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산 로드 -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다섯 장의 사진을 펼쳐 놓고 있다. 모두 4명의 얼굴, 3장엔 한 사람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담겨있고 두 장 속에는 모두 세 사람이 웃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은 Aon이라는 단순한 이름을 가진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다. 그는 태국식 꼰머리를 하고 있는 화가다. 그렇게 크지 않은 동남아인들에 비해 그는 커서 180이 넘는다. 그가 그 큰 키를 다 펴 보일 때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인 화구들을 챙겨 자리를 뜰 때밖에 없다. 하지만 Aon이 화구를 챙겨 카오산 로드를 들어서는 모습을 불행하게도 나는 본 적이 없다.
(왼쪽이 Aon, 카오산로드)
카오산로드는 먼저 향기가 낯설다. 태국음식을 맛본 사람이라면 그 향기에서 달착지근한 맛도 같이 느끼겠지만 거기서 처음부터 신비의 약초 같은 것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식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향기, 그 향기에 매혹되어버린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은 태국이라는 나라를 벗어나지 않고는 카오산로드도 벗지 못하는데 음식점엘 가도 찻집엘 가도 생맥주집엘 들어가도 그 향기는 따라다닌다.
문화적 색채가 아주 다르긴 하지만 우리의 인사동 메인도로와 비슷한 길이와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카오산로드는 메인도로를 중심으로 가로로 많은 길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길은 길로 또 연결되기 마련이어서 이를테면 Aon이 1번 도로로 빠지는 모습을 보고 1번 도로를 쫓아간다 해도 어느새 그는 메인도로에 있기 십상이고 2번 도로에 있겠거니 생각하여 미리 2번 도로의 입구를 지키고 있다 해도 그가 나올 곳이 반드시 2번 도로라는 보장도 없다.
번호가 매겨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 골목을 걸어다니다 보면 메인도로 만큼이나 넓기도 하고 다른 골목들과는 달리 제법 비싼 보드까지 깔려 있지만 묘한 향기와 함께 어두운 색채, 그리고 뭔가가 풀렸지만 풀린 그것이 자유는 아닌 이상한 골목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골목, 마의 길로 들어서면 향기보다는 냄새, 냄새도 고약한 종류의 어떤 것이 먼저 사로잡는다. 그러나 몇 걸음 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면 이것과 저것과 그것과 다른 것과 또 다른 어떤 것이 마구 뒤섞인 잡스럽고도 이상스런 향기가 발길을 멈칫거리게 하는데 그것은 모종의 공포까지도 불러일으킨다.
그 뿐인가.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앉아있는 낯선 표정의 얼굴들은 어떤가. 그들은 물건을 판매하는 주인 같지 않다. 설사 그가 주인이라 해도 주인인지 손님인지 알 수도 없지만 그 골목의 사람들은 걷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해방의 자세로 노출, 혹은 방관하고 있다. 동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눈빛도 받을 때가 있긴 하지만 찰라적인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마는 깊고 깊은 어두움 때문에 죄를 지은 듯한 느낌도 들 때가 있다.
이미 들어선 길은 발길을 쉬 돌리게 하지 않는 법이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이어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른 길로 향로를 바꾸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내처 걷다 보면 낯선 그것들이 낯설지 않게 되고 오히려 자신의 가장 내면에 숨겨져 있던 어떤 것, 배반이란 것을 결코 모를 가장 깊은 어떤 것과 만난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끼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면 밥 말리의 초상화가 담긴 티셔츠도 눈에 들어오겠지만 그런 따위의 문화적 충격은 잠시. 지상에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이상한 냄새와 색채,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생의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는 느낌마저 드니 그래서 또 한번 경악을 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 골목을 몇 번 들어가 보았는데 그것은 악몽과 절규였다. 그러나 그것을 느낄 무렵이면 골목은 끝나 버리곤 했었다. 다른 길, 다른 세상, 무질서와 부조화와 소음의 햇살천지인 대로가 열렸던 것이다. 꼼꼼히 들여다 볼 여력도 시간도 없긴 했지만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은 마의 골목이 아니라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는 바깥세상의 메인도로였다.
아리와 원이는 그 밤이 새도록 작은 읍을 몇 바퀴 돌았는데 화가 난 아리가 많지도 않은 자신의 전부인 옷을 버리고 말았다. 원이도 화를 참지 못해 아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쌍둥이 가방을 빼앗아 버려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아리는 옷가지를 찾으러 나서고 원이도 가방을 찾으러 나섰는데 밤에는 눈 감고도 찾을 수 있겠던 성당 앞의 다방, 그 사이의 편의점, 그 옆 골목 중 고장난 에어콘이 놓인 자리, 거기서 해변가로 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노란 애드벌룬 맞은 편 공터 옆의 풀숲이 왜 그렇게도 많던지 밤 사이에 세포분열한 읍은 정말이지 왕성한 생명력을 징그럽고 끔찍하게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Aon의 우울하지만 수려한 얼굴을 자세히 담아두려고 몇 번이나 셔터를 눌렀지만 그럴수록 초점이 맞지 않아 애를 먹어야 했다. 돌아와 사진을 보냈지만 답장도 없기에 그와 만나기만을 고대하며 메신저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니 어느 날 그가 접속하였다. Aon, It' Me, One. 대답이 없었다. Aon? A, On! 부르기도 하고 One, This is One, Me. 라고 써 보내기도 했지만 계속하여 묵묵부답이기에 The Picture, The Korean. Novelist, Poet, Film, Writer, 나를 알 수 있을만한 갖가지 정보들을 보냈지만 메신저는 먹통, Aon이라는 글자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나는 태국어를 모르거나 쓸 수 없었고 Aon은 한국어는 물론이었겠지만 영어를 말할 수는 있어도 쓸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리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의 나라로 돌아가기를 바래. 애초부터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충실한 국민이었을 거야."
버린 게 아니라 알아볼 수 있을 만한 풀숲에 숨겨놓았던 쌍둥이 가방 속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메모쪽지 몇 장과 함께 책 한 권 있었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처음부터 내 책이었지만 지금도 내가 갖고 있는 하필이면 아내를 교살한 알튀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