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였다 18.
나는 태국의 관광가이드였다 18.
방콕에서 가이드를 하고있는 동생 윤병석은 두 번의 대형 사고를 겪었다.
두 번의 대형사고가 났지만 손님들이 크게 다치지 않은것도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윤병석은 가만히 보면 복이 많은 사람이다.
주위에 항상 좋은 사람들이 포진해있다.
지금의 태국인 부인도 좋은 집안 출신이고 현재는 은행의 지점장이다.
아내 복도 있고 예쁘고 똑똑한 딸도 있다.
윤병석은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한다.
세상에 겸손한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병석이가 팀을 나갔다.
평범한 인센티브 팀이었다.
파타야에서 둘째 날 산호섬을 가고 있었다.
산호섬을 가기 위해서는 스피드보트를 타야한다.
배낭족들은 천천히 가는 목선을 타기도 한다.
스피드 보트를 타고 한참을 잘 달리던 배가 갑자기 꽝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튕겨오르더니 180 도 회전하며 뒤집힌채 바닷물에 처박혔다.
몇몇 손님들은 충돌 순간에 바다에 빠져버렸고 일부는 뒤집힌 보트 안에서 기절해 버렸다.
어디선가 떠내려오던 통나무에 부딪친 배가 튕겨올라 뒤집혀버린 사고였다.
보트의 속도가 상당히 빨랐고 사람들이 타고 있어서 충돌의 데미지가 상당했다.
다행히 충돌이후 주위를 지나다니던 배들이 신속히 접근해서 사람들을 구조했다.
손님들은 모든 승선자가 빠짐없이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있어서 물에 곧바로 가라앉는 사람들은 한사람도 없었다.
병석이는 물에 빠지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았고 곧바로 손님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인원체크는 가이드의 습관이다.
인원을 체크하자 여자 손님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거꾸로 엎어져 있는 배 안쪽에 손님이 있다고 생각한
병석은 곧바로 구명조끼를 입은채로 철재난간을 잡고 물 속으로 들어가 배 안쪽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여자 손님 두명이 기절한채로 엎어진 배 안쪽 공간 안에 있었다.
잠시도 주저하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한손으로 정신을 잃고 있는 손님의 구명조끼를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배의 벽면쪽 철제난간을 잡고 심호흡을 한 다음 물속으로 손님을 끌어 내렸다.
큰 저항감없이 물속으로 끌려왔다.
1 미터 정도 끌어온 다음 손으로 난간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물 위로 떠오르자 배를 운행했던 태국인과 다른 배를 운행하던 태국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지체없이 손님들을 배 위로 끌어올리고 인공호흡을 시켰다. 만일 배의 옆면이 2미터만 되었어도 상당히 어려울 뻔 했다.
한 쪽으로 기울어졌던 배가 똑바로 엎어져 있었어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손님들은 곧 의식이 돌아왔고 손님들 전원이 신속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손님들이 비교적 중년층에 나이든 사람들이었으나 크게 다친 사람도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간 손님 한명이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사고 사실을 알렸고
일간스포츠 신문에 기사가 나왔다.
불의의 사고였지만 가이드의 침작하고 단호한 대처로인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가이드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투어 도중에 손님들이 다쳐서 병원에 가야할 때는 일단 손님들이 병원비를 내야한다.
병원비를 신용카드나 현금으로 결제를 하고 영수증을 받은 다음 한국에 돌아가서 여행자보험을 제공한 보험회사에 치료비를 청구해야 한다.
만일 가이드가 병원비를 대신 대납해준 경우라도 영수증은 손님의 이름으로 받아야 한다.
이런 경우가 실제로 있었다.
손님이 투어도중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돈도 없고 신용카드도 없었다.
치료비를 가이드가 내고 영수증을 받아서 손님에게 주었는데 손님이 한국에 돌아가서 보험회사에 청구하자 영수증이 손님의 이름이 아니라고 보험료 지급을 거부했다.
또 손님의 이름으로 영수증을 발급해 가도 손님이 차일피일 송금을 미루고 안해주면 태국에 살고있는 가이드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좀 냉정한 것 같지만 가이드로서는 병원비를 손님들이 지불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두번째는 버스사고 였다.
손님들을 태우고 달리던 버스가 길을 잘못들었다.
밤이 어두워진 때 였다.
길을 잘못들어선 버스 기사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모두 지쳐서 눈을 감고 있었고 병석이도 피곤이 몰려와 졸고 있었는데 공사중이던 굴다리를 통과하던 버스의 천장 부분이 굴다리 상판부를 지탱하는 H 빔의 끝부분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굉음이 터지고 버스의 천장쪽 두껑 절반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버스가 멈춰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다행히 손님 전원이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병석이가 상황을 챙기려고 벨트를 풀고 일어나려는데
온 몸이 몽둥이로 맞은듯이 축 늘어지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나 뒷쪽 손님들의 좌석으로 가서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지나가던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경찰차가 도착했고 뒤를 이어 병원의 엠블란스 차들이 몰려왔다.
손님들을 부축해서 병원차에 태우고 병원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구급차들을 먼저 보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구급차에 손님과 함께 탄 병석이는 가면서 방콕사무실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소장은 전화를 끊고 급히 차를 몰아 병원으로 달려왔다.
병원에 도착한 손님들은 각종 검사를 받고 방들을 배정받아 전원 입원을 시켰다.
이 사고에서도 손님들은 크게 다친 사람이 없었지만 병석이는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병석이는 태국에 와서 가이드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부터 돈을 많이 벌었고 특히 인센티브팀이 와서 행사가 끝나면 그 팀의 인솔자인 여행사 사장이 병석이를 자기의 다음 팀에서도 지정 가이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이드로서는 지정가이드를 지명 받는다는것이 행복한 일이기도 하고 열심히 일한 것에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기도 하여 기분이 좋은 일이다.
어느정도 수중에 돈이 모이고 있던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태국인으로부터 우연히 클럽을 하나 인수해서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홍대 앞 클럽들을 다녀본 사람들은 클럽의 분위기를 잘 알고있다고 본다.
사실 태국에서 한국인이 클럽을 운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런 제의를 받았고 병석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클럽을 총괄해서 운영해줄 지배인의 월급은 당시에 보통 삼사만바트였다.
지배인이 믿음직해 보이자 병석은 월급 십만바트를 제의했다.
충분히 줄테니 정직하게 운영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지배인은 진심으로 병석을 이해했고 전력을 다해 일해주기 시작했다.
초저녁에는 몇명의 디제이들이 출연하고 피크타임이 되면 삼사인조 밴드들이 나와서 라이브음악을 해주는 클럽이었다.
지배인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장난을 칠 수 있는 것이었다.
또 남자 여자 화장실 앞에 무인 콘돔 판매기의 수입을 모두 종업원들에게 줘버렸다.
그 두대의 무인 판매기에서 나오는 수입도 한달에 한국돈으로 이백만원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병석이는 매달 종업원들에게 월급에 더해 보너스를 얹어줬다.
태국 직원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런 사장을 만난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직원들 모두가 열심히 일하고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나갔다.
그러니 장사가 잘되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병석이가 클럽을 운영할 때 평균적인 수입은 월 백만바트 (삼천오백만원) 정도였다.
가이드를 하지 않아도 충분했지만 병석이는 가이드도 병행하며 일했다.
가이드가 돈에 절박하면 가이드 일을 여유있게 잘하기 어렵다.
말과 행동의 어느 곳에선가 부자연스럽고 돈에 연연하는듯한 인상을 풍기게 되고 그것은 가이드에 대한 손님들의 신뢰를 무너트리는 이유가 된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자 병석이는 가이드를 나가서도 여유가 흘러 넘쳤다.
그렇게 되면 팀이 잘풀리게 되어있다.
가이드가 한번 상승곡선을 탈때는 계속해서 팀이 잘 풀리고 돈도 많이 버는데 돈을 벌면 여유가 생기고 여유있게 팀을 행사하면 또 다시 돈이 잘 벌리는 선순환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팀이 안풀리고 돈이 없어지면 돈에 연연한듯한 모습이 보여지고 그러면 손님들은 사려고 했던 물건도 안사고 지갑을 닫아버린다.
가이드는 더더욱 힘든 상황에 몰리게되고 더욱 조급한 마음으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몇팀을 하게되면 가이드를 그만둬야할까 계속해야할까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가이드가 가이드 일을 그만두게 될 때가 바로 이럴 때이다.
가이드는 누구나 한 두번 다운 곡선을 그릴 때가 있다 .
그 시기를 잘 견디면 반드시 상승 곡선을 탈 때가 있다.
상승곡선을 잘타면 누구나 인정받는 일류 가이드가 될 수 있다.
코로나의 기나긴 터널을 힘들게 보내고 있는 병석이는 이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오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여행업에 몸담고 있는 모두의 소원이기도 하다.
병석이는 앞으로 잘 될 사람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늘 긍정적이고 항상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한명의 태국을 좋아했던 세상을 떠난 친구의 이야기다.
이 친구는 부자였다.
마음도 부자였고 물질적으로도 부자였고 무엇보다도 더 영적으로도 부자였다.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중에도 ㅡ굿모닝 살로만 치킨ㅡ 이라는 회사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대한민국 프렌차이즈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가장 크게 성공하여 창업자가 단 몇개월만에 수십억원의 현금을 손에 쥐었고 그 후 많은 프렌차이즈 사업자들에게 롤 모델이 되기도 했던 실제 사례이다.
창업자는 나의 고향 친구였다. 그 스토리를 써보기로 한다.
친구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인정이 많았고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했다.
그것이 도를 지나쳐서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때도 많았다.
친구의 이름은 안상진 이다.
전라남도 지도 초등학교 교장을 지내셨던 친구의 아버님은 소탈하시고 쾌활한 분이셨다.
그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친구는 늘 유쾌하고 밝은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시골 초등학교 교육자 집안이었으므로 이 친구가 태어날 때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이 친구가 갑자기 경제적으로 부자가 되어버린 이야기는 참 드라마틱하고 현실 세계에서 드믈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였다.
군대에 다녀와서 서울로 올라온 친구는 시멘트 벽돌 공장을 운영하던 매형의 소개로 일자리를 얻었는데 다름아닌 한강의 모래를 퍼내는 곳에서 덤프트럭들이 모래를 싣고 나갈 때 전표를 받는 일이었다.
당시의 전두환 대통령이 염보현 서울 시장에게 지시해서 '한강정비사업' 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 때만 해도 한강은 수위가 낮았다. 강바닥에 엄청난 모래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모래를 퍼올리고 강변쪽을 정비해서 도로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터로 가서 시키는대로 덤프트럭들이 모래를 싣고 나갈 때마다 전표를 받는 일을 막 시작한 친구에게 한 덤프트럭 기사가 일 끝나고 만나자는 제안을 해왔다.
일이 끝나고 약속 장소로 가는 친구는 뭔가모를 압박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 장소에 가보니 하룻동안에 낯익은 기사들이 여러명 앉아 있었다.
자기들을 전체 트럭기사들의 대표라고 소개하던 한 사람은 자기들과 함께 전표를 받고 실어나가는 모래의 삼분의 일 정도를 빼돌리는 부정행위에 가담 할 것을 제의했다.
당장 내일부터는 전표를 끊지 않고 트럭들이 나가도 눈감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 댓가로 트럭 한대당 얼마의 돈을 계산해서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제안을 하면서 이곳을 경비하고 있는 경비원들과 일부 본사의 직원들까지 다 알고 참여하는 중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경비원들이 깡패들이라는 것은 척 봐도 알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미 모든 커넥션이 엮여 있었고 손을 잡느냐 거부하느냐의 결정을 해야했다.
친구는 신속히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해야했다.
아무리 사장이 직접 임명한 자리라고는 해도 그 제안을 거절하고서는 그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했다.
몇 분의 시간이 어색하게 흐르고 친구의 입에서는 그렇게 협조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렇게 한강 골재사업의 한복판에서 일년정도 일을 하고보니 상당한 돈이 수중에 들어왔다.
골재 사업장을 떠난 친구는 동대문 시장에서 의류 사업을 하기 시작했고 사업은 무난하게 잘 되어갔다.
골재 채취장에서 일을 할 때부터 친구의 돈 씀씀이는 남 달랐다.
고향에서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이 찾아 오면 모든 접대 비용을 아끼지 않았고 헤어질 때는 손에 여비까지 쥐어주었다.
비록 떳떳하게 버는 돈은 아니었지만 쓰는 것 만큼은 잘 썼다.
모든것이 잘 풀려나갔고 좋은 아내도 얻었고 두 명의 딸까지 얻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가만보면 공통점이 있다.
좋은 일이 생길려고 할 때는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나쁜 일들이 생기기 전에는 반드시 나쁜 사람들이 꼬여든다.
친구도 이 원칙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꼭 그대로 되었다.
1980년대 후반의 어느 날
오랬만에 친구를 만났더니 난데없는 아파트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말을 했다.
강원도 강릉에 어떤 건설업자가 아파트를 건설하다가 자금이 모자라자 은행에서 돈을 빌렸고 그래도 돈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채권자들에게 약속된 날짜에 돈을 갚아나가지 못하자 채권자들은 이 건설업자를 사기죄를 씌워 고소했다.
건설업자는 구속이 되었고 아파트는 마무리 공사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한마디로 엉망으로 꼬여버린 아파트 분양사업을 몇명의 건설브로커들이 내 친구에게 가져와서 들이밀었고 사람 좋은 친구는 덥썩 물어버렸다.
그리고 끝날듯 끝날듯 끝나지 않는 사건의 미로 속으로 빠져버렸다.
불과 일 이억원이면 구속된 건설업자도 살리고 집을 분양받은 분양자들에게도 내집 마련의 꿈을 이뤄주고 공사하는 건설업자들도 공사를 마무리짓고 돈을 받아 모두가 윈윈하는 꿈을 심어주었던 건설 브로커들의 달콤한 제의는 처음부터 사건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게 만들었으나 실제는 그렇게 쉽게 풀릴 사업이 아니었다.
업무추진비 명목으로 끝도없이 돈을 가져다 쓰면서도 뭐 하나 속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없었다.
일을 풀어낸다는 브로커들은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고 친구는 의류사업을 하던 가게를 팔고 살던 집까지 팔아서 돈을 풀기 시작했으나 끝내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고 말았다.
아차! 하고 깨닿는 때는 너무 늦은 경우가 많다.
건설브로커 몇명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때는 어두컴컴하게 늦은 겨울의 초입이었다.
브로커들을 차에 태우고 백사장에 간 친구가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뭔가 직감적으로 눈치를 챈 브로커들도 말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친구는 별명이 두개가 있다.
하나는 '뺑코 '라는 별명이다.
또 하나의 별명은 '안장사 '이다.
씨름으로는 져본 적이 없을만큼 굉장한 뚝심을 갖고 있었다.
브로커 몇명을 들어서 패대기 치는것은 일도 아니었다.
친구가 브로커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들의 소위 아파트 사업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될 수도 없는 사업을 가져와서 지금까지 나를 현혹시키고 돈만쓰게 했지 않느냐 하고 다그쳤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한마디 해보라고 해도 모두들 변명 한마디 못했다.
벌벌떠는 브로커들에게 앞으로는 이따위로 살지 말라고 한마디 던지고 그 길로 모든것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그렇게 가진 재산을 몽땅 다 날린 친구는 서울에서 택시 운전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지만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과 두 딸을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택시 운전기사로 무리를 거듭하다가 건강을 돌보지 못해 신장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친구는 택시 운전기사직을 몇년하다가 그만두고 또 다시 이런저런 사업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기적같은 일이 찾아왔다.
구리시에서 아주 조그만 치킨가게를 열었는데 아주 잘되었다.
닭고기에서 뼈를 다 제거하고 살로만 치킨을 만들었다.
닭고기에 대해서 별다른 지식도 없이 시작한 사업이 잘되자 2호점을 만들었고 얼마 후 3호점도 열었다.
닭에서 뼈를 제거하는 일이 굉장히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렸으나 머지않아 외국에서는 원하는 부위만 주문해서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하는 만큼의 닭다리 살을 수입해서 공급해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미국에는 세계최대의 닭고기 수출 회사가 있었다. 회사의 이름은 '타이손' 이었다.
그 사람은 그 당시에 자기의 티코 승용차에 마장동에서 돼지 내장을 사다가 순대국집에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해서 프랜차이즈 사업의 깃발을 올리게 되었다.
가맹비는 999만원 이었다.
본사에서는 간판과 냉장고와 튀김기 그리고 광고물품을 지원하고 각 브런치에서는 가게가 크든 작든 인테리어를 자율적으로 하면 되었다.
주로 배달 위주의 영업을 하고 치킨점에 와서 먹는 사람은 그대로 먹고가게 만들었다.
친구가 뭔가 성공가능성이 큰 사업을 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자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서로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해서
프렌차이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신문에 크게 광고가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참 일에 몰두하고 있는 친구에게 모 방송국 피디가 한명 찾아왔다.
IMF 경제상황에 맞는 누구나 손쉽게 창업할 수 있는 사업모델로서 굿모닝 살로만치킨이 선정되었으니 방송촬영에 협조하시라는 제안이었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티브이 방송광고비가 얼마나 비싼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자기네 방송사에 광고를 한 적도 없는 신생 회사에 와서 왜 이 사업을하면 좋은지를 30분이나 방송으로 내보낸 것이다.
방송이 나가자 프린차이즈 신청 전화통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서 지점개설 문의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통장에 돈부터 입금하고 전화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돼지 내장을 팔러 돌아다니던 사람은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자해서 무역회사를 만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타이손사에서 수백톤 규모의 닭고기를 주문했다.
간판을 만드는 회사와 냉장고를 만드는 회사도 철야작업에 들어갔고 사무실은 구리에서 서울 강동구로 옮겨왔다.
사무실에 직원들이 폭팔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문제가 모두의 눈 앞에 닥쳤다.
갑자기 늘어나버린 수 백군데의 지점에 닭고기를 공급할 닭고기 처리공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들어오는 닭고기는 냉동컨테이너에 실려온다.
그 냉동된 닭고기를 그대로 전국의 지점에 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딘가에 큰 공장을 차리고 큰 냉수통을 만들어서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닭고기를 해동시키고 물기를 제거하고 5키로 단위로 포장을 다시해서 각 지점에 공급해야 했다.
공장을 짓고 모든 설비를 다 구축하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수 개월의 시간은 필요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친 것이다.
친구의 사업에 동참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던 후배 한명이 곤지암으로 차를 몰고 내려와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공장부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곤지암 정도면 주로 수도권에 많이 모여있는 지점들에 배송가기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물색하고 다니던 후배는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 구멍가게 옆에 차를 세웠는데 생수 한병을 마시면서 보니 저만치에 부동산 사무실 간판이 하나 보였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저곳까지 들르자 하고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무실에는 나이드신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다.
찾고있는 공장부지가 있는지 쭉 설명을 마치자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사무실을 나서며 따라오라고 했다.
친구가 차를 운전하고 얼마간 이동하자 공장이 보였다.
열쇠로 문을 열고 공장을 둘러보라는 부동산 할아버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서 안쪽을 살펴보던 후배는 큰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살로만치킨 간판만 내걸면 완벽하게 들어맞는 닭고기 처리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시설을 다 만들어놓고 사업을 접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도 사용해보지도 못한채 고스란히 모든 시설과 장비가 구비된채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애써 태연하게 표정관리에 들어간 후배가 공장 임대료를 물었다.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이백만원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보통때 같으면 어림도없는 가격이지만 IMF에 누가 쓰겠느냐는 말이었다.
계약기간 이년을 오년으로 늘려달라는 후배의 요청을 받은 공장주인은 쾌히 승낙했다.
그날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고 곧바로 계약을 해버린 후배는 회사의 일등공신이 되어버렸다.
잘되는 사람은 어떻게 풀려서라도 잘되고 만다.
회사는 공장이 생기자마자 모든 일들이 막힘없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에서 막 출고된 새 차들이 굿모닝살로만치킨 이라는 로고를 새기고 지점들에 치킨을 싣고 배송을 나가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몇달만에 약 700곳으로 늘어났다.
친구는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수십억원의 돈이 합법적으로 통장에 들어왔고 매일매일 수천만원이 계속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잘나가던 살로만치킨도 이후 사업을 중국으로 확장하려고 투자했으나 실패하였고 수 년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국투자 실패는 중국이 어떤 곳인지 몰랐던 무지에서 나온 멍청한 생각을 밀어부친 결과였다.
회사를 믿을만한 친구에게 맡겨 대리경영을 시켰으나 문제는 경영을 맡을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맡긴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만일 이때 능력있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경영을 맡겼다면 회사는 엄청나게 커졌을 것이다.
그랬어도 죽기까지 부족함이 없을만큼의 재산은 남아있었다.
돈이 들어와서 살만해지자 신장병이 심해지고 결국 부인의 신장제공을 받아 수술을 했던 친구는 매일같이 한 웅큼씩의 약을 입에 달고 살아야했고 육년전 쯤 세상을 떠났다.
친구가 병석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백병원에서 입원을 했던 친구는 막상 원했던 돈을 갖게 되었으나 건강을 잃고보니 돈도 별거 아니라고 했다.
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기를 즐겨했고 신앙생활을 잘했고 늘 주위에 즐거움을 주었던 친구가 막상 세상을 떠나니 아쉬움이 크다.
생긴 꼴이 두꺼비 상이었던 친구는 자기 생긴 꼴대로 부자로 살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나누어 주는 법도 알았다.
사람이 한번 세상에 오면 가는 것도 당연하다.
영원히 살 것처럼 해도 때가 되면 갈 수밖에 없는것이 인생이다.
얼마를 가졌고 얼마를 남겨놓고 죽었느냐를 따지는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 남을 위해서 얼마만큼 시간과 가진것을 사용했느냐가 중요하다.
친구는 태국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태국 사람들이 소탈하게 보이고 겸손하게 보인다고 했다.
한번은 방콕에서 자기의 종교집회에 가기 위해서 실롬거리에 나왔는데 장소를 못찾고 헤매다가 자기 가방에서 잡지를 한부 손에 꺼내들고 높이 처들고 있었다.
혹시 누군가 같은 교인이 지나다가 잡지를 보면 자기를 집회장소로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같은 시간에 어떤 외국여자분이 집회장소를 가다가 구두 뒤굽이 부러져버렸다. 그 지역을 잘 알고있던 여자는 한블럭만 걸어가면 구두 수선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회를 보는동안 구두굽을 수선하려고 한블럭을 넘어오다가 한국인 한명이 손에 잡지를 높이들고 있는것을 보았다.
그렇게 만난 두사람은 늦지않게 집회에 참석했고 집회가 끝난 후 즐거운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여자분의 구두굽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친구는 그날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은 필연과 우연이 교차되어 나타나는 무대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은 우연도 있지만 큰 사건으로 번져가는 우연도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 온전히 해석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어린이가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조그만 노력이 큰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성공이 눈 앞에 온 듯 하여도 이상하게 끝마무리가 되지 않아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친구의 성공스토리는 사실상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기 힘든 기적같은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궁금증이 많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해석이 안될 때마다 궁금증이 생긴다.
푸틴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쟁을 하는 것 같은데 왜 젊은 군인들이 죽어야 하고 죄없는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 하는 탄식이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