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 비교!!!! 태봉의 궁예 대왕과 태국의 딱신 대왕 - 백성을 사랑했던 비운의 대왕

홈 > 커뮤니티 > 그냥암꺼나
그냥암꺼나
- 예의를 지켜주세요 / 여행관련 질문은 묻고답하기에 / 연애·태국인출입국관련 글 금지

- 국내외 정치사회(이슈,문제)등과 관련된 글은 정치/사회 게시판에 

그냥암꺼나2

전격 비교!!!! 태봉의 궁예 대왕과 태국의 딱신 대왕 - 백성을 사랑했던 비운의 대왕

6 1039

애꾸눈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던 궁예는 봉건 귀족 연합의 우두머리인 왕건에 의해 제거되었다.


b2f95e447474be374981bdaed871930ce2f73d4c.jpeg[경기도 안성시 칠장사의 궁예 벽화]


톤부리 왕조의 딱신 대왕 역시 기존 아유타야왕조의 봉건 귀족 세력의 우두머리 짜끄리에게 죽음을 당하게 된다.


6183f4f587b656c760d1a7b38733019e399b519e.jpeg

[로마 국립 박물관 소장 딱신의 초상화]


궁예 대왕과 딱신 대왕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먼저, 첫번째로 둘 다 탁월한 정복 군주였다. 


궁예는 몰락해가는 신라 말기에 자신이 모시던 주군 양길에게서 독립하여 지금의 원주 땅에 자리를 잡은 후 순식간에 한반도 중심을 장악하였다. 궁예의 정복 활동 중 상당수는 왕건이 했다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 최근 상당수 밝혀졌다(왕건의 치적으로 알려진 나주 경락 등).

048870e7b085a5c53a32605d82b3b5b4cab5c0a3.png[후삼국시대의 지도. 진한 빨강이 태봉]


딱신의 정복 군주로서의 업적은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 받고 있다.


버마에 의해 아유타야 왕조가 무너진 이후(1767년)의 혼란기를 1년만에 평정하고 1768년 지금의 방콕 서안에 톤부리 왕조를 열었다. 그 후 서쪽의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남쪽의 말레이 반도로 진출했으며 1776년에는 숙원이었던 치앙마이의 란나왕조를 복속시켰다. 그리고 1778년에는 라오스의 비엔티안을 점령하여 에머랄드 불상을 톤부리로 가져왔다.


현재의 태국 영토는 거의 대부분 딱신 대왕의 치세에 완성되었다.

f8a686947a3431390b2f342b38ee398c8789d724.png[18세기 톤부리 왕조 최대 영역]


두번째, 궁예 대왕과 딱신 대왕은 종교 개혁가였으나 그 때문에 미쳤다는 오욕을 뒤집어 쓰고 축출되었다.


궁예 대왕은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자처하며 정신 착란에 빠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전남 강진군 무위사에 있는 선각대사비문 참조).

cb419ccd06c61eeef96dd047045c45a2fdbe8aae.jpg[궁예 대왕의 업적이 기록된 선각대사비]


궁예 대왕의 종교는 한마디로 미륵정토 사상이다. 미륵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사후에 나타나는 마지막 부처로 사바 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이다. 미륵불은 사회가 극도로 혼란할 때 나타나 현실 사회를 개혁하고 마침내 이상 사회인 극락정토를 현세에 실현하는 부처이다.


신라말 왕권은 약화되고 지방 호족의 힘은 더 커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여기저기서 도적이 출몰하고 사병을 일으켜 서로 땅을 뺏고 뺏기는 전국 시대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철원을 중심으로한 지역에서는 미륵신앙이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


궁예는 바로 이런 철원에 수도를 두면서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했고 신라 불교의 개혁을 추진한다. 


한국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는데 교종은 한마디로 공부하는 종교이다. 경전을 연구하며 부처님의 참뜻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다. 교종은 대부분 왕실과 귀족의 지지를 받았으며 교종의 승려는 학식이 높고 오랫동안 학문에 정진하였다. 선종은 반대로 참선을 중요시하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경전을 읽을 필요가 없이 요리하는 사람은 요리하다가 부처가 되고, 청소하는 사람은 청소하다가 진리를 깨쳐 부처가 되고, 무술하는 사람은 몸을 단련한 끝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라말 불교계의 주류는 교종이었다. 이에 궁예는 미륵정토를 내세우며 선종의 승려들을 우대하면 부패한 신라의 불교 문화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딱신 대왕도 스스로를 수다원(須陀洹, Sotapanna)으로 칭했다. 


테라바다불교(상좌부 불교, 소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의 네가지 계위 중 가장 첫번째 단계를 수다원(須陀洹, Sotapanna)이라고 한다.

딱신 대왕은 스스로 수행하여 깨달음의 길로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버마의 침공 후 불교는 쇠퇴하고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원이 소유한 거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은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태국 북부의 승려들은 그 자체가 권력이 되어 봉건 영주처럼 군대를 갖고 해당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Sakwangburi 지역의 짜오파 퐝).


딱신 대왕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참선과 명상을 중요시했다. 


당시 부패한 권력 기관이 되어버린 사원과 승려들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번째, 중앙집권화를 꿈꾸는 개혁 군주였다.


궁예 대왕은 지방 호족들의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점차 중앙 정부로 이전하고 있었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호족과 그 일족에게는 세금을 많이 거두어 들였으나 소규모 자영농에게는 세금을 면제하는 등 농민 우선 정책을 펼쳤다. 

중앙의 왕과 지방의 호족에게 이중으로 착취를 당하던 농민들은 당연히 궁예의 정책을 열렬히 환영했지만 호족들은 자신의 권력의 기반이었던 토지를 중앙 정부에게 뺏기지 않으려 하였다.


이에 가장 강성한 개경 지방의 호족이었던 왕건 무리를 필두로 해서 궁예 대왕에 대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왕건은 집권하자마자 궁예 대왕의 세금 제도를 폐지하고 대토지 소유주들에게 유리하게 제도를 바꾸었다.

왕건은 집권 후 29번의 결혼을 통해 지방 호족과의 유대를 강화하였고 고려 시대는 지방 호족이 사병을 가질 수 있는 반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갖게 되었다.




딱신 대왕은 그 당시까지 전무후무한 왕이었다.


백성들을 그를 왕이 아닌 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딱신 대왕은 자신을 신이 아니고 왕도 아닌 도시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민중들을 만났다. 이전의 왕들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를 겁내 결코 백성들 앞에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딱신은 거리에서 백성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눈과 자신의 귀로 백성들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 자신이 가진 금을 네번에 걸쳐 내놓았고 대포를 녹여서 팔아 쌀을 사왔다.


쌀이 부족할 때는 자신의 돈으로 웃돈을 주고 수입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는등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한편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민들을 이주시키면서 식량 사정 개선에 힘을 쏟았다.


딱신 대왕의 급진적인 중앙집권화 정책은 기존 지배 계급인 귀족과 승려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서 내려오게 된다.


딱신의 오른팔이었던 짜끄리 장군은 원정길에 나섰다가 원정을 취소하고 수도로 복귀하여 쿠데타 세력을 몰아낸 다음 딱신 대왕을 처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라마1세가 된다. 이 짜끄리 왕조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짜끄리 장군의 왕권 찬탈과 딱신 대왕의 처형을 정당화하기 위해 딱신 대왕은 미치광이가 되어버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태국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딱신 대왕을 전무후무한 새로운 계급 출신의 왕으로 보고 있다. 1932년 시암 혁명(입헌 군주제 혁명) 이전까지 딱신 대왕은 전혀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1932년 이후 딱신 대왕은 다시 영웅으로 받아들여졌고 1981년에 이르러 태국 내각은 딱신을 대왕(Great King)으로 추대했다.




궁예 대왕과 딱신 대왕은 정권을 잡는 과정과 정복 군주로서 보여준 탁월한 지도력, 중앙집권화를 꿈꾸는 개혁 군주로서의 역할, 그리고 종교 개혁가로서의 면까지 너무나 닮아 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오른팔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는 비극적인 종말까지도 닮아 있다. 그러했기 때문에 말년에 미쳐버렸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것까지도 마치 두 사람이 아닌 듯 여겨지기까지 한다.


승리한 자들의 기록인 역사에서 패자의 진짜 얼굴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궁예 대왕과 딱신 대왕의 화려한 복권을 꿈꿔 본다.

6 Comments
깨몽™ 2022.10.26 19:44  
흥미로운 글이네요.
'그냥 암꺼나' 게시판에 묻혀 있기는 좀 아깝습니다. ^^
2022.10.26 20:22  
[@깨몽™] 칭찬 감사드립니다.
고구마 2022.10.26 23:06  
뭔가 비통함이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죽임을 당하고  사후에는 오도되고...ㅠㅠ
2022.10.27 03:09  
[@고구마] 그래도 딱신 대왕은 태국의 5대 대왕(쑤코타이의 람캄행 대왕, 아유타야의 나레쑤언 대왕, 나라이 대왕. 톤부리의 딱씬 대왕. 현왕조의 라마 5세 쭐랄롱껀 대왕)에 뒤늦게라도 올랐지만 궁예 대왕은 아직도 김영철의 관심법 연기로밖에 기억되지 않는 정말 비운의 왕입니다.

요즘 들어서 궁예 대왕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조금씩 나오면서 새롭게 조명되는 부분이 있지만요. 위에서 언급한 내용도 다 그런 논문을 보고 쓴 이야기들입니다.
역마살아저씨 2022.11.01 17:34  
다른 사례로 이성계와 고려 말 역사도 있죠..  이성계와 쓰레기 유학자들이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걸 합리화 하기 위해  고려 말의 상황을 나쁘게만 묘사했습니다.  왜구와 홍건적으로 혼란했지만 그래도 20만 강병을 보유하고 그 군사들을 유지할 경제력을 가진 대국이었습니다. 그런 대국을 상비군 몇천명 겨우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하고 십만양병설 가지고 갑론을박 하던 약소국 체제로 만든 게  이성계 조선이었으니 고려를 지속적으로 폄하하는 사관을 유지한 거죠.  왕은 왕 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백성은 백성답게 살자는  공자맹자 말 자체는 틀린 게 아닌데 선비는 귀족답고 노비는 노예답고 백성은 상놈답게 살아야 한다는 걸로 변형시켜 자기를 추종해 역성혁명을 일으킨 유학 사대부들에게 특혜를 줘서 귀족층으로 이끈 조선왕조 때문에  고려 전성기  40만 상비군 동원능력에 거란 송 고려 동북아시아 3대강국체제까지 만든 민족이 이후론 한반도 내로 쪼그라들었으니까요.  조선시대에 고려역사를 제대로 쓰면  120개월치 월급만 해방비용으로 내면 노비신분에서 해방되고  이후론 관직을 얻을 수도 있고 심지어 정승까지 간 노비도 두명이나 나왔던 제도라 인구 3% 정도만 노비였던 고려와 부모중 한쪽이 노비면 자식은 자동노비고  죽기직전까지 노비로 살다보니 말기엔 인구 40% 이상이 노비가 된 조선의 신분제가 흔들릴 테고  벽란도에 이슬람 상인이 출몰하고  로마시대 길과 몽골의 역참제도처럼  전국에 도로를 깔고  도로마다 휴게소처럼 관영 민영 숙소 식당 거점지가 80개가 생기며 물류유통과 투자에 기초한  화폐경제로 재정수입이 충분해  수십만 직업군인을 유지하고 간척지 개간이 활성화되어  쌀 생산마저도 조선시대의 2배가 넘던 고려와 원시적 물물교환 경제로 퇴보한 조선이 너무나 비교되니 고려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22.11.01 20:04  
[@역마살아저씨] 노비 문제, 무역, 군사력 등등 고려가 조선에 비해 나았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특히 세종이 만든 노비종모법에 의해 노비가 낳은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어 결국 백성 중 반이 노비가 되어버린 어이없는 노비 정책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성계의 역성 혁명 이후 조선은 고려사를 쓰면서 고려를 폄훼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 승자의 기록을 제대로 다시 읽어내는 것이 역사학자들이라면 우리는 제대로된 역사학자를 한명도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