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홀린듯한 4 월 11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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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홀린듯한 4 월 11 일

sarnia 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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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일본표준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표준시간은 아카시 지역을 통과하는 동경 135 도를 기준으로 한다. 

서울의 경도는 동경 127 도다. 

대한민국 영토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경도는 동경 127 도 30 분이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돌아가고 있는 시계는 엉터리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맞는 시계가 전혀 없지는 않다. 

맞는 시계 중 하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에 있고 

다른 하나는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에 있다. 

두 시계 모두 해시계다. 



 



그 중 한 개가 있는 정동진을 찾았다. 

처음부터 그 곳에 갈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내 숙소 이비스 엠배서더 호텔에서 새벽에 잠을 깼다. 

날이 밝아오자 창 밖으로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남산 소나무숲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언가에 홀린듯 청량리역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무작정 동해바다로 가는 기차를 집어탔다.  





정동진에 있는 해시계는 그 화살의 그림자가 

정동진 경도 위치에 맞는 본래 자연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북극성을 정조준하는 해시계 화살촉과 지면의 각도는 그 지점의 위도를 가리킨다. 

이 지점의 화살촉과 지면의 각도는 37.412889 도다. 

따라서 정동진의 위도는 북위 37.412889 도가 된다.  

화살의 그림자는 오후 세 시 를 조금 넘고 있었다. 

내 스마트폰 시계의 한국시간은 그보다 20 여 분이 빠른 오후 세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과 기억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 준,,,,,, 정동진 시간박물관






그 박물관은 이름이 특이했다. 

시계박물관이 아니라 시간박물관 (Time Museum) 이었다. 


단순히 골동품 시계들을 진열해 놓은 곳이 아니라, 

시간과 인류의 관계사를 다룬 박물관이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일 것이다. 


시간과 과학, 시간과 문명, 시간과 추억과 같은 

시간과 관련된 다양한 개념들이 그 이름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시간박물관은 열차의 모습으로, 시간을 상징하는 철로 위를 거꾸로 달리면서 

우리를 기억의 저 편으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나' 라고 하지 않고 "우리" 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날 싸르니아에게 동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부터 함께 온 동행은 아니었다. 

기차역 바닷가 키 작은 소나무 근처에서 우연히 만났다. 


베이지색 후드재킷 안에 검은색 라운드티와 검은색 바지를 받쳐입은, 

마치 30 대 초반처럼 보이는 중년의 여자분이었다. 

어깨에 메고 있는 프라다 숄더백도 검은색이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하게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가차와 소나무라는 노래였다.  


기차역 플랫폼에서부터 박물관까지 자연스럽게 함께 걷게 됐다. 

박물관이 여덟 량으로 이어진 기차였기 때문에

전시물을 관람하는 동안 우리는 좁은 동선을 따라 함께 걸었다.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았지만 

그 분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목례를 하며 "안녕하세요. 싸르니아 입니다" 라고 했을 때

그 분 역시 목례로 답했지만 

미소만 지은 채 자기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헤어져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제 갈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나를 향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 이름은 ,, 혜린이예요, 윤혜린"   






운명같은 4 월 11 일에 다시 만난 낯익은 회중시계 

나는 저 회중시계를 본 적이 있다 ! 




박물관에 전시된 그 회중시계는 2 시 20 분에 멈춰 있었다. 

1912 년 4 월 15 일 오전 2 시 20 분이라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시간이었다.   


길 가는 사람을 세워놓고 1912 년 4 월 15 일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열 명 중 일곱 명은 글쎄요,, 하며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저 북녘의 동포들은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그 날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님이 탄생하신 태양절 입니다" 

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해난사고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날이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에서 침몰한 날이라는 걸 단박에 기억해 낼 것이다. 


4 월 14 일 밤 11 시 40 분 경부터 침수가 시작된 배가 23 도 각도로 가울어진 상태에서 

결국 두 동강으로 절단된 시간이 4 월 15 일 새벽 2 시 20 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회중시계가 멈춰선 시간 역시 2 시 20 분이었다. 

이 회중시계의 주인 Nora 는 열 번 째 구명정에 탑승하여 극적으로 구조됐다.  


2 시 20 분에 멈춘 회중시계 뚜껑 안 쪽에는 다음과 같은 애틋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To my dearest Nora. Your visit to Co. Limerick warmed my heart, 

God bless and be with you on your return to Pennsylvania. 

11.4.12 Loving mother" 

"사랑하는 노라에게. 

만나서 반가웠다. 

우리 딸 안전한 여행을 위해 엄마가 기도할게.

1912 년 4 월 11 일 사랑하는 엄마가"  


리머릭 카운티가 어디에 있나 그 자리에서 검색해 봤다. 

아일랜드 서부에 위치한 카운티였다. 

그러니까 Nora 는 아일랜드 리머릭에 있는 고향집 방문을 마치고 미국 펜실베니아로 돌아가는 길 이었다. 

어머니는 Nora 에게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문구가 새겨진 이 회중시계를 선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계에 새겨진 날짜 1912 년 4 월 11 일은 아마도 그 어머니가 딸 노라를 전송한 날 인 듯하다. 

참고로 타이타닉호가 영국 Southampton 을 출항한 날은 4 월 10 일이었지만, 

프랑스 Cherbourg 를 거쳐 아일랜드의 퀸즈타운에 기항했다가 

미국 뉴욕을 향해 다시 출항한 날은 그 다음 날인 4 월 11 일 이었다. 


퀸즈타운항을 벗어난 타이타닉호 앞에 대서양의 망망대해가 펼쳐지자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1등항해사 윌리엄 머독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Take her to sea, Mr. Murdoch. Let's stretch her legs" 

"헤이, 머독 브라더! 이제부터 진짜 바다로군. 전속력 발진" 


그러고보니 싸르니아가 이 회중시계와 마주한 날도 4 월 11 일 이었다.

104 년 전, 그 날 이 시계를 선물한 어머니도 

죽음의 타이타닉호에 승선했던 딸도 이제는 모두 타계했을테지만, 

이 시계는 그 날의 기억과 기록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104 년 후 4 월 11 일, 싸르니아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104 년 전, 

북대서양 바다 3 천 여 미터 깊이의 차가운 해저 바닥에 가라앉았던 저 회중시계가 

어떤 경로로 이역만리 떨어진 정동진 바닷가 작은 박물관까지 와서 싸르니아와 만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보면 볼수록 저 회중시계가 너무나 낯이 익었다. 

마치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물건을 다시 찾은 듯한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Nora 의 회중시계 이야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데

Nora 와 회중시계의 모습이 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일까?



2016 년 4 월 11 일 대한민국 강원도 강릉

17 Comments
jindalrea 2016.04.16 23:56  
음.. 강원도에서 이런 경험을 하셨군요..
시차 적응.. 힘드셨을텐데.. 잘 지내다 가셨길 바랍니다.
sarnia 2016.04.17 07:35  
시차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었는데
돌아오기 전전날 어떤 사람이 만면에 함박웃음을 띤 tv 장면을 보고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졌어요.
그 어떤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대민방에 올렸습니다.
필리핀 2016.04.17 03:49  
오호! 사진이 많이 좋아졌네요... ^^

카메라를 좋은 걸로 바꾸신 건가요?
sarnia 2016.04.17 07:37  
헉,, 제 사진에 더 좋아질 여지가 남았었나요 ?? ^^
카메라는 6 년 된거고 스맛폰은 5 년 쯤 된 모델입니다. (회사폰은 신형이지만..)

흠흠.. 사진작가는 카메라 영향을 받지만,
뽀샵예술가는 카메라가 무엇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답니다 ^^
필리핀 2016.04.17 08:04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언가 좋아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죠^^

나이가 들수록 추악해지고 탐욕스러워지는 세상에서는...
참새하루 2016.04.17 13:26  
한동안 뜸하시길래 어느곳을 여행중이신가 했는데
또 한국을 방문하셨군요

범선인가요 유럽인가 하다가
자막이 없었다면 몰랐을거예요
동해 정동진에 범선이라
어울리지는 않지만
일출 사진으로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정동진을 무작정 찾아가서
바라보는 일출
sarnia님 도 꽤나 로맨티스트신가봅니다
멋집니다
sarnia 2016.04.18 02:01  
언덕빼기 위에 자리잡은 이상하게 생긴 호텔하고 (처음엔 산 위에 좌초된 크루즈 난파선인 줄 알았습니다), 모래밭에 설치된 더 이상하게 생긴 모래시계인지 뭔지가 분위기 다 망쳐놓는 것 같았습니다.
범선은 그런대로 괜찮아서 사진배경으로 써 보았어요 ^^

1979 년 여름에 영주로 돌아가는 영동선 기차를 타고 저 해변역을 통과래서 강릉으로 간 적이 있지요. 설악산 캠핑가는 길이었는데 저 해변을 다시 보고싶어 일행에서 떨어져서 버스로 아예 부산까지 내려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도 기차를 탔는데, 영동선이 아닌 태백선으로 가더군요.
냥냥 2016.04.17 23:02  
어느 시대든  엄마는 자식은 그렇네요.
왠지 코끝이 시큰해집니다.

노라처럼 구조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자식을 그렇게 보내 놓고 하루하루 견뎌나가는 지구상의 모든 부모님께 위로를...
sarnia 2016.04.18 02:24  
그러고보니 타이타닉과 세월호는 하루 차이네요.
4 월 15 일과 4 월 16 일.

1997 년 크리스마스 영화 타이타닉 나왔을 때 당시 사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지요.

구조작업이 진행될 때,,, 심등실 출입구를 봉쇄하는 등 일부 잘못된 결정도 있었지만,
승객구조를 위해 사투를 벌인 승무원들의 노력은 후에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전 세계에 잘 알려졌습니다.
구명정 리더로 배정된 소수 인원 외에는 선장을 비롯한 고위직 항해사는 전원 순직했고,
특히 배의 전기를 유지하기 위해 기관실에서 끝까지 탈출하지 않고 사투를 벌인 기관실 승무원들의 노력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배의 오키스트라는 사람들의 동요를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 탈출하지 않고 침몰직전까지 연주하다 역시 전원 순직했습니다.
구겐하임같은 내노라하는 일부 부자승객들 역시 자신이 남자이면서 '사회지도층' 이라는 이유를 대며 승무원들의 구명정 탑승권유를 거부했고, 처녀항해에 동승했던 이 배의 설계사 역시 배와 운명을 같이 했지요.

타이타닉 역시 구조율이 높지는 않았지만, (승객 2 천 2 백 여명 중 1 천 5 백 여명이 사망했을 겁니다), 그 이유는 첫째 구명정이 절대부족했고, 둘째, 사고 초기 사태파악이 안 된 많은 승객들이 구명정 탑승을 거부하는 바람에 상당수 구명정이 승선정원을 크게 못미친 채 배를 떠났으며, 사고해역이 망망대해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구조선이 오기까지 무려 네 시간 이상 걸렸는데 그 사이 구명복을 입고 바닷속에 뛰어든 사람들이 차기운 물에 견디지 못하고 열손실이나 심장마비로 거의 전원이 이미 사망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타이타닉 사고 역시  선주의 욕심이 빚은 과속 등으로 인한 인재였지만, 적어도 사고 후 구조과정에서는 승무원 등 배의 리더들이 승객구조에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쉬고싶당 2016.04.18 12:13  
산문집 읽는 기분이었네요~  좋은정보 잘 읽엇습니다. 시간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sarnia 2016.04.19 09:06  
네, 고맙습니다^^ 정동진 가시면 시간박물관 꼭 가 보세요. 규모에 비해 입장료가 비싼 편이긴 하지만 나름 재미있습니다.
시계발전사와 시간과 공간의 문제 등 깊은 주제들도 있는데,, 
정보글로 좀 더 충실하게 쓸 걸 그랬네요.
어랍쇼 2016.04.18 14:02  
글 읽다가 왠 로맨슨가 했는데..
윤혜린..........? 그 모래시계 맞죠?

정동진..강원도.. 진짜 좋아하는데..
사진보니 간만에 가고싶네요....ㅜㅜ
sarnia 2016.04.19 09:08  
와우, 윤혜린씨를 아시는군요.. 네 맞아요. 그 모래.. 뭔가 하는 카지노 주인.
언제 함께 만나도록 자리를 주선해 볼까요?
푸켓은 잘 다녀오셨나요? 다녀오셨으면 결혼식 이야기 좀 올려주세요.
사진도 많이 넣어서말이죠~~
어랍쇼 2016.04.19 11:54  
저는 윤혜린씨보다는 이정재로 주선..ㅎㅎ
푸켓 결혼식 너무 잘다녀 왔고 펀낙님께서 멋진결혼식 이야기 올려주셨어요.
저는 사진이 덜렁 세장밖에 없어서리..^^;;
sarnia 2016.04.20 09:05  
백재희는 죽었으니까 저 세상에 가서나 주선해 드릴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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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낙님 포스팅 예전에 봤는데 다시 보니 사진이 더 멋져보이네요..
아프로벨 2016.04.18 16:15  
아~~~저도 한식날에  선친 묘소 주변에 주목 서너주  심고 강릉 정동진 삼척으로 해서 봉화 풍기 .....여행 했어요.
그쯤 바람이 무척 불었는데 어쩜 바람속에 스쳤을지도..... 
그런데 사알니아님은 4월 11일에 정동진에 다녀가셨군요.


빨간융단위에 회중시계사진은 마치 숨은그림찾기 같아요. 사진  참 재미있읍니다.

늘 건강하세요^^/
sarnia 2016.04.19 09:10  
아프로벨님 오랜민 입니다. 건강하시죠? 조카분들도 잘 계시고..
한식이면 식목일 하고 비슷한 날짜죠?
어쩌면 진짜 비람결에 스쳤을지도 모르겠네요.
실은 예전 동해안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데가 삼척 부근이라
이번에 바다열차 타고 삼척에 가보자 했었어요.
근데 정동진역에서 막상 바다열차를 보니 탈 맘이 없어져서 그만뒀어요.
하나도 재미없을 것 같이 생겼더라고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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