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시장 반찬가게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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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시장 반찬가게 할머니...

필리핀 9 1141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골목 시장이 있다.

사람 두어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가기에도 벅찬 골목에

두부와 콩나물을 함께 파는 청과물 좌판 몇과

반찬가게 서너 군데가 그 골목시장의 전부이다.

짐작컨대 예전에는 제법 그럴듯한 시장이 있었을 텐데

도심 개발로 이리 밀리고 저리 쫓겨난 끝에 지금처럼 작아졌으리라.

 

그 골목의 좌판을 지키고 있는 분들은

60이 훌쩍 넘은 백발의 할머니가 대부분이다.

그 할머니들은 어쩌면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년의 외로움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그 골목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가끔 두부나 콩나물이나 김치 따위를 사기 위해 그 골목 시장에 갔다.

비슷한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지라

누가 어느 가게에서 무엇을 사는지 할머니들은 훤히 꿰차고 있었다.

두부나 콩나물은 이집 저집에서 번갈아 사는 것으로써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 골목시장의 평화(?)에 기여했다.

그런데 김치의 경우는 반찬가게마다 손맛이 확실하게 다르므로

내 입맛에 끌리는 집으로만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단골로 가는 반찬가게 할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처럼 등이 몹시 휜 분이었다.

그분은 내가 갈 때마다 김치 값을 다르게 말했다.

어떤 때는 1킬로에 5천원이었고 어떤 때는 1킬로에 7천원이었다.

김치도 늘 내가 주문한 양보다 훨씬 많이 담아주었으며

어떤 때는 새로 만든 반찬이라면서 맛보라고 한 봉지씩 건네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돈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올 여름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무렵,

여느 때처럼 골목시장에 갔는데 내 단골 반찬가게의 문이 닫혀 있었다.

옆집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더위를 자셨는지 몸이 편찮아서 며칠 쉰다고 했단다.

주인 없는 반찬가게의 진열장 안에서는 김치가 푹푹 익어가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모처럼 만에 26일 동안의 장기여행을 떠났다가

지난 919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전, 김치를 사기 위해 골목시장으로 갔다.

그런데... 내 단골 반찬가게는 여전히 문이 닫혀 있었다.

문만 닫혀 있는 게 아니라 반찬 진열장이 싹 치워져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잠시 쉬는 게 아니라

어디로 이사를 했거나 아예 장사를 그만 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이 되어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반찬가게에 가지 못하고 있다.

아니, 골목시장 자체를 가지 못하고 있다.

옆 가게 할머니에게 물어보면 반찬가게 할머니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가 나를 알아보고 그 할머니의 소식을 알려줄까 두렵기마저 했다.

그래서 그 골목시장에를 다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반찬가게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과 감칠맛 나는 김치를

그리워만 하고 있는 것이다...

9 Comments
참새하루 2015.10.01 12:42  
매일 만나던 이웃이, 친구가, 사회의 지인이
어느날  문득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 소식을 들으면

실감나지 않고 멍해집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하지만 이런게 인생이고 인연이겠지요

날씨 좋은날 가게 앞에 향불이라도
한개 피워드리면
국화꽃 한송이라도 놓아드리면
마음이 편해지실겁니다

고통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
필리핀 2015.10.01 15:24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걸 보면,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하는 걸 절감하게 되더군요...
깔깔마녀 2015.10.01 14:25  
무탈하실거에요. 
19일에 한국으로 돌아가셨군요.
동해에 모여 계시던 날이 그 전날인가 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필리핀 2015.10.01 15:25  
깔깔님은 아직도 태국이신가요?

부러워요... ^^;;;
어랍쇼 2015.10.01 16:14  
오셨군요~^^

요새 태사랑이 되게 뒤숭숭하고 짜증나는 글들이 많았는데..
글 좋으네요..
왠지 가슴 찡해지면서도 쓸쓸한 얘기네요..
마치 오늘 날씨처럼....
필리핀 2015.10.01 16:28  
랍쇼님도 잘 지내셨죠? ^^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음이 스산해져서 그 할머니를 추억해보았습니다...
rladbsk 2015.10.01 18:09  
할머니께서

여행을 떠나셨나 봅니다...
Funnyj 2015.10.01 19:44  
저 역시 돈없던 고등학교 시절 더 주시던 포장마차 떡복이집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군대 휴가때도 찾아뵈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넉넉히 퍼주시던 할머님이 셨는데…

유학가기전 인사드리러 갔을 때에도 한국음식 그리울거라며 다 먹은 후에도 공짜로 더 싸주셨었는데...
유학을 다녀온 이후 형님과 비슷한 이유로 그 자리를 선뜻 가지 못하겠더라고요…


평생 고생하시며 살으셨는데…이젠 좋은 곳에서 편히 계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필리핀 2015.10.01 19:50  
퍼니님도 가슴에 많은 사연을 품고 살아왔군요...

조만간 방콕 하늘 아래에서 서로의 사연을 안주 삼아

한잔 기울일 날이 오기를 기대할게요...

한인타운에서는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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