈불 엿장사가 된것이다. 

우리 동네도 마늘 수확철 이라던지 인삼 수확철이 되면 엿장사들이 
리어카를 끌고 읍내에서 십리가 넘는 길을 분주히 드나 들었다. 

어느날 이었다. 
꿈불엿 엿장사가 우리 동네에 와서 우리집앞 골목길 감나무 아래 
엿판과 껌,당원,소다등이 담긴 리어카를 놔두고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엿판 물건등이 담긴 리어카 옆에 있던 나와 홍식이는 5원짜리 
당원 한곽씩을 슬쩍 훔쳐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와 두근 거리는 가슴을 안고 안방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홍식이는 당원 한곽으로는 양이 안찼던지 다시 꿈불 엿장사 리어카로 
다시 가서 또다시 당원 한곽을 슬쩍 훔치다가 대철네 집에서 리어카 엿판으로 
돌아 오던 꿈불 엿장사에게 들키고 말았다. 
홍식이는 재빨리 꿈불 엿장사를 피해 골목 골목을 돌아 산아래 있는 
자기 집으로 도망을 쳤는데 평소 홍식이네 집을 알고 있던 꿈불 엿장사는 
홍식이를 잡으러 산아래 홍식이네 집으로 올라 가는게 보였다, 

나는 겁에 질려 안방에서 숨죽여 바같 동정을 살피는데 우리 할머니도 뭔가 
눈치를 채셨는지 훔친걸 내놓으란다. 
나는 당원 한곽을 할머니에게 건네 주고 안방에서 숨을 죽이며 
밖을 내다보니 홍식이가 꿈불 엿장사에게 집에서 끌려 나오는지 
홍식이 우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꿈불 엿장사 목소리도 왁자지껄 크게 
들리는걸로 봐서 아마 크게 사단이 난모양 이었다. 

잠시후 어째 밖이 잠잠 해지는가 싶더니 할머니가 내가 훔친 당원 한곽을 
꿈불 엿장사에게 돌려 주고 안방으로 들어와 아무 말없이 어린 손자를 보고 
빙그레 웃고 말뿐이었다. 
나는 그후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그때 하도 
겁을 많이 집어 먹었기에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대는 일이 없었다. 

꿈불 엿장사는 전설의 꿈불 엿장사 였다. 
엿장사 중에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 였는데 그이유는 엿판 리어커를 끌고 
다니며 북을 어깨에 걸쳐 메고 신명 나게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며 
꿈불엿을 외쳐 대는데 긴장발 머리에 덩치가 크고 생김새도 아주 소도둑놈 생김새라 
신명 나게 북을 두드리며 온동네 골목길을 휘졌고 다니는 모습이 기인처럼 보였고 
그리고 엿장수 가위로 엿을 띠어 낼때도 꿈불엿을 외치며 
기인 처럼 허공을 가르는 춤사위는 어린 아이들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꿈불 엿장사는 동네 아이들에게 단연 인기가 많았다. 
재미난 만화책도 많이 가지고 다녔는데 마늘 반접은 갖다줘야 만화책 한권을 줬다. 
그리고 꿈불 엿장사는 다른 엿장사에 비해 엿을 줄때 액션이 크고 많이 줬는데 
그래서 더욱더 인기가 많았던듯 하다. 

그리고 꿈불 엿장사에게는 괴소문이 따라 다녔다. 
간첩이라느니 북속에 권총이 들어 있다느니 해괴한 소문도 많았지만 
어쨌든 꿈불 엿장사가 우리 동네에 오는 날이면 온동네가 북소리로 한바탕 
떠들썩 했고 동네 아줌마들도 꿈불 엿장사 신명난 북소리와 춤사위에 
한바탕 너털 웃음을 웃곤 했다. 

그런데 어느때 부터인가 꿈불 엿장사는 우리 동네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꿈불 엿장사가 북을 치며 춤을 추는 북속에서 권총이 발견되어 
간첩이라고 경찰서에 끌려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후 진고개 라는 엿장사가 나타나 지게에 엿판을 지고 다니는것이 보였다. 
 

창숙이는 내가 살고 있는 부락 옆동네 신작로옆 외딴집에 살고 있던 
내 국민학교 동창이다. 
아마 창숙이 한테 지금 국민학교 동창중에 내이름을 알려주고 
이런 사람이 국민학교 동창이라고 하는데 창숙이 너는 알고 있냐고 
누가 대신 물어 본다면 창숙이는 백발 백중 나를 모른다고 대답할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나를 모른다고 대답할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 그렇게 다른 학생들 눈에 띠는 아이가 아니었다는걸 
내스스로가 너무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평범한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을뿐 
나를 기억해주리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지금도 창숙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창숙이는 동그란 얼굴에 커다란 두눈과 양갈래로 머리 
겁많고 수줍음 많은 예쁜 소녀 모습이었다. 
나와 창숙이가 국민학교 1학년때 부터 6학년때 까지 같은반이된 
햇수는 몇번 아니었던것 같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창숙이를 본기억이 사실 별로 없지만 
지금도 창숙이 얼굴이 또렷이 기억 나는 이유는 
어느해 가을 운동회날 기억 때문에 더욱더 창숙이 얼굴을 또렷이 
기억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시절 시골 국민 학교 운동회 때만해도 일년 학교 행사중 
가장큰 행사가 가을 운동회 였다. 
운동회날이 되면 온동네 사람들이 국민학교에 모여 어린 자녀들 
재롱 잔치를 보기위해 곡식이 알알이 풍성하게 영글어 가는 계절에 
너나 없이 바쁜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자녀들 먹일 음식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고갯길을 넘어 읍내 학교로 모여 들었다. 

사람들은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 운동장 주변에 싸온 음식 보따리를 풀고 
귀여운 자녀들의 율동과 달리기 재롱 잔치를 구경하며 점심 시간을 기다렸다. 
6학년 여자 아이들은 장롱속에 묻혀 있던 엄마 한복 곱게 꺼내 입고 
부채 춤을 사뿐사뿐 추면서 고된 농사일에 지친 부모님 피로를 
덜어주었다. 
아버지들은 임시 천막 돼지 국밥집에서 막걸리 한사발 털털 하게 마시고 
흥에 겨워 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하였다. 

부락 동네 별로 학교 운동장 한쪽 구석에 자리를 깔고 한보따리 
싸온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자녀들 재롱 잔치에 웃음꽃을 피우던 가을 운동회, 
동네 처녀들도 오랜만에 일손을 멈추고 곱게 분을 찍어 바르고 
장농속에 곱게 아껴뒀던 원피스를 꺼내 입고 삐쭉 구두도 꺼내 신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운동장 주변을 서성거리면 동네 청년들이 암내난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시골 아가씨 궁뎅이를 졸졸 따라 다니는 풍경이 
국민학교 운동회날 벌어지는 진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부락별 청년들 단체 경주도 끝나면 어느덧 땅거미가 엉금엉금 
어두워 질때 사람들은 국민학교 임시천막 막걸리 대포집에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각자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길을 떠났다. 

운동회도 끝나고 날은 저물어 사람들은 빈보따리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데 복수개 고갯길에서 창숙이 엄마는 임시천막 
돼지 국밥집에서 마신 막걸리에 취해 
복수개 고갯길을 못올라 가고 있었고 
창숙이는 눈물을 흘리며 술취한 엄마를 부축하고 있었다. 

나는 십리길을 걸어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으면서 
아직도 복수개 고갯길에서 울고 있을 창숙이를 생각했다. 

운동회 다음날은 학교에 가지 않는 공휴일이었다. 
공휴일날에는 시골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집안 농사일을 거든다. 
나는 공휴일 내내 집안 농사일을 거들면서 창숙이 엄마와 창숙이를 생각했다. 
공휴일이 끝나고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창숙이는 별탈없이 학교에 나와 있었다. 
나는 동그란 얼굴에 양갈래 머리 토끼 같은 커다란 두눈의 창숙이를 보면서 
창숙아 사랑해! 학교에 별탈없이 나와 줘서 고마워! 마음속으로 간절히 속삭였다. 

지금도 나는 창숙이 토끼같이 수줍어 하는 얼굴이 떠오르고 
창숙이가 살던 신작로 옆 외딴집이 눈물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소년의 기억,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니까 내나이 열세살때 인가 보다. 
내가 살던 농촌 부락에서 내가 다니던 읍내에 있는 국민 학교 까지는 
거리가 약 십리가 넘는 길이었고 키가큰 우리 아버지가 새로난 신작로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해도 한시간은 족히 걸어가야 하는 거리 였는데 
열세살 소년의 걸음으로야 한시간 삼십분은 해찰 하지 않고 걸어가야 
우리 부락 마을에서 십리가 넘는 국민 학교에 갈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농촌 부락에서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를 가려면 
두갈래 길이 있었다. 
그중 한갈래 길을 말해 보자면 우리 부락 마을을 나와서 길옆으로 
논들이 펼쳐진 오솔길을 사이로 걸어 가다가 오르막 오솔길을 오르면 
왼쪽으로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고 오른쪽 으로는 아주 오래된 소나무 사이로 
묘지가 군데 군데 보였었다. 
이야트막한 고개 이름이 솔정지 였는데 솔정지 고개를 넘어 가면 
논과밭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보또랑에서 흘러 들어 오는 물줄기가 
좁은 수로를 따라 졸졸졸 흘러 가는게 보였었다. 
그리고 좁은 수로 뚝방을 따라 가다 보면 넓다란 냇가가 나오는데 
넓다란 시냇물을 보를 막아 보위로 넘실 넘실 시냇물이 흘러가고 
냇물 위로 물고기가 파닥파닥 뛰어 오르는게 보였었다. 
맨발 검정 고무신에 넘실대는 보뚝을 걸어서 건너가면 바로 학평 마을 방앗간이 나오고 
요란한 방앗간 발동기 소리를 들으며 지나가면 방앗간 입구에 돼지막이 있는데 
돼지막 안에는 보기에도 엄청 살찐 꺼먹 돼지 두마리가 배때지를 바닥에 늘어뜨리고 
연신 꿀꿀 거리고 있는게 보였었다. 

그리고 방앗간 앞마당에는 종섭이네 방앗간집 숫놈 말이 보이고 
아침 일찍 방아 찧으러 엄마 따라온 동네 아이들이 숫놈 말에서 한발짜국 물러나 앉자 
말을 보고 닭잡아 줄께 좆나와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종섭이네 방앗간을 지나면 신작로가 나오는데 가끔씩 오가는 버스가 지날때 마다 
뿌옇게 먼지가 온사방으로 흩어져 한동안 앞이 잘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신작로 바로 옆에 앞을 못보는 장님이 살고 있는 집이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이 뭣모르는 철부지 장난으로 장님집 앞을 지나치며 
장님집 문, 닥종이로 문종이를 바른 문에다가 돌을 집어 던지면 안에서 
장님 부인이 코먹은 소리로 밖으로 나와 코를 홱 풀면서 사팔진 눈동자로 
아이들을 바라 보며 꼬시랑 꼬시랑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깨에 걸쳐맨 책보따리를 뛰뚱거리며 도망을 간다. 

신작로를 한참 따라 가다보면 빠알갛게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감나무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야산에 공동 묘지가 군데 군데 펼쳐져 있는게 보이고 
신작로 옆으로 작은 보,수로가 흘러가는 사이로 아주 조그만 필용이네 
점빵이 자리 잡고 있다. 
학교를 오고가다 군침을 흘리며 점빵 안을 들여다 보면 진열된 물건이라야 
껌,눈깔사탕,빵,그리고 학용품이 전부 였다. 
그런데 학교를 오고가며 점빵을 바라보며 내가 제일 먹고 싶은것은 
하얀 크림이 잔뜩 발라져 있는 20원 짜리 빵이였다. 

필용이네 점빵을 지나면 신작로 좌우로 미루나무 가로수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쭉쭉 뻗어 있었다. 
그리고 미루나무 아래에는 신작로 좌우로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살랑거렸다. 

어느 가을날 감이 빠알갛게 부락 마을마다 탐스럽게 익어 갈무렵, 
학교가 파하고 우리 부락 홍식이와 함께 가을 하늘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거리는 신작로 미루나무 가로수 앞을 지나 집으로 돌아 갈때 였다. 
미루나무 가로수길 앞에서 하루에 몇대 안다니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양지 소골 청년과 아가씨가 보였다. 
이제 나이가 스물 갓넘은 두사람은 애인 사이로 보였는데 
양지 소골 청년은 고향을 떠나 객지 밥을 먹고 있는듯 보였고 
오랜만에 객지를 떠돌다 만난 애인을 데리고 고향집을 왔다가 
다시 객지로 돌아가는듯 보였다. 

그런데 아가씨는 말소리 억양이 우리와는 아주 딴판이었고 
우리 고장 사람이 아닌것은 확실 하게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영남 사투리로 보아 고향이 대구쪽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그런데 화장 진한 아가씨 모습은 우리가 맨날 우리 부락에서 보던 
꼬질 꼬질한 농촌 아가씨 모습과는 천질 차이로 보였다. 

새파란 아이섀도우 까만 눈동자!빨간 립스틱 입술! 
미니 스커트속 하얀 허벅지,쏟아져 넘칠듯한 풍만한 가슴, 
영남 사투리를 쓰며 그랬어예, 저랬어예, 말을 하며 웃을 때마다 
입가에 보조개가 오물오물 거리는데 열세살 소년의 마음속에는 
잔잔한 파도가 밀려와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말 지금도 또렷이 각인된 난생 처음 진하게 맛아본 향수 냄새는 
열세살 소년의 순정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기에 충분 했다. 
가을 하늘 한들한들 살랑거리는 코스모스길을 걸어가며 집에 올때 까지, 
열세살 소년의 마음속에는 신작로옆 코스모스길 미루나무 가로수길에서 보았던 
영남 아가씨 생각 뿐이었다. 
그후에도 학교를 오고 갈때 미루나무 가로수 앞을 지날때면 으례히 
예전에 보았던 화장 진한 사투리 쓰던 영남 아가씨 모습을 떠올리며 
열세살 소년은 영남 아가씨 누님을 그리워 하곤했다. 
 

예전만해도 면소재지마다 중학교가 있는것이 아니었다.

중학교가 있는 면소재지는 우리 동네에서 걸어서 20리길을 걸어서 다녀야했다.

그시절 우리 동네에서 20리가 떨어진 면소재지에있는 중학교에 다니려면

중학교에 다니는 본인 학생도 새벽밥을 먹고 20리길을 걸어 다녀야하니

힘든거야 당연한거고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 부모님도 학생 뒷바라지를 하느라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 부모님은 우선 새벽에 일어나 중학교에 다니는 자식

새벽밥을 해먹여 보내는것도 힘들지만은 무엇 보다도 힘든것은 중학교 다니는 

학생 월싸금 수업료를 갖다바치느라 부모님 등골이 휘었다.

그때만해도 시골구석에서 돈나올 구석이 많지않았던 시절이었다.

집에서 기르던 소라도 팔고 돼지라도 팔고 논밭에서 나오는 잉여 농산물을

팔아야 돈푼이라도 만져보는데 그래서 항상 시골에선 형편이 쪼들렸다.
그래도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희망을 걸고 열심히 뒷바라지를 한다고 하지만

도시 부모님들 처럼 경제적으로 뒷바라지를 하는게 힘들기 때문에 

더이상 도회지에있는 고등학교에 보낼 엄두를 못내는것이었다. 

도회지로 고등학교를 보내면 하숙비며 월싸금을 감당하기 어려운걸 알고

일찌감치 중학교를 마친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고 시골에서 얼마되지 않은

땅떼기를 부쳐 먹으며 살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국민학교 3학년때이던가 아무튼 우리 면소재지에도 중학교가 들어섰는데

우리 동네에서 불과 5리정도 떨어진곳에 야산 공동묘지를 부리도자로 밀어버리고

언덕위에 빨간벽돌로 지은 번듯한 중학교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그동안 학교가 멀어 중학교에 다니지못하던 나이많은 청년들도 다시 중학교에 다닐수있었고 

국민학교를 마치면 대부분 새로생긴 중학교에 입학을 할수있었다.


학평마을 언덕위에 새로 중학교가 들어선후 학생들이 등하교를 하는 모습은

한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웠다.

그동안 국민학교를 다닐때만해도 남자아이들은 책보따리를 어깨에 걸쳐매고

여자아이들은 책보따리를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학교에 다녔는데

중학교 다니는 형 누나들은 교복에 운동화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녔다.

나는 나폴나폴 걸어가는 중학교 다니는 단발머리 누나들을 볼때마다

누나들 몸에서 향긋한 풀냄새가 나는것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날이었다.

남자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지름길인 음지소골앞을 지나 야트막 산길을 올라

솔밭 묏부리에 들어섰는데 잔디밭에서는 지금 한창 중학교 형들이 

씨름을 하고 있었다. 

심판을 보던 여선생님은 야리야리한 모습이었는데 처음본순간 내가슴은 심하게 떨렸다.

여선생님은 시골 사투리를 쓰지않았고 생글생글 웃는모습하며

학생들에게 서울말을 쓰는지 "그랬니""알았니"우리들과 다른 상량하고 부드럽고 

애교있게 말을 하는데 나는여선생님 얼굴속으로 푸욱 빠져들었다.


그런데 여선생님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후에도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아직 미혼이었다.

그런데 나는 수학이란 과목이 싫었고 오직 국어과목을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예전 솔밭 묏부리에서 처음 보던 설레임은 없었는데

그런데 예전 솔밭 묏부리에서 처음 여선생님을 보고 설레이던 

마음이 왜없어졌는지 나는 지금 내가 생각해봐도 알수없는일이다.

그때 내나이 열다섯이면 사춘기로봐야하는데 그러면 예전에 여선생님을

처음보고 느꼈던 설레임이 있었을법도한데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수학 선생님에 대한 설레임은 없었는듯하고 확실한건 국어 선생님과

도덕 선생님의 국어시간과 도덕 시간에는 확실히 설레임이 있었던듯 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우리 담임 선생님 이기도 했던 
설영희 여선생님이었다. 
내가 2학년에 올라가고 3월에 개학을 하고 담임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인 설영희 
여선생님인걸 알고 중학교 2학년 사춘기 소년은 여선생님을 사모하는 연정을 
마음속에 꼭꼭 숨겨 두었다. 
깔끔한 외모에 부드러운 이미지로 이웃집 누나 같은 포근한 느낌의 선생님은 
밤하늘 날아가는 기러기 처럼 외로운 소년에게 향기 좋은 꽃과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글을 쓰고 시를 접할수 있게 된것도 따지고 보면 국어 선생님인 
설영희 선생님 영향이 큰것도 사실이다. 

어느해 꽃피는 3월, 개학한지 얼마안된 아지랑이 너울너울 피어나는 
따뜻한 봄날 설영희 국어 선생님 수업시간으로 작문 시간이었다. 
작문시간에 수업을 들어오신 설영희 국어 선생님께서는 갑자기 한시간 
수업시간 동안 자유롭게 주제에 상관없는 수필을 쓰라고 말씀 하셨다. 
순간 나는 과연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당황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글을 써야할 입장이라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거냐고 항변할수도 
없는것이고 그렇다고 안쓸수도 없는 입장이라서 나는 어떻게든 글을 써볼 궁리를 하였다. 
같은반 학생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선생님께서 글을 쓰라고 말씀 했을때 
당황하는 빛이 역역하게 보였었다. 
다들 수필을 써본 경험은 없지만 어떻게든 글을 써보려고 궁리들을 하는지 
교실안은 갑자기 쥐죽은듯 적막감이 흘렀고 교실안은 이보다 더 조용할순 없었다. 

나는 지금도 예전 중학교 2학년 작문 시간에 내가 썼던 수필 제목과 수필 내용을 
정확히 기억 하고 있다. 
내가 쓴 수필 제목과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작문 글쓰기 시간중 
글을 다쓰고 선생님 말씀을 기다리는데 설영희 국어 선생님이 내앞으로 
다가오더니 내가쓴 수필 작문 노트를 가지고 갑자기 교탁 앞으로 가더니 
봄의 버들이란 제목의 내가 쓴글을 설영희 선생님이 직접 같은반 학생들 앞에서 
읽어내려 가는데 내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어쩔줄 모르고 당황하였고 
정말 쥐구멍 이라도 있으면 들어 가고 싶은 심정 이었다. 
나는 내글에 대해서 자신감도 없었고 수필을 쓴다는 자체가 나에겐 
커다란 숙제 처럼 느껴 졌는데 내가 좋아 하는 국어 선생님이 내글을 읽다니 
나는 정말 기쁜 마음이라기 보다는 정말 챙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쨌든 이작문 시간에 처음 써본 수필이라 서투른 문장도 많지만 설영희 선생님은 
내글이 다른 학생 글에 비해 좋다고 봐서 내글을 같은반 학생들 앞에서 
읽었단 사실이 좋으면 좋았지 챙피하게 생각할것도 아닌듯 보였다. 

그후 나는 조금씩 수필과 시를 쓰는 작문 연습도 하였고 보잘것 없지만 
나는 간간이 시와 수필을 쓰기도 하였다. 
시기적으로 중학교 2학년 때면 남성 2차 성징이 나타날때와 맞물려 
감성적으로 글을 쓸준비는 되어 있는듯 하다. 
그리고 몇년이 흐른후 내가 군입대를 하고 동해 해안 초소 경비임무를 
맡고 있을때 상부 지시가 내려 왔는데 각해안 초소 부대는 각 사병들에게 
국방 경계 임무 자세 형식의 글을 써서 밤에 근무지 투입 전에 
군장 검사 할때 각소대 담당 문서가 책임지고 매일 돌아가면서 
국방 경계 임무에 대한 글을 읽는 시간이 있었다. 

처음으로 각소대 별로 글을 써서 제출 하고 윤일병이 문서 관리가 
되어 진행을 했는데 윤일병은 부산 모대학 재학중 군입대한 사병이었는데 
글도 잘쓰고 실력있는 사병이었다. 
그런데 윤일병이 소대원 앞에서 각자 써서 제출한 글을 뽑아서 글을 
근무지 투입전 군장 검사 하면서 병사들 앞에서 나와 읽는데 첫날 
내가 써낸 글을 뽑아서 글을 읽어 내려가는게 아닌가.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소대 안에는 서울 일류대학 출신 사병도 있었고 
각대학에 재학중 군대 입대한 사병도 많았건만 고졸 출신인 나보다도 
대학 출신 작문 실력이 못하단 말인가 나는 의아해 했다. 

그런데 매일 다른 사병들이 쓴글이 읽혀질때마다 나는 내가 쓴글이 
다른 사병들이 쓴글에 비해 뒤떨어지지는 않는다고 확신을 하기도 했다. 
소대원 사병들중 대재,대졸 사병들이 쓴글이 특별나다는 생각은 안들었고 
그저 평범 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내글에 대해 조금씩 자신감을 
갖기 시작 했다. 

그리고 나는 군제대후에도 틈틈히 글을 쓰기도 했고 시를 써보기 하면서 
글쓰는것에 차츰차츰 익숙하게 된듯하다. 
그렇다고 내가 글을 아주 잘쓴다고 말을 하는게 아니다. 
다만 나는 나에 맞는 색깔의 글을 쓰는것은 내스스로 자부한다. 
그리고 내스스로 내글이 부끄럽다거나 수준이 낮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 글은 내글이고 내글일뿐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것 내가 느끼는것을 솔직하게 더하거나 빼지도 않고 
있는 사실 그대로 표현 한다는것을 자랑 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 나는 내가 살아오며 경험 했던 내용 들을 형식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훗날에 내자손들이 내가 써논 글을 보고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참고가 됐으면 하는 바램을 적어본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고향 마을 수리산 산밑 골짜기에 외딴집이 한채가 있었다. 
이집은 본래 마을 토박이인 진영이네가 살다가 어느해 진영이네는 
마을 안으로 이사를 내려 오고 전에 살던 외딴집은 양계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 양계장을 때려 치우고 진영이네는 마을을 떠나 도시로 
이사를 갔다.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니까 70년대 초 시절인가 보다. 
70년대 초 어느해 진영이네가 살던 외딴집으로 6,25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넘어 왔다는 미선이네가 이사를 왔다. 
그런데 미선이네는 가족들도 많았는데 국민학교에 다니는 미선이 미순이 
말고도 어린 딸들이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수북 하였는데 정작 미선네는 
동네에 떠돌다 들어 왔기 때문에 미선네가 부쳐 먹을 땅한뙤기 없었다. 

그래서 미선이 아버지와 미선이 엄마는 아이들 데리고 먹고 살기 위해 
마을 품을 팔러 다니며 근근히 연명을 해나갔다. 
미선네는 동네 이집저집 장릿 빚으로 쌀을 미리 갖다 먹고 농사철에 품으로 
갚아나가야할 처지에 있었다. 
그리고 미선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품을 팔러 나가면 으례히 자식들도 
품을 파는 집에서 밥을 얻어다가 자식들을 먹이곤 했다. 
미선네 외딴집에 간혹 가보면 집안이며 부엌이며 어느 한군데 쓸만한 
세간사리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고 하물며 집안에 장독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미선네는 우리 동네로 떠돌이로 들어와 몇년간을 살았다. 

미선이 아버지는 똑똑하게 보였다. 
어딘지 모르지만 많이 배운듯도 보였고 미선이 엄마도 키도 크고 
인물이 반반하고 수더분하니 착하게 보였다. 
내가 미선이 아버지를 가까이 본것은 우리 집에서 였는데 
그것은 우리 아버지가 동네 삼거리 막걸리집에서 막걸리 한잔 얼큰하게 
마시고 미선이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며 나보고 
막걸리 한주전자 받아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나는 심부름 하는게 
싫었지만 어쩔수 없이 외상으로 막걸리 한됫박을 받아올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선이 동생 미순이는 내여동생 은선이하고 국민학교 같은 학년 
같은반 친구 였는데 학교를 마치고 종종 우리집으로 놀러와 숙제도 함께 하고 
고무줄 놀이도 함께 하며 놀았는데 미순이는 눈이 동그란게 예쁘게 생겼다. 

그런데 어느해 늦가을 이었다. 
우리 할머니가 새벽 일찍 일어나 인삼밭을 둘러 보시고 집으로 돌아 오시더니 
미선네가 야밤에 동네를 떠났다고 하시는데 어쩐일인지 내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게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미선이 아버지는 미리 받아 먹은 장릿빚을 감당 못했던지 아이들을 
데리고 야반 도주길을 선택 한듯 싶다. 
지금도 보고 싶은 수리산밑 외딴집에 살던 미선이 미순이가 
눈물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다시 한번 만날수 있다면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냐고 묻고 싶다. 
그리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영기 아저씨는 우리 마을 윗말과 아랫말 사이를 흘러가는 냇가옆 삼거리 
사립문도 없는 초가집에 살던 아저씨다. 
내가 처음 영기 아저씨를 본건 내나이 아마 코흘리게 시절인 대여섯살 때인가보다. 
그러니까 그당시 우리집은 명과나무로 만든 사립문옆 감나무 아래 돼지막에서 
꺼먹 돼지 한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날 우리 아버지는 돼지를 
팔려고 하는지 아침부터 자꾸만 커먹 돼지가 배가 터지도록 먹을 때까지 
구정물에 등겨를 휘휘 풀어 주는것이었다. 
이렇게 꺼먹 돼지가 배가 터질때까지 먹이를 먹이는것은 꺼먹 돼지 무게 근수를 
조금이라도 더나가해 더 좋은 값을 받기위해 구정물에 등겨를 타서 꺼먹 돼지가 
배가 터질때까지 먹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꺼먹 돼지를 팔때보면 돼지를 사러온 장사꾼은 이것을 미리 눈치를 채고 
꺼먹 돼지 무게 근수에서 구정물에 등겨 먹인 무게 근수로 서너근을 
빼달라고 하면 우리 아버지 인심 쓰듯 쾌히 승낙 하고 만다. 

우리집에서 돼지 사러온 장사꾼 하고 우리 아버지 하고 꺼먹 돼지 가격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때 영기 아저씨가 군복을 입고 우리집 돼지막 앞에 나타났다. 
코흘리게 어린 눈으로 바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영기 아저씨는 멋지게 보였다. 
그당시만해도 농촌 시골에서 옷을 다려 입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영기 아저씨가 입은 국방색 군복 바지는 평소 못보던 십일자로 
칼같이 주름이 서있었고 영기 아저씨가 신고 있는 군화는 삐까번쩍 보였다. 

그후 약 일년이 지난후이던가 다시본 영기 아저씨는 군복을 입고 있었지 않았고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소문은 군대에서 오발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기 아저씨는 군대에서 만기 제대를 못하고 의가사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고향에서 하는일이라곤 바로 담넘어에 있는 
삼거리 형목이네 주막집에서 윷을 놀거나 술판을 벌이거나 하면 했지 
절대 산에 올라가 땔감을 해오거나 바쁜 농사철 논밭에 나가 절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기 아저씨는 농사철이 됐던 농한기가 됐던 삼거리 주막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도 어떻게 주머니에서 막걸리 값은 나오는지 주막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취한 모습들이 해가 가고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영기 아저씨는 항상 군복 야전 잠바 비슷한 옷을 주구장창 입고 다녔는데 
항상 영기 아저씨 옆에만 가면 옷에 술이찌든 쉰냄새가 역하게 풍겨 왔다. 
그런데 영기 아저씨는 곤조도 대단했는데 동네에서 누구 하나 영기 아저씨를 
건들지 못했고 술이 취해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영기 아저씨 손아귀 힘은 동네 사람들중에서 영기 아저씨를 따라갈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영기 아저씨는 동네에서 무법자로 술에 취해 십여년을 살았다. 
영기 아저씨는 그래도 한때는 서울 여자와 결혼해서 딸을 낳고 
한동안 잠잠히 자기집 앞마당에 돼지막을 짖고 돼지도 여러 마리 키우며 
술도 일절 안마시고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도 보였었다. 

그런데 어느해 부터인가 다시 삼거리 주막집에 살다시피 하는 모습들이 
보였었는데, 어느날 영기 아저씨가 아랫 마을 상갓집을 갔다와 잠이 들었다는데 
아침에 보니 영기 아저씨는 죽어 있더란다. 
동네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영기 아저씨 서울서 시집온 부인이 
아침 저녁으로 국에다가 술끊는 약을 타서 영기 아저씨에게 
멕여서 영기 아저씨가 값자기 죽은거라고 하는데 그속사정은 알수없는일이다. 

영기 아저씨가 죽고 나자 동네는 술마시는 사람이 없어졌고 
삼거리 주막집도 문을 닫고 새로운 구판장이 들어섰지만 동네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흥청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이젠 농촌 시골 사람들도 몸을 사리는지 친구를 만나도 술을 권하는 
사람들도 드물었고 도회지에 나갔다가 오랜만에 고향에서 친구들을 만나도 
사람들은 인정이 각박해졌는지 서로 데면데면 할뿐 예전 영기 아저씨가 살던 
시대에 주막집 풍경은 온간데 없고 다들 실속만 챙기려는지는 몰라도 
어쩐지 우리들은 무언가 정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는 퍽퍽한 심정이 든다. 
 

억만이 아저씨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 마을 부잣집 북동이네 집으로 
머슴을 살러 들어 오게 된지는 나는 아주 어렸기 때문에 잘모른다. 
억만이 아저씨는 부잣집 북동이네 집에서 죽어라 일만했는데 
억만이 아저씨가 쉬는날은 시골에서 옛날에 절기 철철마다 
단오,백중,유두,칠월 칠석,추석 한가위,설날,정월 대보름등에만 부잣집에서 
그래도 명절이라고 옷한벌이라도 허름한놈으로 사입히고 명절하루 편하게 
쉬라고 배려를 해줬는데 억만이 아저씨 할일이라곤 동네 이집저집 기웃거리며 
막걸리 한사발 얻어 마시는것이 전부였다. 

억만이 아저씨는 어린 내가 봐도 외롭게 보였다. 
나이도 먹을만큼 마흔살을 넘기고 있었지만 형편상 결혼하려는 처녀가 
나타나는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번씩 부잣집 북동이네가 되회지로 데리고 나가 
아주 잠깐 밤거리 여자와 한번 접촉을 하고 다시 돌아 오는것이 전부였다. 

억만이 아저씨는 부잣집 북동이네서 머슴을 아주 오래 살다가 그래도 북동이 
엄마가 살아 계실땐 북동이 엄마가 북동이 머슴 사는데 불쌍 하다고 
이것저것 마음이라도 써줄때는 그래도 억만이 아저씨 어디 정붙일곳 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데 북동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북동이가 장가를 들면서 
입장이 난처하게 빠진것이다. 
그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북동이가 결혼을 하면서 북동이 색시가 머슴을 살고있는 
억만이를 별로 그렇게 탐탁하지 않게 생각 한다는점이었다. 

어쨌든 억만이 아저씨는 자의든 타의든 부잣집 북동이네 집에서 나와서 
다시 창길이 아저씨 집으로 다시 흘러가게 되었는데 한동안은 창길이 아저씨 
집에서 머슴을 산듯 보인다. 
창길이 아저씨도 억만이 아저씨가 불쌍하게 보였던지는 몰라도 달달 마다 
심심치 않게 억만이 아저씨를 목욕시켜서 도회지로 데리고 나가 밤거리 여자들과 
한바탕 접촉을 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그런데 몇년후 창길이 아저씨집도 집안에 크나큰 우환이 생겨 억만이 아저씨는 
더이상 창길이 아저씨집에서 머슴을 살수 없었다. 
그후 억만이 아저씨는 어디로 떠났는지 더이상 동네에서 볼수 없었는데 
몇년후 동네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억만이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부잣집 북동이네 집에서 머슴 살던 억만이 아저씨를 떠올려 보았다. 
이세상 태어나서 이세상을 주관하시는 부처님도 불공평 하시지 
어떻게 한평생 장가 한번 못가보고 한평생 남의집 머슴 노릇만 하다가 
부귀 영화는 바라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허망한 삶을 살다가 이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는 먹먹한 가슴에 
슬픈 감정들이 한없이 밀려왔다가 썰물이 되어 빠져 나갔다. 

억만이 아저씨 살아 생전 기억들은 동네 처녀들을 보고 빙그레 웃던 모습하며 
동네 처녀 이웃집 살던 희숙이에게 아랫 마을로 참외 서리 가자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고 어느해 겨울이던가 눈이 하얗게 펑펑 내리던날 집나간 개를 찿아 
윗말 아랫말 찿아다니던 모습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내가 살던 고향 마을은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휘감듯 능선을 이루고 
마을 앞은 넓은 시냇물이 또아리를 틀듯 수리산 아래 쌍바위에서 
한번 휘돌아 커다란 느티 나무가 있는 아랫 마을로 흘러 내려간다. 

우리 동네에서 새마을 사업으로 확장한 신작로를 따라 내려 가다 보면 
넓은 냇가가 나오고 아카시아 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뚝방을 따라 내려 가면 
방앗간이 나오는데 이방앗간은 내친구 대철이 아버지가 방앗간을 운영하는데 
대철이 아버지는 힘도 좋고 쌀가마니도 번쩍번쩍 들어올려 말이 끄는 수레에 
척척 쌓아 올리기도 하지만 대철이 아버지는 발동기 돌릴때 보면 팔뚝이 
울룩불룩 한것이 힘께나 쓰게 보인다. 
이방앗간은 매일 매일 발동기 소리가 들리는건 아니고 방아를 찧는 
가을 추수가 끝나는 늦가을이나 이른 봄에 발동기 소리가 나고 
방앗간에 방아를 찧으러 오는 윗동네 사람들, 아랫 마을 사람들로 분주 하지만 
농한기인 겨울 철에는 방아를 찧으러 오는 동네 사람들도 없어 발동기는 
자동적으로 맥없이 멈춰 있다. 

내가 그러니까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른 해이니까 
아마 1977년도 겨울 이었나 보다. 
그해 대철이는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는데 성적이 전체 1등 
수석으로 3년 장학금을 받으며 수업료 한푼 안내고 공부 할수 있게 되었다. 
그때 우리 동네 친구들은 모두 시골 구석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오직 대철이만 집안 형편이 넉넉한지 대전에 집도 한채 있었고 
대전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평소 대철이 하고 만날수 있는 기회는 더군다나 없었고 
어쩌다 한번 얼굴을 마주치는 정도 였는데 대철이는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서 전체 1등 수석을 안고 의기양양 어깨를 으시대며 
고향 마을을 찿아왔다, 

그때만 해도 중학생 우리 주머니를 털어봐야 돈10원 나오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데 대철이는 고향 마을에와 친구들에게 자기가 한턱 쏜다는식으로 말을 하며 
밤에 자기 방앗간에서 여자 친구들 데려 다가 놀자는것이다. 
우리 동네 친구들 대여섯명은 좋아서 입이 벌어질 대로 벌어졌는데 
우리는 어둑어둑 해지는 저녁에 산아래 홍식이네 집에 모여있다가 
다같이 냇가 섶다리 건너 수리산 밑에 있는 발동기가 멈춰 있는 
대철네 방앗간 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방앗간에는 아랫 동네 여자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친구들은 다들 실망한 눈빛으로 낙담을 하고 있을때 대철이가 
아랫 동네로 여자 친구들을 데리러 가자고 제안을 하는것이다. 

그래서 대철이를 따라 아랫 동네로 가서 여자 친구들중 그래도 집도 좀 먹고 
살만하고 얼굴도 반반한 복희네 집으로 갔더니 복희는 남자 친구들을 
보고 수줍어 어쩔줄 모르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데 옆에 있던 복희 엄마가 
소문으로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 한다는 대철이를 알아보고 
놀러 갔다가 오라고 하는데야 어찌나 고마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굴 반반한 복희를 앞세워 여자 친구들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불러내고 보니 얼추 남자 숫자와 비슷 해졌다. 

그런데 여자 친구들 하고 놀려면 소주 댓병도 필요하고 새우깡 부스러기며 
콜라나 환타등 음료수도 준비를 해서 방앗간으로 가야 하는데 
대철이가 통크게도 주머니에서 몇백원 떡 내놓는게 아닌가. 
그래서 그돈으로 아랫마을 중앙에 있는 구판장으로 가서 소주 댓병에 
환타 서너병하고 새우깡이며 라면땅,자야를 한보따리 사들고 수리산 아래에 있는 
방안간 집으로 갔는데 미리 대철이가 장작불로 안방을 뜨끈뜨끈 하게 덥혀 놨는지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따뜻한 온돌방 온기에 저절로 추위가 녹아 내렸다, 

좁은 방안에 여자 친구 한명에 남자 친구 한명씩 사이사이 껴 빙둘러 앉자. 
사가지고온 과자 봉지를 모두 뜯어 방안 가운데 신문지를 깔고 쏟아 놓고 
소주 댓병 짜리도 마개를 열고 한되짜리 찌그러진 노란 양은 주전자에 
반쯤 붇고 환타 두병을 따서 섞어 놓으니 그주황 색깔 하며 소주 냄새가 
달착지근 코끝을 자극하는데 친구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연신 줏어 먹으며 
스텡 그릇에 환타와 혼합한 소주를 따라 돌려 마시는데 기분은 정말 째지게 좋았다. 

스텡 그릇에 한잔 두잔 돌려 마신 우리들은 "감자에 싹이나서"란 게임을 
하였고 겨울밤 깊어가는줄 모르고 놀다가 여자친구들은 새벽녘에야 
아랫 마을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밤 홍식이와 명자는 눈빛이 달랐었다. 

그날밤 이후로 아랫 동네 사는 명자 하고 우리 동네 친구 홍식이는 한동안 
버스가 다니는 새로난 신작로옆 우리 동네와 아랫 동네 중간 사이인 
왜솔 나무로 둘러 싸인 묏부리에서 밤마다 사랑을 나누었고 
멀찌기서 둘의 사랑 놀음을 지켜보던 동네 친구들은 
침만 꼴깍꼴깍 삼킬 뿐이었다. 

다음날이면 친구들은 홍식이에게 달려가 사랑 놀음에 대한 결과를 
추궁 하였고 홍식이는 거짖말을 하는지 참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손가락 장난을 했노라고 이실직고를 하는데 동네 친구들은 
홍식이가 부럽다는듯 실실거리며 웃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만해도 1970년대인데

이때만해도 시골에선 친구둘중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기도하지만

일부 친구들은 중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도회지에 나와 철공소를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그때만해도 고등학교를 도회지에서 다니는 친구들은 도회지에서 자취를 하며

휴일이면 시골집을 오고갔는데 그래도 도회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시골집에 와서는 도회지말을 섞어가며 폼좀잡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철공소에서 기술을 배우던 친구들도 가끔 시골집에 다니러 왔다가

도회지 생활을 말하곤 했었는데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있던 나는

도회지 생활에 호기심을 갖지않을수 없었다.


우리들보다 빨리 객지에서 사회생활을하는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회지는 확실히 시골보다는 볼거리는 물론 호기심으로 가득한곳이었다.

그시절 우리의 관심사는 오직 여자와 관련된 성적 호기심이었는데

도회지에서 철공소에 다니는 친구는 벌써 여자와 관계를 해봤다는것이

신기하게 느껴졌고 부러운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철공소에 다니는 친구 말을 들어보면 방석집에서도 놀아봤다는데

방석집에서 접대부 여자들과 젖가락을 두드리며 놀려면은 한상당 얼마는 줘야하고

접대부 여자들이 홀라당 옷을벗고 술을 마신다는데 내가 생각을 해봐도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있던 나로써는 마냥 꿈만같은 이야기였다.

어느덧 나도 지방에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주 오랜만에 

철공소에 다니는 친구를 찿아 도회지로 놀러왔는데 

친구는 철공소한쪽 구석방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철공소에 다니는 친구는 저녁에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고향친구를 만났다고

손톱에낀 기름때도 말끄미 벗겨내고 머리를 감은후 뒷주머니에서 도끼빚을 꺼내

긴 장발 머리를 빗어내리며 신바람이 났는지 휘바람을 휘휘 불었다.

친구는 나를 데리고 도회지 번화가를 한바퀴 구경시켜준다음

소주한잔 하자면서 목척다리 상가뒤 먹자골목 중국집으로 들어가는것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짬뽕이란 중국음식을 맛볼수있었고 

짬뽕 국물에 빽알에 소주한잔 얼큰히 취할수있어 기분좋았다.

먹자골목 중국집에서 나온 친구와 나는 도회지 중앙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 역전 광장으로 향하였는데 넓은 역전광장에선 

사창가 삐끼 아줌마들이 오고가는 사내들의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총각 쉬었다 가요,아가씨 좋은놈으로 해줄께"

"얼마여요?"

"2천원만 내,싸게해주는거야 총각"

사창가 아줌마를 따라간곳은 역전 광장옆 포장마차가 즐비한 골목길을 따라가다가 

여인숙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멍가게옆 여인숙이었는데
친구는 미리 여인숙에 들어가기전 할일이 있다며 약국으로 들어가더니

마이싱 두개를 사와서 날보고 먹으라고 마이싱 하나를 내미는것이었다. 

"먹어,먹어야 성병도 안옮고 깨끗한겨"
나와 친구는 여인숙 앞에서 마이싱 하나씩을 나눠먹고 여인숙 방으로 들어갔다.

친구는 옆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아주 조그만 하꼬방에서 여자를 기다리는데

가슴이 오돌오돌 떨렸다.

예쁘고 몸매좋은 누나가 들어왔다.

"팁?"

"없는디요"
누나 얼굴에서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얼렁 올라와"

나는 엉거주춤 바지를 내리고 누나 배위로 올라갔다.

내 중앙 심벌은 막대기처럼 부풀어올랐다.

누나가 내 심벌을 잡아 누나의 중앙 풀섶에 갖다댔다.

나의 심벌은 동굴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동굴속으로 빨려들어간 내중앙 심벌은 심하게 요동쳤다.

예쁜 누나는 단박에 내가 처음이란걸 눈치챘는지는 모르지만

누나는 웃었다. 

 

9 Comments
sarnia 2021.05.30 00:18  
불후의 명작이예요.
꾸미지 않은, 다시 말해 똥밟은 소리 없는 라이프스토리만큼 재미있는 작품이 따로 있을까요?
언젠가 향고을 님 올린 이야기에 '뻔한 이유'로 시비를 거는 '뻔한 사람'들이 있던데 전혀 신경 쓸 일 아니예요. 

고고 ~~
향고을 2021.05.30 08:15  
명품 글을 쓰시는 사르니아님께서 호평을 해주시니
감개무량,감사합니다,
언젠가는 치앙마이든,치앙콩이든 사르니아님과 술한잔 할수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향고을 2021.05.30 18:50  
재미없는거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어요,
시간이 넘쳐나는 백수나,
돌이킬수없어요님 전매특허 심심한분들만,
이글도 여행중 심심해서 쓴글이니까요,
재미하면  명월이,ㅎㅎ
향고을 2021.05.31 06:32  
깜따이님 공개하세요,
묵혀두면 상해요,ㅎㅎ
글도 생명인데 빛을 보게해줘야죠,
공개 해주시기를 강력 건의하는바입니다,
향고을 2021.05.31 20:07  
19금 명월이 예기는 빼고 쓰면 되잖아요,
19금 쓰다간 안주인님한테 쫒겨나는 불상사가,
함 화끈하게 보여주세요,ㅎㅎ
들국화야 2021.05.30 22:22  
우와~
감동입니다.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듯이 향고을님의 유년이 그대로 전해져오네요.
아주 달필이십니다.
피천득님늬 수필처럼 울림을 주는 진솔한 글솜씨에 감탄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그시절의 창숙이나 미순이가 이글을 읽고 연락주시면 좋겠네요.
향고을님덕에 저의 유년도 반추해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향고을님 짱~
향고을 2021.05.31 06:28  
항상 댓글을 아주아주 예쁘게 달아주시는 울들국화야님,
감사합니다,
들국화야님이 누구다란걸 전 느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귀주 천호채에서 찍은 사진도 있구요,
언젠가 다음에 사진을 돌려준다면(인터넷으로)
아마 들국화야님은 지난 여행 추억속으로 푸욱 빠져들겁니다,
하여간 지난 여행을 반추하면서 한잔할수있는 날이,ㅎㅎ
니콤완 2021.05.31 10:32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보는 듯한 글이네요. 대단하십니다.
향고을 2021.05.31 20:08  
뉴페이스 니콤완님의 호평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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