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였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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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였다 13.

겨울나그네 8 1442

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였다 13.


또 한명의 친구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친구 이름은 이미 다 알려져있으니 실명 그대로 써보고 싶다.


서진룸싸롱 사건으로 알려진 사고를 치고 감옥에 갔다 나온 장진석은 내 중학교 동창이며 친한 친구였다.

내가 이 글에서 친구였다...라고 쓰는 이유는 지금은 연락을 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전국의 대학들이 휴교를 했고 대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목포에 내려왔다.

서울에 있던 나도 목포에 내려와 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목포에 내려가도 집에서 잠을 자지 않고 숙박업소에 가는 습관이 있다.


목포 북교 초등학교 근처에 깨끗한 여인숙이 있었는데 이층에 있는 두 개의 방이 대여섯평 정도 넓이의 마당같은 공간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경사진 곳에 바짝 붙어있는 건물의 모양이 이층도 일층처럼 마당이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한달치 월세를 주고 방을 얻었다.

먹고 자고 마음 편하게 지내던 어느 날 시내를 걷다가 진석이를 만났다.

오랬만에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하다가 진석이랑 같이 유도대를 다니던 박영진과 합류했다.


박영진은 하의도가 집이다.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박영진도 목포에 친구들이 많다.

결국 내 옆 빈방을 박영진이 얻었고 그렇게해서 여인숙집 이층 두 개의 방과 마당같은 공간은 우리 친구들의 아지트로 변해버렸다.

매일같이 친구들이 몰려왔고 친구들이 석유곤로를 가져오고 라면을 끓이고 김치를 가져다가 먹고 설겆이는 친구들의 여자 친구들이 하기도 하고 한마디로 매일 야유회 캠프같은 분위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하루하루 정신없이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대학 휴교령이 풀리고 친구들은 모두 다 서울로 올라갔다.

여름방학이 되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그리고 얼마 후 친구들은 여름방학이 되자 다시 목포에 왔다.


진석이 한테는 한살이 어린 여자친구가 있었다.

방학때 목포에 내려온 진석이 여자친구는 임신 중이었다.

목포 연동 어디쯤으로 기억이 난다.

야매로 낙태를 해주는 할머니가 사는 집이 있었다.

진석이의 연락을 받고 그집 근처에서 진석이를 만났다.

임산부는 이미 방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딘가에 주사를 맞았다고 했다.

통증을 호소하는 비명소리가 마당에 서있던 우리에게 들렸다.

할머니가 우리에게 여기 있지 말고 서너시간 후에 오라면서 우리를 내보냈다.


저녁 때가 되어 할머니집으로 들어서자 할머니가 노란색 기름종이 봉투를 주면서 말했다.

어디가서 잘 묻어주라고....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아들이였어....

진석이랑 둘이 택시를 타고 유달산아래 있던 우리 집으로 와서 삽과 곡괭이를 챙겨서 산으로 올라갔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 내가 곡굉이로 땅을 깊이 파고 삽으로 퍼낸 후 봉지를 묻고 흙을 다시 덮었다.

온 몸이 땀에 젖어 흥건해졌다.

우리집 뒷뜰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었다.


몇 일 후 

진석이랑 둘이서 이발소에 갔다.

그때 진석이가 했던 말이 사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먼저 의자에 앉아 머리를 깍던 진석이가 이렇게 말했다.

" 한옥아 내가 만약에 크게 잘못돼도 너는 내 곁에 있어줄것 같다"


그 말은 독백처럼 들렸다.  그리고 몇 년후에 실제로 그대로 되었다.


그 무렵 진석이가 내게 이런 말도 했다.

" 한옥아 내가 건달 선배들 통해서 한국 건달들을 보니까 뭐 별 것 없어. 내가 한번 싹 쓸어버릴까?"

나는 그 말을 듣고도 크게 염려가 되지는 않았었다. 뭔가 실감나지 않았었다.

그게 나중에 어떤 사건을 몰고 올지 그 때는 정말 몰랐었다.

한때 유도 국가대표를 꿈꾸던 진석이가 아니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그 다음해 1981년 쯤 진석이가  여자 친구와 동거하고 있던 한양대학교 근처 반지하 집을 간 적이 있다.

세 사람이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함께 잠을 자고 아침을 먹고 있는데 다부진 몸매를 가진 한놈이 진석이를 찾아왔다.

김동술이었다. 나는 그때 동술이를 처음 보았다. 


한양대학에 다니고 있던 진석이 여자친구는 나중에 진석이와 목포에서 결혼을 하고 아들을 하나 낳았지만 얼마 후 서진룸싸롱 사건이 터지면서 진석이와 헤어졌다. 두 사람은 미처 혼인신고를 하기 전이었다.

진석이의 아들은 친형 장철진씨의 아들로 입적을 시켰다고 들었다.


이년 쯤 세월이 흘러 1983년 쯤으로 기억한다.

진석이가 나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전화를 했다.

그 당시 유도대학교는 강동구 풍납동에 있었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서 건물 앞 벤치에 앉아 기다리자 진석이가 나왔다.


반갑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 한옥아 우리 좀 같이 있자"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보는 진석이가 뭔가 결심을 하고 있구나 하는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만일 그때 나도 동의하고 동참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나도 최하 이십년정도는 국립호텔에 장기 투숙 손님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석이와 함께 유대를 다녔던 박영진이가 사건 후 정확히 이십년을 살고 나왔다.

나도 그정도는 살아야 했을 것이다 ...라고 수 없이 생각했었다.


그리고 또 해가 바뀌어지고 1984년에 천호동 사창가 근처에 있던 어떤 여관에 가서 진석이를 또 만났다.

진석이는 체중이 백오키로가 넘어 군대를 면제 받았고 박영진은 군대를 갔다와서 복학생 이었다.

그 여관에서 고금석이를 처음 만났다.

엄청난 골격을 가진 놈이었다.       

진석이가 나를 친구라고 소개하자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 후 내가 진석이를 본 것은 유도대 졸업식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 후로는 진석이가 나를 찾지 않았다.


이년이 지나고 1986년 여름이 되었다.

독립기념관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언론과 메스컴에서는 연일 화재 사건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8월 14일 밤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그때 구리에 살고 있었다.

무심코 신문을 집어든 나는 정신이 번쩍들었다.

그야말로 신문 일면이 몽땅 다 서진룸싸롱사건으로 채워져 있었다.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이 시작되면 소위 말하는 땡전뉴스도 없었다.

땡하면 곧바로 서진회관 어쩌고 하는 소리 뿐이었다.


깡패들끼리 술집에서 싸우다가 깡패 네명이 죽었다.

이렇게 한 두번 다루고 말아야될 사건이었다.

뭐가 그리도 대단하게 마치 무슨 전쟁이라도 터진듯 연일 사건을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부풀리고 있었다.

독립기념관 화재뉴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모두 붙잡혔고 서울 시내에 있는 여러곳의 경찰서에 분산시켜서 수사를 하고 있었다.

진석이는 마포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서 면회를 신청했으나 허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서울구치소에 수감 된 이후에 면회를 할 수 있었다.

목포 친구들과 자주 면회를 다녔고 편지도 자주 보내주었다.

하루는 면회 도중에 내가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확인을 하고 싶어서였다.  

진석이와 동술이가 전북 임실군에 있는 한 집에 숨어 있다가 잡혀올때 경찰들과 격투를 했고 그래서 경찰관 다섯 명이 모두 일계급씩 특진을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나는 그게 좀 이상했다.

격투끝에 검거했다면 경찰들도 많이 다쳤을텐데 모두 다 멀쩡했다.

그리고 진석이와 동술이가 잡혀와서 기자들 앞에 서있는데 약속이나 한듯이 가슴팍에만 피가 묻어있었다.


정말로 경찰관들과 격투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진석이가 웃으며 답했다.

격투는 커녕 가벼운 반항도 없었다고 ....

임실에 있는 큰 강 가운데 섬이 있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도피처에 들어간 두 사람은 경찰이 밖에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확성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포위되었으니 순순히 손들고 나오라고  .... 다 틀렸구나 생각하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손에 수갑을 채울때도 반항은 커녕 자기들을 체포하는 경찰관들에게 협조적이었다.

경찰들은 손에 총을 들고 있었고 두 사람을 체포한 뒤 진석이의 머리통을 비스듬히 내려치기 시작했다.

머리가 터져 피가나자 피를 손으로 훔쳐서 두 사람의 옷에 묻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조서 잘 꾸미도록 도와줄테니 걱정하지마라.


경찰관들은 전국민들을 상대로 쇼를 했다.

운동을 했거나 싸움을 좀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신체 능력이 절정기에 있고 힘이 장사이던 유도4단 장진석과 그에 버금가는 김동술 두 명이 경찰관 다섯명과 격투를 했다면 그렇게 쉽사리 당하고 체포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직하게 힘든 일을 해나가는 좋은 경찰관들도 많다.

그러나 부정직한 경찰관들도 분명 있었다.

진석이에게 그말을 듣고 면회실을 나온 나는 114에 전화를 걸어 동아일보 사회부 전화번호를 물었고 전화를 걸어 사회부 기자 한 명과 오랬동안 통화를 했다.

다섯명의 경찰관이 총까지 가지고 가서 그냥 잡아온 범인들을 꼼짝못하게 묶어놓고 한 명의 머리를 쳐서 피를 내고 그 피를 두 사람의 가슴팍에 손으로 바르고 격투끝에 검거를 했다고 발표를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기자와 오랜시간 통화를 했고 제보를 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으나 그 사실이 기사화 되지는못했다.

여야 정치권 모두에게 부담이 되었던 독립기념관 화재사건은 서진룸싸롱 사건이라는 좋은 ? 사건으로 깨끗이 덮여버리고 말았다.

나라 전체에 이슈가 될 뻔했던 사건을 덮기에 그보다 더 좋은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사건의 재판은 엄중하게 진행 되었다.

1심과 2심에서 장진석 김동술 고금석 세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박영진은 이십년이 선고되었고 1심에서 10년이 선고되었던 정요섭씨는 2심에서 후배들을 잘못 된 길로 이끌었다는 것과 반성하지 않고 항소를 했다는 괘씸죄가 작용하여 오년이 추가되어 15년형이 선고되었다.


대법원의 판결만 남은 시점이었다.


하루는 진석이 면회를 갔다.

진석이가 나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인 서진회관의 박ㅇㅇ전무를 찾아내서 진석이의 친형 장철진씨에게 연결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박ㅇㅇ전무는 서진회관의 주주겸 상무로서 

, 사건에 대한 증언에 나서서 진석이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재판이 끝나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적해버렸다.

박전무가 했던 증언에 의하면 싸움이 일어나고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다른 방에서 정요섭씨와 술을 먹고 있던 진석이가 밖으로 나와 " 뭔일이야" 하고 물었고 곧바로 김동술 고금석등 동생들이 싸우는 것을 알아채고" 그새끼들 아주 죽여버려" 라고 싸움을 독려했다는 것이었다.


1심과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장진석은 싸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조직의 두목이고 싸움을 하는 부하들에게 살해지시를 했다는 혐의가 인정되어 사형선고까지 나왔다.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되자 장진석의 아버지는 살고있던 집을 처분한 돈으로 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새로 선임했다.


장진석이 대법원 편결에서 사형을 무기로 낮추려면 서진회관 박ㅇㅇ전무의 증언번복이 꼭 필요했다.


면회를 끝내고 나와서 진석이 형에게 전화를 했다.

장철진씨는 내 말 몇마디를 듣자마자 박ㅇㅇ전무가 가끔씩 신사동 설악아파트에 살고있는 어떤 여자를 만나러 간다고 알려주었다.

박ㅇㅇ전무의 소재지를 찾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내 역할은 한마디로 설악아파트에 잠복근무를 하다가 박ㅇㅇ씨가 나타나면 자기에게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박ㅇㅇ전무를 만나본 적이 없었고 서진회관에 가 본 적도 없었다.


박ㅇㅇ전무를 분별하고 만나는 것은 내가 풀어야할 숙제였다.

전화 통화를 끊고 그길로 신사동 설악아파트를 찾아갔다.

경비실에서 근무하던 경비원에게 간곡하고 정중한 자세로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다.

경비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가 이름은 모르지만 가끔씩 검정색 르망 승용차를 타는 사람이 오는데 일반 회사원 같지 않고 뭔가 연예인이나 유흥업소를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안왔으니 어쩌면 오늘이나 내일 올 때도 되었다고 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검정색 르망 승용차를 기다렸다.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녁 식사도 아파트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하고 계속 기다리다 저녁 9 시쯤 되었는데 검정색 르망차가 한대 들어왔다.

주차장에 후진하는 차에 내가 다가서자 차가 멈췄다.

창문을 열고 누구시냐고 묻자 내가 사정을 설명했다.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더니 한참을 이야기한 끝에 나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기의 애인 집으로 올라갔다.


차까지 한잔 대접받고 다음날 진석이 형한테 연락하기로 약속을 받았다.

박ㅇㅇ전무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자기 가게에서 사건이 터지자 자기도 망했다는 말도 하고 자기가 증언을 바꿔도 진석이가 무기로 감형되기는 어렵다고도 했다.

또 자기가 위증죄로 처벌을 받는것도 너무 부담스럽다고 토로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진석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변호사와 상의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약속해준 박ㅇㅇ씨가 너무나 고마웠다.


집에 돌아온 나는 대법원장님께 간절한 탄원서를 썼다.

진석이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을 막아주지못한 친구들도 함께 책임을 지고 싶다고 평생을 함께 반성하며 살겠다고 제발 친구 목숨을 살려주십시요 라고.....

친구 몇명과 함께 서명을 하고 지장까지 찍어서 편지를 부쳤다.

일주일쯤 지나자 법원 행정처장의 직인이 찍힌 답장이 왔다.

탄원서를 대법원 재판부로 보냈다는 답신이었다.


대법원의 재판결과가 나왔다.

재판을 받은 모든 사람의 형량이 2심의 결과와 같았으나 오직 장진석의 형량만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이 되었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의 위력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팔고 형님이 모든 수고를 다하셨고 그리고 나는 종이 한장도 맞들면 낫다는 심정으로 약간의 수고를 보탰을 뿐이다.


재판이 끝나고 십년쯤 세월이 흘러서 진석이는 공주 교도소에 있었다.


수인번호 506번 장진석.

내가 한 때 가장 좋아했고 친했던 친구가 506번이라는 수인번호로 불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진석이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사람이었던 김동술과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고금석 두 명은 이미 사형이 집행되어 이세상에 없었다.


태국에 살고있던 나는 오랬만에 한국에 나왔다가 진석이 면회를 갔다.

일반 재소자들보다 오랬동안 면회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평상시 별로 말 수가 많지 않은 진석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동술의 아버지가 진석이 면회를 왔다.

사건 이후 처음 이었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동술이가 아주 어렸을때 집에 있던 동술이 아버지에게 지나가던 중이 찾아왔다. 동술이가 아들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중이 말했다.

이 애는 제 명대로 못 살고 죽는다고 그것도 아주 큰 사고를 치고 죽을거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출가를 시켜서 중을 만들거나 어디 먼 섬으로 보내 염전이나 하고 살면 살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 목포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가서 염전을 하는 친척에게 동술이를 맡겨놓고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동술이는 몇달 후 어른들 틈새에 끼어 목포까지 배를 타고 나와버렸다.


이런 이야기였다.

그 때 그 중이 어린 동술이의 어디를 보고 그런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특별히 어떤 기운이 느껴지는 아이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는 말이 생각난다.

중이 뭐라고 했든 목사가 뭐라고 하든 결국 사람은 자기의 정신과 마음을 어떻게 쓰는지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사람은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

김동술 같은 사람들이 고려 무인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제 세상 만난 듯 살았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죽더라도 명예로운 죽음을 해야지, 대명천지 20세기에 태어나서 조폭이 되어 술먹다가 칼싸움을 하고 사형을 당한것은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장진석은 무려 32년을 살다가 나왔다.

자기 스스로 사람 만나는것을 조심하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들린다.

인생의 황금같은 시절을 수인으로 보낸 사람이 떠들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죄값을 치뤘으니 누가 뭐랄 사람도 없을 터인데도 조용히 지내는걸 보니 분명 한번씩 나타나면 주변이 시끌어웠던 옛날의 장진석은 아니다.


누구라도 나이를 먹었으면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다.

젊은 사람들이 잘하든지 못하든지 뭐든지 빨리 물려주고 조용히 지내야 한다.

젊어서의 실수는 얼마든지 용서가 되지만 나이 먹고 꼴불견 떨면 그보다 추한 것은 없다.














8 Comments
kairtech 2022.07.10 05:26  
서진룸싸롱사건
당시 제3한강교건너 신시4거리근처에 사무실이있어 매일 가던길근처에있어서 생생히기억합니다
반포고속타미널에서 멀지않은곳이라 지나다니면서 사건현장이라고 쳐다보곤했는데.....
사람의앞날에 작은갈림이 크나큰결과로 찿아오는일이 세월지나 나이들어보니 실감합니다
다음편을기대해봅니다  감사합니다
겨울나그네 2022.07.10 07:16  
[@kairtech] 감사합니다 젊은 날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추억만 남았네요
Vagabond 2022.07.10 14:58  
제가 용인대 인근에 사는데 ㅎㅎ
이 일로인해 학교명이 바뀐거군요
아...그야말로 역사의 한가운데 계셨네요
겨울나그네 2022.07.10 16:11  
저는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할리 2022.07.12 01:43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기관과 나쁜 정치인과 한통속이 된 언론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을 조작하고 확대해서
국면을 전환하는 것은 똑같은 것 같습니다. 
지금도 검찰의 주도하에 단독을 미끼로 기레기들이 사건을 조작질하죠.
친구분도 죗값보다 과하게 피해를 입으신 희생양이시것 같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이제 전부 정독으로 완독했습니다.
다음편이 기대 됩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감사드립니다.
겨울나그네 2022.07.12 03:22  
[@할리] 감사합니다
불불스키 2022.07.12 11:50  
14회는 언제 나오나요? 이상하게 자꾸 기다리게됩니다.항상 많은걸 느끼게되는 글이라 생각됩니다.
겨울나그네 2022.07.12 15:08  
[@불불스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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