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스토리 : 커밍 아웃 (Coming Out)
============== 경 고 ============================== T-스토리 시리즈는 <이성애>만이 <정상> 혹은 <평범>이라고 판단 되는 <멀쩡>한 분은 보시면 안됩니다. 이 글은 화자를 비롯한 소수의 <멀쩡하지만은 않은> 이들을 위한 게시물입니다. <정상적인 분> <평범한 분>은 이 글을 읽고 스트레스 받거나 거북해질 수 있으며, 화자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비정상>을 <강요>받는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위의 사항에 해당 되시는 분은 빨리 정상적이고 평범한 게시물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식>과 <주류의 질서>에서 벗어난 또 다른 세계의 스토리와 코드가 다분히 존재하니, 임산부/노약자/정상적인 분/평범한 분/멀쩡한 분은 빠르게 클릭하셔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결코 <멀쩡한 남자 목덜미에 후-하고 바람불어 넣고 싶지 않습니다.> <강요하고프지 않습니다.> T-스토리는 화자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타이에서의 <신변잡기성> 아주 따분하고 지루하면서도 논점없는 파편성 랜덤입니다. 다시 한 번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몇 번이나 알려 드렸음에도, <정상/평범>을 위한 수많은 게시물들을 제껴두고 아주 집요하게 이 <강요성> 게시물을 보시고<왜 바람불어 넣었느냐?>라고 엉뚱하게 투덜거리며 자다가 봉창 두드리시는 <멀쩡>한 분이 계시면, 그냥 웃습니다. 하하하^^ =============================================================== ******************************************************************** 이 게시물은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 취향과 행동 양식 그리고 관점으로 행해 지고 정리되어진 파편적 성향이 강한 글임을 전제합니다. 많은 일반 여행자들에겐 무의미한 정보와 내용일 수 있습니다. 이 게시판이 ‘아름답고 즐겁고 맛있는’ 정보들로만 독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나, 마이너스성/마이너성 정보와 논쟁의 여지 및 사건/사고의 정보는 게시물로 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시는 분은 하기의 게시물을 보시지 않으셔야 합니다. 주류의 질서에서 벗어난 소수의 성적 정체성과 삶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분이거나 혹은 질병, 罪惡 및 게시 언급의 가치조차 부정하고픈 이들은 결코 아래의 게시물의 보셔서는 안됨을 거듭 알려드립니다. 이하 평서체 서술합니다. =================================================================== "KIM은 Gay다." 라고 J가 나를 가르켜 말하고 있음을 M이 나에게 전해준다. 나를 잘 알고 있을 M도 재차 확인하려 한다. "KIM 혹시 Gay 아냐?"
동성애 [同性愛, homosexuality] 성애(性愛)의 대상으로 동성(同性)을 택하는 연애. 동성연애 또는 성대상이상(性對象異常)이라고도 한다. 이성에 대한 성적 관심은 거의 없거나 매우 희박하며, 때로는 혐오감을 갖는 사람도 있다. 남성의 3∼16%, 여성의 1∼3%가 해당된다고 한다. 원인은 유전 또는 호르몬의 부조화 등 생물학적 요인에 기인한다는 이론도 있고, 프로이트는 성심리의 발달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의 결과로 보기도 하였다. 이밖에 학습이론, 즉 동성과의 만족스러웠던 경험 또는 이성과의 불만족스러웠던 경험이 동성애를 강화한다는 이론도 있으나 정설은 없다. 현상(現象)으로서 동성애 자체는 여러 근본형태가 있을 수 있다. 남성의 동성애는 우라니즘(uranism) 또는 게이, 여성의 경우는 동성애에 빠졌던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의 이름을 따서 사피즘(sapphism) 또는 사포가 태어난 레스보스섬의 이름을 딴 레즈비언(lesbian)이라고도 한다. 동성애가 널리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이 주로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전염되는 것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한국에서는 동성애자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뜻에서 이반(二般 또는 異般)이라고도 부른다.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것을 커밍아웃이라고 한다. 흔히 트랜스젠더와 혼동되기도 하는데, 트랜스젠더는 자신의 육체적 성이 정신적 성과 반대라고 생각하는 성전환증에 가까운 경우로서 동성애와 구별된다. 성행위의 양태로 볼 때 비역•계간(鷄姦)•남색(男色)을 뜻하는 소도미(sodomy)나 페더래스티(pederasty)가 있고, 서로 외성기(外性器)를 마찰하여 성감을 만족시키는 트리바디즘(tribadism) 등이 있다. 19세기 말부터 동성애자의 권리운동은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떠오른 것은 20세기 후반부터이다. 미국 정신의학협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간주하다가 1973년 정신질환의 목록에서 삭제하였다. 또 1993년 미국 국립암연구소는 X염색체에서 개인의 성적 취향을 결정짓는 데 영향을 주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동성애는 생물학적 다양성의 하나로 용인받게 되어 네덜란드•벨기에 등 몇몇 국가에서는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되었다. 미국의 경우, 매사추세츠주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 10여 개의 주에서 동성애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는 등 세계적으로 동성애에 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왜 J가 날 비이성애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가끔씩 난 그에게 "킷틍 J"(Miss U)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장난스러운(?) 우리식(?) 스킨쉽에 화들짝 놀라는 그의 반응을 즐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막내 동생같은 J를 향한 인간적인 友精과 관심의 표현이었다. 아주 많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였음에도, 그에게 직접적인(?) 동성애적인 표현과 구애를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난 공공연히 이성애자임을 밝혔음에도, J는 나를 비이성애자라고 생각하게 된 그 무엇인가가 있었나 보다. J에게 타이에 있어서 비이성애자의 모습과 소통에 대한 많은 질의를 하기는 했었다. 나의 성적 정체성을 재차 확인한 M이 다시 말한다. "J는 Gay다." 의외의 사실이였다. 그리고 그 과거형 '휀깐'도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 T1이다. 6년간 비밀스러운 "휀깐"의 관계를 지속하였나 보다. J의 부모와 T1과도 아주 절친하다. J를 비롯한 그의 CMU 그룹과 시간을 보내며 몇 번인가 체킹을 하였다. 메인 멤버 6명(남-5 여-1) 중 비이성애자는 오직 하나 C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J와 T1의 히스토리에 의거한다면, 6명 중 50%인 3명이 비이성애자다. 처음부터 특정한 성적 지향성을 가진 이들과 만나려고 의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타이 지인과의 그룹에 조인하게 되면, 그 그룹에 적지 않은 이들이 비이성애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구별의 감각에 대한 나름대로의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J와 T1 그리고 나의 릴레이션쉽에서 보 듯, 비이성애자인 타이인들조차 구분해 내기 힘든 <비확실성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듯 싶다. 하물며 이성애자인 외국인이 그러한 구분을 정확히 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러한 영역을 이성애자인 이방인에게 단지 ‘프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쉽게 ‘커밍 아웃’ 하지 않음도 당연할 것이다. '프언깐'인 타이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순진한 착각일 수 있다. T1과 일란성 쌍둥이 형제인 이성애자 T2는 멤버내 연상의 여학생과 동거를 하는 '휀깐'이다. 하지만 19살 T2의 바람기는 상당한 듯 싶다. 이리저리 들려오는 그에 대한 은밀한 히스토리와 상황들이 만만찮은 '짜오츄' 계열이기도 하다. 일란성 쌍둥이임에도 그 성적 지향성과 정체성이 동일하지 않다. J와 동거 '휀깐'이었던 T1에게 또 다른 '휀깐'이 생긴 이후로 J와의 관계가 자연스레 정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표면적으론 아주 강고한 '프언 싸닛깐'(절친한 친구사이)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치양마이에서의 많은 시간과 공간을 그들의 CMU 그룹은 함께 공유한다. J와 T1의 히스토리를 더듬어 나간다면.. 그들의 릴레이션쉽은 17세(J),15세(T1)에 인터넷 ON-LINE에서부터 시작되었다. J가 나에게 알려준 내용이 거짓이 아니라면..15세부터 5명 이상의 이성애 경험을 가지고 있기도 한 '바이 섹슈얼'이다. 동성애에 조금은 더 익숙한 듯 싶다. 이젠 수없이 많은 아리따운 처자들의 유혹성(?) '쩡따'에 무관심한 J의 내공을 이해하게 된다. 그만큼 비이성애자(Gay)가 많은 타이에선, 여인들이 비교우위의 멋진 남자를 ‘획득’, ‘짝짓기’하는 과정이 힘들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비이성애자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타이 이곳에서조차, J 그는 완전한(?) '커밍 아웃'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부모가 자신의 히스토리를 알게 되는 것을 아주 두려워 한다. 그의 성적 정체성은 친밀한 소수의 '프언'을 제외하곤 알지 못한다. CMU 내부에서조차 소속학과 보수적인 동료들의 시선에 그는 몸을 사리며 쉽게 오픈하지 못한다. 소심한 이들에겐 비이성애자의 삶은 역시 타이에서도 고뇌인 듯 싶다. 많은 이들이 타이의 비이성애자 규모를 과소 평가하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 싶다. 하지만 <비이성애자>의 코드는 이 타이 사회 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서양인이 한국 사회의 <유교>를 모르고선, 왜 대한민국 길거리/인터넷 싸움 절반 이상의 모티브가 '반말'과 '나이'때문인지, 논리와 팩트보단 왜 '年長'과 '밥그릇 수'가 중요한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성과 가족 제도를 유지하는 타이인들 모두가 이성애자라고 본다면, 그것 역시 치명적인 착오일 수 있다. 적지 않은 비이성애자(게-, 텀디 등) 역시 어느 시점엔, 비이성애자로서의 히스토리를 접고서 이성과의 혼인을 통한 가족제도에 <위장 편입>(?)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타이 사회의 '상대적 대세'와 '보수적인 주류'의 질서에 비이성애자도 100% 그 거부권을 행사하기는 힘든 상황인 듯 싶다. [한겨레] 에로틱한 섹스 묘사 없이 은근한 눈빛만으로도 모든 걸 표현한 <왕의 남자> 관객과 평론가들에게서 퀴어영화라는 딱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한중렬/ 소설가 조선시대 동성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왕의 남자>의 흥행 돌풍이 무섭다. 개봉 13일 만에 관객 300만 명이 훌쩍 넘었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가 주류매체에서 받는 대접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흥행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많은 매체들이 영화의 흥행 요인을 분석해놓았다. 그런데 동성애를 언급하는 매체는 거의 없다. 이상하다. 두 남자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를 보고 동성애를 이야기하지 않다니. 제목조차 <왕의 남자> 아닌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는 이성애혐오자(호모포비아)들도 조용하고, 이런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퀴어영화의 계보를 훑어내던 평론가들의 수다스러움도 거의 없다. 혹 게이(남성동성애자)인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는 화제도 되지 못할 자연스러운 현상이 돼버린 것일까? 호모포비아들이 비난할 근거가 없다? 내가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한 번 더 영화를 보았다. 눈을 현란시키는 화려한 색채와 신명나는 광대극 같은 곁가지를 쳐내고 보니, 세 남자의 로맨스가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끊임없이 공길(이준기)을 챙기던 장생(감우성)은 결국 사랑하는 남자를 대신해 대역죄를 뒤집어쓴다. 아무나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연산(정진영)의 사랑 또한 대단하다. 궁에 다시 돌아온 장생이, “그 비역질이 또한 대단하여 쌀이 나오고 벼슬이 나온다!”며 조롱할 때 연산은 대노한다. 장생이 자신을 살인귀이며 대물로 여자들을 희롱한다고 폭로할 때만 해도 싱글싱글 웃던 연산이었다. 자신에 대한 모욕은 웃어넘길 수 있지만, 조롱의 화살이 공길에 가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길은 어떤가. 장생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죽어서도 장생과 함께하기 위해 손목을 긋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로맨틱한 사랑의 결정판이다. 두 남자는 내세의 사랑을 기약하며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고, 이미 공길의 사랑이 자신에게 없음을 안 연산은 녹수와 함께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곧 닥쳐올 죽음 앞에서도 주인공들은 모두 자기의 사랑을 노래한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원래부터 사랑하는 사이였던 두 동성애자는 역경을 딛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일순간 한 동성애자의 미모와 재능에 혹해 사랑하던 여인을 내쳤던 이성애자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스토리인 것이다. 한 편의 잘 짜인 게이 로맨스다. 아무리 화려한 의상과 신나는 볼거리로 치장했다 하더라도 이 영화를 동성애와 떼어놓고 말할 순 없다. 동성애자도 꿈을 꿀 권리가 있다 한국 근대 이전의 사회 중 가장 많은 동성애 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 남사당패가 배경이며, 과도하다 못해 패륜조차 거부하지 않았던 연산 시대의 이야기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픽션풍 게이 로맨스다. 한국 땅에서, 그것도 살짝 리얼리즘까지 가미된 게이 로맨스가, 다른 동성애 영화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흥행 신화를 만들어내고, 마치 그 때문이기라도 하듯 관객과 평론가들에게서 퀴어영화라는 딱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유는 간단할지 모르겠다. 지나치게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속 남자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감독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첫째, 공길은 녹수조차도 질투할 만큼 여자답게 묘사된다. 공길이 만약 원작인 연극 <이>(爾)에서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겼다면 얘기가 한참 달라졌을 것이다(<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동성애 섹션에서 두 남자가 서로를 뜨겁게 바라볼 때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린 것을 기억하는가). 둘째, 자칫 호모포비아들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성적 표현을 모두 제거했다. 연인들은 서로를 느끼는 방식으로 애잔하면서도 뜨거운 눈빛만 교환한다. 남성 동성애를 싫어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동성애’라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섹스(항문성교 같은)에 몸서리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영리한 연출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약 공길이 영화 초반 판을 벌여준 양반뿐만 아니라 장생, 연산과 적나라한 섹스를 해댔다면 어땠을까? 셋째, 영화 속에 묘사되는 남자들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와 희생이다. 심지어 폭군 연산조차도 공길을 대하는 손길이 자상하기 그지없다. 이런 사랑 앞에서는 동성애자들을 괴롭히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한 호모포비아도 무장해제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랑을 더럽다고 욕할 근거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아름다운 동성애라는 이유로, 어쩌면 이 영화는 대다수 관객들에게 동성애 영화로 여겨지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알고 있는 동성애는 이토록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아름다워서도 안 되고. 마치 이 영화를 동성애 영화라고 정의 내리는 순간, 영화의 가치가 한순간에 하락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는 동성애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남사당패가 꾸민 한바탕 신나는 소극은 현실의 동성애자들의 삶과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 만약 하늘로 날아오른 장생과 공길이 다시 현대에 태어나 광대로 살며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들의 사랑이 겪을 시련은 왕의 훼방만이 아닐 것이다. 공길이 제아무리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동성애에서 동성을 떼어놓고 애(愛)만 묘사한 이 영화는 누군가의 말처럼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야오이’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난 이 영화가 재미있는 퀴어영화라는 데 손을 번쩍 들 것이다. 퀴어영화라고 <해피투게더> <패왕별희> <로드무비> 등 척박한 현실에서 갈등하며 아파하는 동성애자만 묘사하란 법 있나. 질퍽하거나 에로틱한 섹스 묘사가 없는 은근한 눈빛만으로도 모든 걸 표현할 수 있는 게이 로맨스도 존재한다. 동성애자도 영화를 통해 꿈을 꿀 권리가 있다. 가을만 되면 극장 간판을 도배하는 현실과 괴리된 순애보는 이성애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평을 위해 마련된 듯한 퀴어영화도 물론 좋다. 하지만 <왕의 남자>처럼 가끔은 현실을 잊고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퀴어들을 위한 로맨스 영화들이 더 많이 등장하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