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
지난 9월 방콕에 갔을 때 카오산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THE WAY>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여행을 하다가 사망한 아들의 유골을 지닌 채
산티아고 길(El camino de Santiago)을 걷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산티아고 길은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로가 <순례자>라는 책에서
“이 길을 걷고 난 뒤에 내 인생이 달라졌다.”라고 술회하는 바람에
‘순례자의 길’로 불리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부터 시작하여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여 km에 달하는 이 길을
해마다 100만 명의 여행자들이 순례를 한다.
하루에 25~30km씩 걸어도 1달 이상 걸리는 여정이다.
이 길을 다녀온 서명숙 씨의 아이디어에 의해 제주도 올레길이 탄생했다.
며칠 전 TV에서 <영상앨범 산>을 보았는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2부작>이었다.
다음날, 집에서 도보로 1시간 거리의 도서관까지 걸어가서
산티아고 길에 관한 책 4권과 카라코감 하이웨이 걷기 여행 책 1권,
네팔 트래킹 책 1권을 빌린 다음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래의 순서는 내가 무심코 읽은 순서대로이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이강혁, 책보세)
이 책은 산티아고 길에 대한 꼼꼼한 가이드북이다.
저자는 외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대전의 외고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있다.
산티아고 길에 대한 기초 지식을 쌓는데 꼭 필요한 책이다.
신타아고 길 순례자들에게 최대의 적이 배낭의 무게라고 하는데
이 책만큼은 꼭 가지고 가야 할 것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최미선+신석교, 넥서스)
동아일보 기자 출신 아내가 글을 쓰고
역시 동아일보 사진기자 출신 남편이 찍은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2007년 9월 10일부터 10월 10일까지
부부가 함께 순례한 산티아고 길의 여정을 일기 형식으로 담아놓았다.
전문가의 멋진 사진과 맛깔스러운 글 솜씨를 통해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걸 알게 해준다.
두 사람은 1개월 동안 산티아고 길을 순례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을 만난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이에게 “왜 여기에 왔니?” 라고 물으면
“내 자신을 찾으러.” 라는 대답이 제일 많다고 한다.
산티아고 길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산티아고 길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과 정보를
알기 쉽게 접하고 싶은 사람은 이 책부터 읽어야 한다.
*길의 기쁨, 산티아고(조석필, 산악문화)
이 책의 저자는 소아과 및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히말라야 원정대를 성공적으로 이끈 산악인이면서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책의 군데군데에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함께
은근한 자아도취적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60세가 되는 해이면서 결혼한 지 30년이 되던 해에
아내가 불쑥 “나 산티아고에 갈 거야.”라는 선언을 한다.
몇 달의 준비 끝에 직장에 사표를 내고 아내는 안식년을 얻는다.
그리고 2013년 3월 29일부터 5월 5일까지
38일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 787.5km를 함께 걸었다.
이 책은 기행문의 재미와 도보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은 다음과 같다.
“순례라는 계급장을 떼고 따져도 카미노 데 산티아고만한 여행지는 흔하지 않다.
값싸고 정확한 숙소가 반나절 거리마다 있고,
이른 아침과 풍요로운 저녁을 주는 식당이 기다리며,
맛있는 와인과 친절한 주민들이 산다.
들판은 평화로우며 공기는 안전하다.
풍경은 친절하지만 히말라야처럼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오래된 편지처럼 읽히는 겸손함,
그것이 카미노 풍경의 매력이다.
더하여 카미노에서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친구가 생긴다.
그것도 아주 쉽게. 거의 무결점의 여행지라 할 수 있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김희경, 푸른숲)
어느 날 갑자스런 사고가 일어나고 남동생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
자는 듯이 누워 있는 동생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죄책감이
시도 때도 없이 분노로 변해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동생이 세상을 떠나고 6개월이 지난 뒤,
2008년 4월 11일부터 5월 14일까지 34일 동안 카미노를 걸었다.
혼자 걸었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서울대에서 인류학을 전공했으며 미국에서 MBA를 공부하고
18년 동안의 동아일보 기자 생황을 거쳐 국제개발NGO에서 일하고 있는 저자는,
동생의 죽음과 산티아고 길 순례라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느꼈던 고통과 그 고통으로 인한 내면의 갈등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고통을 서서히 극복해 가는 과정도 고백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한편의 성장소설로 읽힌다.
비록 산티아고 길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의미에 대해 한번쯤 질문을 해본 사람이라면 읽어도 좋은 책이다.
내가 인상 깊었던 대목은 아래와 같다.
“있잖아. 우리가 모두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
베아테가 “나도!”하고 맞장구를 쳤다.
“라틴어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 알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잖아.
여기선 정말 충실하게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베아테의 말을 받아 톰이 거들었다.
“여기서 걱정할 미래라곤 딱 세 개밖에 없잖아.
어디까지 걸어가고, 밥은 뭘 먹으며, 어디에서 잘 것인가.
삶이 실제로 이렇게 단순하다면 얼마나 좋겠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풀밭에 앉아 감탄사를 주고받던 우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삶이 실제로 그렇게 단순해지거나,
지속적으로 ‘지금, 여기’의 순간에 몰두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랜 세월의 구도(求道)로 엄격하게 단련된 사람이라면 몰라도,
매일 사소한 골칫거리들과 씨름해야 하는 속세의 우리에겐 어림도 없다.
일상에선 좀처럼 실현하지 어려운 ‘이상’이라는 것을 모두 알기 때문에
카미노에서의 사소한 비일상적인 순간을 그토록 감격스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