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부족한 나이...
며칠 전부터 문득문득 지나온 내 삶을 글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뛰어난 작가도 아니고 내 삶이 대단했던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들까?
그러다 우연히 해장국 집에서 해장국을 먹으며 신문을 보다가 어떤 시인이 쓴 칼럼을 읽었다.
칼럼을 쓴 시인은 30여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러나 최근에는 자주 만나지 못하고 이메일이나 문자로만 안부를 묻는 사이였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지면에서 대하는 시인의 글이 반가워서 읽기 시작했는데
점점 그 내용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며칠 전부터 지나온 삶을 글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를...
시인이 칼럼에서 스스로를 표현한 것처럼, 나도 어느새
‘중년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좀 많고 노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젊’은
낀 세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시인처럼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과 아직 엇비슷하다고 여’기고
‘버려야 할 것보다 챙겨야 할 것이 더 많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관계가 뒤집혀져 버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턱없이 부족한 나이가 되었으며
챙겨야 할 것보다 버려야 할 것, 정리해야 할 것이 많아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버렸다.
그렇게 속절없이 떠나보낸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무의식중에 지나온 삶을 정리해보겠다는,
회고하고 반성하고 자책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이끌어낸 게 아닐까?
얼마 전 어느 분이 이곳에 ‘내가 늙어감을 인정해야 할 증상들’이라는 글을 올렸을 때
여러 분이 호응한 걸 보고 새삼 나이 듦에 대해 걱정하는 분이 많다는 걸 알았다.
아래의 칼럼이 그런 분들에게 작은 단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지나온 삶을 글로 정리하는 일을 시작해보기로 결심했다~^-^
(아래 칼럼은 며칠 전에 봤는데,
7일 4개의 글쓰기 제한 때문에 이제야 공유합니다^^;;)
어느 시간대에 지하철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서열’이 달라진다. 출퇴근 시간대에 지하철에 오르면 내가 연장자에 속한다. 반면 낮 시간에 타면 내가 가장 젊은 축에 든다. 1990년대 후반 구조조정 바람이 휘몰아친 데다 자가 운전자가 크게 늘어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일 터인데, 내가 지하철 안에서 나이를 실감하게 된 것은 사오년 전, 오십대 중반부터다.
중년이라고 하기엔 나이가 좀 많은 것 같고 노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젊으니 ‘낀 세대’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중년과 노년 사이에서 나이를 자주 의식하게 된다. 요즘 나를 괴롭히는 것은 건망증이다. 궁여지책 중 하나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안, 전, 지’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두 손으로 얼굴과 주머니를 만지며 안경, 전화기, 지갑을 제대로 챙겼는지 점검한다. 퇴근할 때도 문간에서 ‘안전지, 안전지’를 되뇌곤 한다.
몸이 보내는 신호도 잦아진다. 시력이 나빠진 것을 시작으로 기억력과 청력이 예전 같지 않다. 집중력도 떨어진다. 잇몸이 부실해져 치과에도 가야 한다.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불안감이 더해진다. 십여년 전, 칠순을 앞둔 선배가 농담 삼아 던진 말이 요즘 부쩍 생각난다. “육십 줄에 들어서니까 두 발 중 한 발이 병원에 가 있더라.” 나이 들면 병원에 자주 가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이에 대해 비교적 무심하다고 자부했다. 돌아보니 그때는 나이듦이 늙어감하고 아직 무관할 때였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과 아직 엇비슷하다고 여길 때였다. 버려야 할 것보다 챙겨야 할 것이 더 많다고 믿을 때였다. 연말연시에는 지난해를 돌아보기보다 새해 계획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역전됐다. 내가, 아버지가 나를 낳은 나이가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쉰에 낳으셨다. 내가 오십대로 접어들면서 위와 같은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며칠 전 친구가 파일을 하나 보내왔는데 제목이 낯설었다. ‘계로록’. 의성어 같기도 한데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파일을 열어보니 소노 아야코라는 일본 작가가 노년에 경계해야 할 것들을 정리한 글이었다. 친구가 벌써 나를 노인 취급하는 것 같아 언짢았지만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남이 주는 것, 남이 해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단념해야 한다.’ 계로록이 나를 향한 권고로 들렸다. 두 손 들고 인정했다. 나는 노년기에 한 발 들여놓은 것이다.
노인, 노년, 노후에 대한 관심은 진작부터 가져왔다. 하지만 그때는 개인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적 차원, 문명사적 맥락에서 초고령사회를 염려했다. 초고령사회는 지구 기온 상승이나 에너지 고갈, 양극화, 인구 폭증, 신종 전염병, 과학기술혁명과 같은 특이점의 한 요소였다. 노인이 많은 사회, 100세 시대는 지금껏 인류가 경험치 못한 초유의 상황이다. 노인 개개인과 가족에게 닥친 문제일 뿐 아니라 미래 세대와 갈등이 일어나는 전선(戰線)이기도 하다. 노인 문제를 못 풀어내면 세대 전체, 사회 전반이 뿌리째 흔들린다.
현재 500만이 넘는 1인 가구 중 독거노인이 절반을 넘는다. 이들은 삼중고에 시달린다. 외롭고 가난하고 아프다. ‘노인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만, 국가에 맡겨놓으면 역기능이 발생할 수 있다. 영국의 복지제도가 선량한 시민을 어떻게 죽음으로 몰아가는지를 고발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보여주듯이 관료주의 아래서 노인들이 모멸감에 시달릴 수 있다. 개개인의 각성과 실천이 사회를 움직이고 동시에 국가 정책에 개입해야 한다.
늙어감에 대한 편견, 오해, 무지부터 바로잡는 것이 노인 문제를 ‘노년 문화’로 승격시키는 첫 단추다. 노인학의 선구자 중 하나인 헨리 나우엔은 우리 사회가 노인을 격리시키고 젊음의 영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나이듦은 자기 삶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성숙의 여정이므로 품위 있게 늙어갈 수 있는 ‘우아한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고 나우엔은 말한다. <오십, 마침내 내 삶을 찾다>(앨런 힉스, 이경식 옮김)는 중년기에 일과 직장, 가정보다 자기 자신을 1순위로 올려놓아야 두 번째 청년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나는 자기 자신을 1순위로 올려놓는 ‘우아한 기술’ 중 하나가 자서전이라고 생각한다. 자서전 쓰기가 부담스럽다면 연표를 상세하게 작성하거나 누군가에게 자기 생애를 구술하기를 권한다. 그렇게만 해도 작지 않은 변화가 일어난다.
늙어감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노인에게도 내일이 있다. 어쩌면 노인에게 미래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노인의 미래가 더 값질 수도 있다. 노인의 미래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노인의 삶은 곧 미래세대를 위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감하다. 물려받은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물려줘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다.
‘젊었을 때보다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질 것.’ 계로록의 한 구절이다. 우선은 내 삶부터 가다듬을 일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라고 기도부터 해야겠다. 어제보다 더 젊어질 수는 없지만 어제보다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하소서. 어제보다 더 많이 가질 수는 없지만 어제보다 조금 더 나눌 수 있게 하소서…. 내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아낸다면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선물처럼 물려받을 그 무엇이 조금씩 쌓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