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스토리 :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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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스토리 : 퍼즐

KIM 8 1020
============== 경 고 ==============================

T-스토리 시리즈는 <이성애>만이 <정상> 혹은 <평범>이라고 판단
되는 <멀쩡>한 분은 보시면 안됩니다. 이 글은 화자를 비롯한 소수의
<멀쩡하지만은 않은> 이들을 위한 게시물입니다.


<정상적인 분> <평범한 분>은 이 글을 읽고 스트레스 받거나 거북해질
수 있으며, 화자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비정상>을 <강요>받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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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멀쩡한 남자 목덜미에 후-하고 바람불어 넣고 싶지 않습니다.>
<강요하고프지 않습니다.> T-스토리는 화자 역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타이에서의 <신변잡기성> 아주 따분하고 지루하면서도 논점없는
파편성 랜덤입니다.





다시 한 번 거듭 말씀드립니다. 이렇게 몇 번이나 알려 드렸음에도,
<정상/평범>을 위한 수많은 게시물들을 제껴두고 아주 집요하게
이 <강요성> 게시물을 보시고 왜 바람불어 넣었느냐?>라고 엉뚱하게
투덜거리며 자다가 봉창 두드리시는 <멀쩡>한 분이 계시면, 그냥
웃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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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 취향과 행동 양식 그리고 관점으로 행해
지고 정리되어진 파편적 성향이 강한 글임을 전제합니다.

많은 일반 여행자들에겐 무의미한 정보와 내용일 수 있습니다. 이 게시판이
‘아름답고 즐겁고 맛있는’ 정보들로만 독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나, 마이너스성/마이너성 정보와 논쟁의 여지 및 사건/사고의 정보는
게시물로 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시는 분은 하기의 게시물을 보시지
않으셔야 합니다.

이하 평어체 서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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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he Rain - In the Silence


아래의 게시물은 한겨레21 등에서 옮겨온 기사 및 링크들입니다.



<퍼즐 들어가기>

https://taesarang.com/new21/bbsimg/zboard.php?id=myinfo&page=1&sn1=&divpage=1&sn=on&ss=off&sc=off&keyword=KIM&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573





특수대대 111, 유령의 공격


[아시아 네트워크 | 정문태의 비밀전쟁 발굴3]

CIA가 조직한 한국전쟁 참전 중공군 포로들… 60년대에 라오스와 중국 본토까지 투입되다


▣ 타이-버마, 타이-라오스 국경·타이베이=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몇해 전부터인가, 타이 사람들 사이에 ‘타이의 관문’이라는 뜻을 지닌 프라투 사이암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타이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며 새해에는 제법 관광객들이 몰리기도 하는 곳인데, 라오스와 국경을 가르는 메콩강 협곡을 낀 푸치화산 일대를 일컫는다.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바깥 세상과 단절된 그 험준한 산악에 파탕(Pha Tang)이라는 마을이 있다. 얼마 전부터 버찌술로 유명해진 파탕은 국민당 잔당들이 세운 마을로 현재 그 후손들 3천여명이 살고 있다.


파탕 마을 대형 불상의 비밀


파탕 마을에서 산꼭대기로 오르면 대형 불상과 정자가 안개에 가린 라오스와 타이쪽을 나란히 바라보고 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오르기도 힘든 이 가파른 산악 국경에 부처를 앉혔을까?

아는지 모르는지, 황금빛 부처는 타이-라오스 국경을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흘릴 뿐이다. 파탕 마을이 지닌 비밀스런 역사는 참으로 오랫동안 메콩강 협곡이 뿜어내는 짙은 안개에 감춰져왔다.

“우린 그런 거 잘 몰라요. 나이 많은 어른들께 여쭤보세요.” 집집을 돌아도 대답은 마찬가지다. 이미 1세대들이 대부분 세상을 뜨고 이제 2세대 손으로 넘어간 파탕 마을에서 국민당 잔당의 비밀을 캐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주민들 가운데는 냉전이 극으로 치달아가던 1960~70년대 이 산골짜기 파탕 마을이 국제 정치의 핵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없다.

중국 인민해방군에 쫓겨난 장제스의 국민당 잔당들이 1950년 초부터 윈난-버마 국경지대에서 미국과 대만 정부로부터 비밀 지원을 받으며 이른바 ‘반사회주의 방파제’ 노릇을 해오던 가운데, 1961년 1월 버마 정부군이 라오스 국경에 자리잡은 국민당 잔당 본부였던 켕랍(Keng Rap)과 몽 파리아오(Mong Pa-liao)를 공격해서 미국제 무기를 대량 발견하자 국제 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다. 그에 따라 비밀군사 작전이 탄로난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1961년 초 장제스를 압박해 이용가치가 떨어진 국민당 잔당 철수를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1954년 6580명에 이어 다시 1961년 3월17일부터 4월12일 사이에 버마와 라오스 국경지대로부터 국민당 잔당 4196명이 대만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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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오스 비밀작전에 투입된 CIA 요원과 미군들. CIA는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사용했던 부대 명칭인 ‘특수부대 111’을 그대로 베껴서 철저히 유령으로 위장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대만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채 타이 국경지대에 남은 돤시원(段希文) 장군의 제5군 소속 1800여명과 리원환(李文煥) 장군의 제3군 소속 1400여명 그리고 마쥔궈(馬俊國) 장군의 제1독립부대 정보요원을 포함한 총 3천명을 웃도는 국민당 잔당들을 재조직하고 있었다. 앞서 1959년 파테트 라오(Pathet Lao·라오스공산당)를 견제하기 위해 그린베레 8명을 라오스에 투입해서 소수민족인 몽족(Hmong)을 훈련시켜 정보요원으로 활용해오고 있던 CIA는 1960년부터 국민당 잔당들을 윈난에 투입해 중국의 대북베트남 지원 가능성을 염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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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는 버마와 국경을 맞댄 라오스의 남유(Nam Yu)에 비밀공작 본거지를 설치해 중국과 라오스 공산당을 동시에 훑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대만 국방부 본토정보작전부(IMOB)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던 마쥔궈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 잔당 제1독립부대는 타이-버마-라오스-중국 국경지대를 비롯해 윈난 내부에까지 완벽하게 조직을 침투시켜 CIA의 정보전을 가능케 했고, 잔당 제3군과 제5군은 루트 개척으로 그 뒤를 받쳤다.


다시 한국전쟁으로 눈길을 돌리다


한편, CIA는 마쥔궈 장군의 정보조직과는 별개로 또 다른 특수 엘리트 부대를 조직했다.

세상에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이 특수부대는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사용했던 부대 명칭을 그대로 베껴서 철저히 유령으로 위장했다. 이름하여 ‘특수대대 111’(Bataillon Special 111)이다. 1951~52년 비밀리에 국민당 잔당을 동원해 윈난을 공격했던 ‘한국전쟁 제2전선’이라는 실패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CIA는 세계전사에 가장 비밀스런 부대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한 이 조직을 만들고자 다시 한번 한국전쟁으로 눈길을 돌렸다. CIA는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힌 중공군 2만1300명 가운데 본국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을 선택했던 1만4715명 속에서 차출한 이들을 라오스 국경지대로 데려왔다. 그리고 ‘리텡’이라는 매우 유능한 부대장의 지휘 아래 1천여명으로 추정되는 요원을 지닌 ‘특수대대 111’을 창설했다. CIA가 조직한 이 ‘특수대대 111’은 라오스 북부를 거점 삼아 라오스와 중국 본토에까지 투입됐다.

“정확한 수는 기억할 수 없지만, ‘특수대대 111’에는 한국전쟁의 포로였던 중국인이 일부 있었던 게 사실이야.” CIA의 대라오스 비밀전쟁을 이끈 핵심요원 3명 가운데 한명으로 ‘특수대대 111’을 조직한 장본인이기도 했던 빌 영(Bill Young)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억력’ 탓으로 돌리며 피해갔지만, 그 부대의 존재와 중국인 전쟁포로의 활용 사실만큼은 정확하게 확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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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콩강 협곡을 끼고 타이-라오스 국경을 가르는 프라투 사이암 전경. 이 험준한 산악에 자리잡은 파탕 마을에는 국민당 잔당의 후손들 3천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대라오스 비밀전쟁에 투입됐던 국민당 제3군 소속 잔당들이 세운 파탕 마을에서도 ‘특수대대 111’ 출신 요원들은 찾을 수 없었다. 딱 한 사람, 자신이 ‘특수대대 111’ 출신임을 밝히는 천싱지(陳興集·77살) 소령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이는 한국전쟁 포로와는 상관없는 윈난 출신 국민당 잔당이었다.

“이젠 모두 가고 없을 거야. 당시 중국 포로 출신으로 작전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대만으로 되돌아가버렸으니 여기 타이 국경에서는 찾기 힘들걸세.” 천 소령은 대신 ‘마약왕’으로 불린 쿤사(Khun Sa)의 몽타이군(Mong Tai Army) 사령관이었던 장수취안(張書全)이 ‘특수대대 111’ 출신임을 증언했다. 만주 출신인 장수취안은 국민당 잔당으로 버마 국경에 쫓겨온 뒤 1952년 대만으로 갔고, 다시 1950년대에는 한국에서 정보원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그 뒤 1960년부터 1963년까지 ‘특수대대 111’ 요원으로 라오스 공작에 참여하다 1960년대 중반 버마 샨(Shan)주에서 쿤사와 손을 잡고 마약사업에 뛰어들었다. 장수취안은 현재 1996년 버마 정부에 투항한 쿤사를 따라 랑군으로 옮겨간 뒤 버마군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천 소령은 더 깊숙한 내막을 증언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느 전선에 투입됐는지, 그게 라오스였는지 중국이었는지도 정확히 더듬어내지 못했다. 그건 천 소령의 기억력만을 나무랄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취재에서 만난 많은 증언자들 가운데 일반 장교나 사병 출신들은 당시 작전 내용과 작전 지역마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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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 국경지대에서 ‘특수대대 111’의 유일한 생존자인 천싱지 소령(왼쪽). 위는 CIA의 대라오스 중국 비밀전쟁에서 완벽한 정보망을 구축했던 국민당 잔당 제1독립부대 사령관 마쥔궈 장군. (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CIA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우린 그냥 지휘관이 가자면 갔고 싸우라면 싸웠지. 산으로 뒤덮인 국경지대에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었어. 굳이 알 필요도 없었고.”

파탕 마을에서 만난 장산(張山·89살·제3군 출신)의 말마따나, 험난한 산악으로 이뤄진 국경지대의 특성을 이용해 CIA가 작전에 참여한 이들에게마저도 정보를 노출하지 않은 채 철저한 비밀작전을 수행했던 탓이다. 특히, CIA는 ‘특수대대 111’의 존재 사실을 대만 군부의 핵심조차 모르게 진행했음이 드러났다. “그런 부대는 처음 들어본다. 장 총통이 직접 관리한 밀령이 아닌 다음에야, 국민당 군과 관련된 사실을 내가 모를 리 없어.”

1949년 장제스와 함께 대만으로 온 국민당 장군 가운데 한명이자 군 정보부에서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친 황젠츠(黃劍叱·94살·타이베이) 퇴역 소장마저도 ‘특수대대 111’의 존재 사실을 부정할 정도였다.

그렇게 CIA를 앞세운 미국은 암흑 속에서 대라오스 비밀전쟁을 감행했다.

“라오스를 인도차이나반도 사회주의 혁명을 막는 방파제로!” 미국은 1955년 이른바 ‘피의 사이공’ 시가전이 끝난 뒤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프랑스를 대신해 ‘반공’을 내걸고 베트남에 개입했다. 그리고 1959년 라오스 북부 샹쾅주(Xieng Khouang)에 CIA 요원과 그린베레를 투입해 방파오(Vang Pao)를 지도자로 삼아 몽족 게릴라 2만여명을 조직했다. 이어 1960년에는 CIA를 통해 국민당 잔당을 재조직했다. 미국은 그 ‘비밀전쟁’을 통해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중국의 대북베트남의 지원 가능성을 차단하는 한편, 라오스 북부를 관통하는 북베트남 보급로인 ‘호치민 루트’를 격파하고 동시에 라오스 공산당의 박멸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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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인 전쟁포로 가운데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을 택한 이들은 다시 라오스 비밀전쟁에 투입됐다. 대만으로 향하는 중국 전쟁포로 송환선.




대라오스 공습으로 발전하다


그 ‘비밀전쟁’은 1964년 5월25일부터 대라오스 공습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로부터 미국은 1973년까지 9년간 대라오스 ‘비밀전쟁’에 무려 200만t에 이르는 각종 폭탄 700만개를 기껏 인구 400만명 남짓한 라오스에 투하했다. 미국의 대라오스 폭격은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였지만 모든 것을 비밀리에 진행한 탓에 심지어 미군 고위 당국자들마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군은 그 ‘비밀전쟁’을 통해 라오스 국민 한 사람의 머리 위에 0.5t에 이르는 폭탄 1.75개씩을 뒤집어씌운 셈이다. 지금까지 전사에 최대 규모 융단폭격으로 기록된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한 폭탄과 포탄을 모두 합친 게 49만5천t이었으니, 대라오스 공습에 사용한 200만t이라는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을 듯하다. 그 비밀전쟁을 위해 미군은 9년 동안 평균 7분30초마다 전폭기를 띄워 무려 58만344회나 출격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 결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달 분화구를 빼닮은 폭심지가 아직도 라오스의 온 천지를 뒤덮고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비밀전쟁’에 대해 시치미를 뗄 뿐 입을 연 적이 없다.









사라져버린 한국전쟁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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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베이 퇴역 군인의 집. 이곳에 수용된 중국 본토 출신의 한국전쟁 포로들은 저마다 몸에 ’반공 문신’을 새겨 대만 정부에 충성심을 과시했다. (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올여름 대만에는 유난히 태풍이 많았다. 한놈이 할퀴고 가면 일주일도 못 돼 또 다른 놈이 덮쳐왔다. 피해 복구를 할 겨를도 없이 마구 난타했다. 그 태풍과 태풍 사이를 뚫고 ‘특수대대 111’이라는 해묵은 과거사를 좇아 ‘타이베이 퇴역 군인의 집’(臺北榮譽國民之家)을 찾았다. 대만은 역시 잘사는 나라, 돈 많은 나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국민당 잔당들 가운데 일부가 살고 있는 타이-버마 국경 팡(Fang) 지역 반마이(Ban Mai)의 낡아빠진 합숙소를 연상하며 타이베이 퇴역 군인의 집을 찾았던 나는 들머리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규모 앞에 넋을 잃었다. “크다” “깨끗하다” “좋다”… 안내자를 따라 장수런(張樹仁·퇴역 소장) 주임 방으로 가는 동안 나는 감탄사를 흘렸다.

1975년 만든 이 퇴역 군인의 집은 현재 독신자 1083명을 수용하고 있다. 그이들 가운데 65%는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혔던 중국 본토 출신의 군인들이다. 당시 중국인 전쟁포로 2만1300명 가운데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투항’한 이들은 70%에 이르는 1만4715명이나 되었다. 그 중국본토 출신의 전쟁포로들이 1954년 1월23일 지룽항에 내리자 대만 정부는 반공의사라 치켜세우며 거국적인 환영식을 베푼 뒤, 필요에 따라 국민당의 현역 군인으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반공 의사’들이 하나둘씩 현역에서 제대하자 대만 정부는 이 퇴역 군인의 집을 만들어 오갈 데 없는 이들을 수용해왔다. 그렇게 퇴역 군인의 집은 중국 본토 출신 전쟁포로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다 1990년부터 더 이상 해당자들이 나오지 않자, 복무 중 부상당한 일반 전역자들을 함께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퇴역 군인의 집을 찾아가면서 지니고 갔던 ‘꿈’은 여지없이 깨졌다. 장 주임뿐만 아니라, 전쟁포로 퇴역 군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특수대대 111’을 아는 이가 없었다. 타이-라오스 국경, 타이-버마 국경을 이 잡듯 뒤졌고, 이 분야의 연구자란 연구자는 모조리 수배했지만 ‘특수대대 111’이라는 이름조차 아는 이들이 없었던 터라, 퇴역 군인의 집을 마지막 ‘수색지’로 여겼던 탓이다.

“국민당 전사(戰史)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어. 그런 부대는 들어본 적도 없고, 여긴 그런 부대 출신자들도 없어. 만의 하나 그런 부대의 출신자가 있다면 그걸 내가 모르겠어?” ‘행정원국군퇴제역관병보도위원회’(行政院國軍退除役官兵輔導委員會)라는 거창한 직함을 지닌 장 주임을 의심하며 여러 차례 캐물었지만, 그이는 오히려 나를 답답하게 여겼다.

역사는 그렇게 답답하기만 했다. 적어도 “전쟁포로들이 국민당에 충성심을 과시하고, 또 그들 가운데 일부를 라오스 국경으로 투입했을 때 중국 공산당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몸에 문신을 새겼다”는 CIA 요원 빌 영의 증언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곳에는 살아 있는 역사가 없었다.

모두 죽어버렸거나 아니면 아직도 누군가에 의해 깊이 감춰져 있거나!

한국전쟁은 아직도 온전한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채, 그렇게 멀고 먼 아시아 국경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뿐이다. 국제 정치는 한국전쟁을 끼고 온갖 비밀공작을 통해 ‘마술’을 부려왔지만, 한국에서는 50년도 더 된 그 전쟁을 놓고 아직도 “방아쇠를 누가 먼저 당겼나”라는 입씨름만 하고 있으니….












한국전쟁, 숨겨진 제2전선


[아시아 네트워크 | 정문태의 비밀전쟁 발굴2]
1951~52년 버마 국경에서 국민당 잔당의 중국 윈난 공격을 조종한 미국 CIA는 무엇을 노렸나


▣ 타이페이=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전쟁이 우리를 강요한다면, 모든 유효한 수단을 동원해 신속히 그 전쟁을 끝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전쟁의 최고 목표는 우유부단하게 끄는 것이 아니라 승리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이제 나는 군인으로서 생애를 마치고 사라진다.”

1951년 4월19일 맥아더 장군은 미국 의회에서 감정 섞인 퇴임 연설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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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난공격작전에 돌입하기 전 기념촬영을 한 국민당 잔당들(왼쪽). 한국전쟁 제2전선이었던 윈난공격작전에서 전사한 국민당 잔당들의 이름표(위). 도이 매살롱 국민당전쟁기념관에서 촬영했다.





맥아더와 트르만의 갈등, 그리고 장제스


같은 시각, 일단의 국민당 잔당들이 중국 윈난성 겅마(耿馬)를 향해 쳐들어가고 있었다. 앞서 4월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는 대통령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내 명령에 도전했다. 더 이상 그이의 반항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며 한국전쟁을 이끌던 맥아더를 연합군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1950년 11월24일, 맥아더는 도쿄 극동사령부에서 “유엔군이 적을 포위하고 강력하게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며 확신에 찬 승전보를 남기고 한국으로 되돌아와서 “크리스마스 전에 아이들(미군)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전선을 독려했다.

그러나 맥아더의 연설은 단 하루 뒤인 11월25일 저녁 중화인민공화국이 30만 대군을 앞세워 압록강을 건넘으로써 ‘전황 판단력 부재’를 드러내는 낯뜨거운 말이 되고 말았다.

당황한 맥아더는 승리(한국 통일)를 위해 ‘중국 본토 공업단지 폭격과 해안 봉쇄, 대만 국민당 군대를 동원한 중국 본토 공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염려해 “압록강 5마일 이남까지만 폭격 대상으로 삼고, 특히 중국 국경과 맞댄 압록강 작전은 한국군만을 동원하라”는 제한 공격을 거듭 명령했다. 1951년 초, 그동안 트루먼과 사사건건 대립해온 맥아더는 한국전쟁 휴전안마저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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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14일, 리미(李彌)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 잔당인 윈난반공구국군(雲南反共救國軍) 소속 중무장 2개 종대(縱隊) 2천여명이 버마 코캉(Kokang) 지역의 험난한 산악을 올라 중국 윈난성으로 쳐들어갔다. 국민당 잔당은 1주일 만에 국경도시 겅마와 티탕을 점령했다. 이어 국민당 잔당은 정체불명의 항공기들로부터 물자를 공수받으며 겅마 북부 60km 지점의 멍사 비행장으로 진격해갔으나, 인민해방군(PLA)의 역공을 받아 한달 만에 다시 버마의 와(Wa)주 몽마우(Mong Mau)로 후퇴했다.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는 한국전쟁 휴전을 놓고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타이베이에서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트루먼에게 국민당 정규군 3만3천명의 한국 파병을 강력히 제의했던 장제스(蔣介石)가 휴전협상을 부정하며 ‘한국 무력 반공통일’을 주장했다. 또 버마-타이 국경에서는 국민당 잔당 제26군사령관 뤼궈취안(呂國銓)이 2천 병력을 이끌고 몽삿(Mong Hsat) 본부를 떠나 다시 윈난으로 쳐들어갔다. 잔당들은 윈난성 시수앙반나(西?版納) 행정중심지로 방어망이 견고한 징훙(景洪)을 피해 멍하이(猛海)로 진격했으나 인민해방군의 역공을 받아 많은 희생자를 낸 채 1주일 만에 버마의 몽양(Mong Yang)으로 후퇴했다.


갈 때는 무기, 올 때는 아편을 싣고…


그렇게 한국전쟁에서 대만 국민당 병력을 이용해 중국 본토를 공격하고자 했던 맥아더는 1951년 4월19일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맥아더의 전략을 부정하며 맥아더를 해고했던 트루먼은 맥아더가 사라지자마자 비밀리에 국민당 잔당들을 동원해 중국 남부 윈난성을 공격했다. 한반도를 벗어나 약 2500km나 떨어진 중국 남부 윈난 지역에 한국전쟁 ‘제2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이미 1950년 초부터 미국 합동참모본부(JSC)의 건의에 따라 버마-윈난 국경지대로 쫓겨난 국민당 잔당을 비밀리에 지원해온 트루먼은 한국전쟁이 터지고 중국이 참전하자 다시 “인민해방군을 견제·분산시키기 위해 국민당 잔당을 동원해 윈난을 공격하자”는 미 중앙정보국(CIA) 정책조정실(OPC)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CIA 국장 월터 스미스는 “지나치게 위험하다”며 이 비밀계획을 거부했으나, 트루먼은 그 가치를 인정해 작전을 승인했다. CIA는 곧장 ‘오퍼레이션 페이퍼’(Operation Paper)라는 작전명 아래 비밀리에 국민당 잔당들을 지원하며 한국전쟁 제2전선을 형성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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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당 잔당 제8군 709연대장으로 윈난 공격에 참전한 뒤 대만 대사관 무관으로 여러 나라를 다녔던 슈쯔정 소장. 그는 ‘한국전쟁 제2전선’에 대해 확신에 찬 증언을 해 주었다.




“워낙 비밀리에 진행한 작전이다 보니, 소비에트를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미국의 버마 국경지역 국민당 잔당 지원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한국전쟁과의 연관성을 감지하진 못했다.” 오랫동안 버마 현대사를 연구해온 스웨덴 기자 베르틸 린트너의 말마따나 오퍼레이션 페이퍼는 철저한 암흑 속에서 진행됐다.

오퍼레이션 페이퍼를 위해 CIA는 타이에서 반공 홍보영화를 제작해온 전직 전략업무부(OSS) 소속 퇴역 군인 로버트 노스가 운영하는 파 이스트 필름(Far East Film Company)을 통해 자금을 제공하며, 사우스 이스트 아시아 서플라이스(South East Asia Supplies Corporation)로 하여금 탄약과 군수품을 조달토록 했다. 그리고 CIA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퇴역한 클레어 첸놀트(Claire Chennault) 장군 이름으로 자신들이 운영해온 시빌에어트랜스포트(CAT)라는 항공사를 통해 버마-타이 국경 몽삿에 자리잡은 국민당 잔당에게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CIA는 그 보급물자들을 오키나와의 CIA 비축창고 또는 대만에서 직접 타이까지 실어나른 뒤, 타이 정부를 쥐락펴락하던 실권자이자 CIA 끄나풀인 경찰 총수 파오 스리야논다(Pao Sriyanonda) 장군의 지원 아래 다시 버마의 몽삿으로 공수했다. 그 무렵 CAT는 주당 2회씩 정기적으로 대만~몽삿을 운항하면서 700여명에 이르는 대만 군사고문단과 정규군을 비밀스럽게 국민당 잔당 지원에 투입했다. 그리고 몽삿에서 되돌아나오는 빈 비행기로는 국민당 잔당들이 생산한 아편을 타이로 운반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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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IA는 자신들이 운영했던 항공사인 시빌에어트랜스포트(CAT)를 이용해 국민당 잔당 본부인 버마의 몽삿으로 무기를 공수하며 한국전쟁 제2전선을 형성해 나갔다.





인민해방군 분산시도, 실패로 끝나다


“1951년 4월 윈난 공격 때는 헬리콥터를 타고 온 열댓명도 넘는 CIA 군사고문관들을 봤어. 그이들은 리미 장군과만 이야기했으니, 우리 같은 일반 장교들이야 직접 말해볼 기회가 없었지만.” 딱 잡아떼던 도이 매살롱의 레이위톈(雷雨田) 장군은 세 번째 만남에서 말문이 열리자 CIA에 대한 거부감부터 쏟아냈다.

“그, 못된 놈들이야. 난 그놈들이 싫어. 자기들 필요할 때는 윈난까지 와서 별짓 다 해놓고, 우리가 쓸모없게 되자 본 척도 하지 않는 거야. 그런 일(국민당 지원)도 없었다고 잡아떼고.”

비밀문서로만 존재하여 지난 50년 동안 암흑 속에 묻혀왔던 CIA의 오퍼레이션 페이퍼도, CIA의 국민당 잔당 지원도 그리고 한국전쟁 제2전선의 존재도 모두 레이 장군의 입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한국전쟁 제2전선은 현재 타이베이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증언자를 통해 확인됐다.

“몽삿에 온 CIA 요원 두명이 리미 장군에게 ‘한국전쟁을 돕기 위해 윈난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내가 직접 들었어. 또 내가 윈난을 공격해 들어갈 때 그 CIA 요원들도 함께 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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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제스(오른쪽)는 1954년 제1차 송환 때 타이완으로 떠난 리미장군 후임으로 류유안린장군을 국민당 잔당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사진은 장제스가 국민당 잔당을 직접 지원해 왔음을 보여준다.





국민당 잔당 제8군 709연대장으로 윈난 공격에 참전한 뒤 대만 대사관 무관으로 여러 나라를 다녔던 슈쯔정(修子政·82) 소장은 타이베이로 찾아온 낮선 한국 기자에게 대뜸 “한국전쟁 제2전선 때문에 왔어?”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할 만큼 확신에 찬 증언을 했다.

“병력 수나 전투력만을 놓고 전선이 형성됐다 아니다를 말하지 않는 거야. 전쟁은 이기는 게 목표지만, 전선은 꼭 그런 게 아냐. 상대(인민해방군)가 말려들지 않았을 뿐이지, 국민당의 윈난 공격은 명백한 한국전쟁 제2전선이었어. 그건 처음부터 CIA가 제2전선으로 설계한 비밀 군사작전이었어.”

그렇게 CIA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 잔당들은 1951년 4월과 7월 두번에 걸친 윈난 내부 공격에 실패한 뒤에도 버마-윈난 국경지역에서 소규모 게릴라 전선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1952년 8월 들어 다시 리미 장군이 윈난 내부를 공격해 들어갔으나 인민해방군에게 밀려 버마로 후퇴함으로써 한국전쟁 제2전선도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


마약 보급선만 폭발적으로 확장시켜


이번 취재를 종합해볼 때, CIA가 오퍼레이션 페이퍼 아래 국민당 잔당을 동원했던 한국전쟁 제2전선의 존재 사실만큼은 분명하지만, 그 제2전선이 군사적·정치적으로 실질적 효과를 거두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국민당 잔당들은 CIA가 제2전선으로 노렸던 윈난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해 인민해방군을 견제하는 일도 또 윈난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켜 중국 공산당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도 모두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여 트루먼이 꿈꾸었던 한국전쟁 제2전선을 통한 인민해방군의 분산도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제2전선은 처음부터 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해왔던 미국 정보당국과 군 지휘계통의 부실한 한국전쟁 전황 예측이 낳은 또 하나의 낭만적 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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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버마 국경에서 살해당한 CIA 요원 세명은 CIA가 한국전쟁 제2전선을 만들고자 이른바 ‘오퍼레이션 페이퍼’라는 작전명 아래 국민당 잔당을 지원했던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다.





맥아더는 처음부터 “중국 공산당이 ‘국내 재건 문제’ ‘군사적 숙련도 부재’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의석 확보 열망’ ‘소비에트의 공·해군 지원 가능성 전무’ ‘북한의 소비에트 위성국 성격’ 탓으로 결코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게다가 CIA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거듭 군사적 개입을 경고했으나, 인민해방군의 움직임은 만주 지역에 국한되어 있고 중국공산당이 한국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함으로써 워싱턴 정책 결정권자들의 판단을 흐려놓았다. 말하자면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중국 불개입’ 오판에 이어 ‘제2전선 효용성’을 놓고 거듭 오판을 일으키면서 정보 판단능력 부재를 유감없이 드러냈던 셈이다.

결국 버마-윈난 국경을 통한 제2전선은 한국전쟁 전황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오히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남아시아의 마약 보급선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킨 비극적 유산만 남기고 말았다. 게다가 초기 4천명 남짓하던 국민당 잔당은 제2전선을 계기로 CIA의 전폭적 지원을 업고 국경 소수민족을 흡수해 병력을 1만2천여명으로 확대함으로써 지역 안보 문제에 심각한 걸림돌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Presidential Decisions for War〉 Gary R. Hess.

장수야교수(張淑雅.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타이베이) 인터뷰. Memorandum, Bradley to Secretary of Defence, 10 April 1950 and Annex to NSC 48/3, “United States objectives, policies and courses of action in Asia” 2 May 1951.

〈The Politics of Heroin in Southeast Asia〉Alfred W. McCoy.

Rankin to Department of State〈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1952-54.

〈Burma in Revilt〉Bertil Lint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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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omments
sogman 2006.06.17 02:09  
  직접 쓰신것은 아니겠지요..야간의 오류가 있는 글입니다.CIA가 아닌 OSS(CIA의 전신) 입니다.그리고 "그린베레"가 아닌,OSS요원들(모두 현직 군인들이였습니다)
KIM 2006.06.17 02:27  
  물론 직접 쓸만한 능력이 안되는데요^^

서두에 그 출처를 언급하였고^^ 정문태..라는 분의 기사가 중심이 된 게시물입니다.

그렇겠죠. 그린베레는 케네디 이후 창설 되었을테고..CIA 창설 연도가 어떻게 되죠?
KIM 2006.06.17 02:48  
  필자가 큰 의미에서 CIA/그린베레로 엮어둔 듯 합니다.

결국 배경이 국공합작 및 2차대전 종전, 장제스의 패퇴 이후, 50년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발을 기점으로 한 50년대-60년대 상황이라 CIA 및 그린베레(전신)로 서술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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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 하에서 국가안전보장법에 의하여 설립된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기관이다. 1942년에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미국에 조직된 여러 정보수집기관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기 위해 설립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미국전략사무국)를 그 전신으로 한다.

OSS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첩보요원을 통해 작전지역에 관한 대외정보 수집, 역선전 역 정보 등의 활동을 벌이며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45년 종전과 함께 해체되었는데, 트루먼 대통령은 이 요원을 기반으로 1946년에 국가정보원을 설립했으며, 이듬해인 1947년에 NSC(National Security Council:국가안전보장회의)를 설립하고 그 산하에 CIA를 발족시켰다. 설립목적은 국가적 정보수집 및 특수공작을 수행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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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베레의 출발은 195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대전 중 적국에서 기간에 관계없이 비정규전적인 게릴라 활동을 펼치며 많은 전과를 거둔 `그림자 전사'인 전략사무국(OSS)을 해체시키고 중앙정보국(CIA)을 창설했다.
그러나 6·25전쟁에 참전하면서 미 육군에서는 여전히 OSS적인 부대를 더욱 필요로 했다.

1952년 미 육군은 특전부대를 창설하고자 했다.
창설의 주역은 OSS 출신의 아론 뱅크 대령과 러셀 보크만 대령. 그들은 비정규전적인 게릴라 형태의 부대를 미 육군에 적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뱅크 대령은 창설을 위해 부대원을 모집하는 데 있어 신병들을 원하지 않았다.
2개국어 이상 구사능력과 계급은 하사관 이상, 기본적으로 공수낙하 능력 등 뛰어난 체력과 전투기술, 경력은 물론 지식, 사명감을 요구했다.
까다로운 조건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매우 특별한' 것임을 쉽게 알게 해준다.

때문에 1952년 6월19일 포트 브래그에서 최초의 특전부대인 제10 특전단이 10명으로 창설 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특전단에는 수백명의 지원자들이 몰려들었으며, 육·해·공 어디를 통해서든 적 종심 깊이 침투, 기간에 관계없이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는 대원들이 충분히 확보됐다.

철저히 부대임무와 수행능력에 맞춘 부대원 선발과 교육훈련은 그들 스스로 미 육군의 엘리트 중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고 육군 당국 또한 충분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제10 특전단은 1953년 첨예한 냉전의 현장 서독으로 파병되었으며, 일부가 남아 곧이어 창설된 제77 특전단(1960년 창설된 7특전단의 전신)의 근간이 되었다.
오키나와에 위치, 극동지역에서의 작전을 담당하는 제1 특전단은 1957년 창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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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살고싶지만겁나 2006.06.21 04:06  
  빠~~~른 업데이트 부탁 드립니다. *^^*

기다리고 있는데 괴롭습니다. ㅎㅎㅎ

야한 얘기 좀 마니 해주세요 ㅋㅋ
KIM 2006.06.21 18:50  
  야~~~~~~~~~~~~~~~~~~~~~~~~~^^
덱도이 2006.07.05 21:43  
  빠뚜시암이 어딘가요?(태국애들도 잘 모르던데..)
푸치파 근처를 말씀하시는지...
킴님의 글은 항상 잘 보고 있읍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한번 뵙고싶네요
KIM 2006.07.06 00:41  
  저역시 함 찾아보았습니다. 간신히 찾았네요. 타이인들이 이 지역과 이러한 히스토리를 모르는 것은 당연할 듯 싶습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숨겨진 역사의 한 부분일테니까요. 아래 글 보시면, 모르는 것도 당연할 듯..마지막에 지도 게시하니 참조하시고, 푸치파보단 도이파탕에 가까울 듯 싶습니다. 9,10월 경...이 지역까지 달리 계획입니당^^ 그 때..리얼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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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CARD FROM THAILAND
At Siam's Gate
Few in the outside world know about it, but Pratu Siam in Thailand was a once key frontier in a secret war.

By Bertil Lintner

It must be one of the most ruggedly beautiful places in Southeast Asia--Pratu Siam, the Gate of Siam. Surrounded by steep limestone cliffs, this mountain pass on the border of Thailand and Laos looks like a scene from a Chinese painting. In the canyon far below, mist and clouds drift along the Mekong.

Picturesque it may be, but Pratu Siam and the nearby village of Phatang are unknown to tourists. Until well into the 1990s the area was off limits to outsiders. Up to just a few years ago, even local maps didn't show Phatang or the Gate of Siam. Getting here is not easy: The 15-kilometre road from the lowlands is steep and potholed, and almost impassable.

All that is a legacy of the past, when Phatang preferred to keep visitors out. That's because this area was once a vital frontier of the Cold War in Asia. In the 1960s and 1970s, United States forces used it as a base for their "secret war" aimed at countering Lao support for communist Vietnamese forces. In later years, fighters based here helped the Thai army defeat communist insurgents.

It is only now, as time eases the tensions of the past, that people who took part in those operations are willing to talk more openly, even if they refuse to be named. "We want to live in peace now," says one veteran of the secret war who lives in northern Thailand. "The past is history." Indeed, today's Phatang is a showcase of tranquillity. Its 3,000 inhabitants grow vegetables, fruits and tea, and make cherry and plum wine to earn cash. Visitors who do make it up may even be invited to share a bottle of wine.

Phatang's role in Southeast Asia's geopolitics dates from the early 1960s. At the time, Laos had been internationally recognized as neutral in the war raging in neighbouring Vietnam, and no foreign troops were supposed to be in the country. The reality was different: In the north, North Vietnamese soldiers were fighting alongside their Lao communist allies. Elsewhere, the U.S., or, more precisely, it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had built up a 30,000-strong "secret" army, whose number included a battalion of Nationalist Chinese soldiers.

Disguised as a Lao regiment and codenamed "Bataillon Sp&eacute;ciale 111" it was made up mainly of Chinese soldiers captured by the U.S. and its allies in the Korean War, and who had transferred their loyalties from Beijing to Taipei. About 1,600 wound up in Laos fighting for the Americans and conducting forays into China.

According to another veteran of the war, heavy fighting around their main base in northern Laos forced an evacuation across the border into Thailand. Phatang, which was already an established Nationalist-Chinese settlement, was the ideal choice for a rear base. From the vantage point of the Gate of Siam, a watch could be kept as Kuomintang troops infiltrated Laos.

After the end of the Vietnam War, battle-hardened Chinese troops from Phatang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battle of Khao Ya, a Communist Party of Thailand stronghold in the Khao Khor mountains east of Thailand's central plains. Those who took part in that operation were granted Thai citizenship. Few, seemingly, chose to settle in Phatang.

In recent years, another group of Chinese has descended on Phatang: dissidents from the 1989 pro-democracy demonstrations in Beijing's Tiananmen Square. "They had heard about Phatang, and thought it was a Taiwanese base from where they could continue to the West," says a Westerner who helped some of these dissidents escape from China. Many are still stuck here.

The road to Phatang may be steep, but it is an even steeper climb up to the actual Gate of Siam. Few outsiders make it to the top, but that, too, will change now that Thai tourists are beginning to discover the area.

It's doubtful that many will ever make it to the most important Nationalist Chinese memorial in northern Thailand. Hidden behind trees off a small dirt track outside the town of Chiang Khong, a huge arch commemorates soldiers who died in the secret war, mainly in Laos. Two hundred of them now rest in a cluster of tombs, all facing towards China. Their war, after all, was secret, and they weren't supposed to be here.

This article first appeared in the Far Eastern Economic Review, September 16, 2004
덱도이 2006.07.14 13:28  
  설명 고맙습니다
근데 영어가 약해서리...
기회가 되면 같이 함 가보고 싶네요
근데 5월에 휴가를 갔다와서 사표쓰기 전엔 시간이 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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