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다섯번째 여행 (양평동 뚝방동네)
여행을 시작한지 어언 50년이다.
이제 여행의 이력도 조금은 붙었고
노하우도 조금 생겼다.
돌이켜 보면 참 즐거운 여행이었다.
거친 음식이나 부드러운 음식이나
쓴 음식이나 단 음식이나
나름의 맛과 에너지를 주었고
작은 토굴이나 멋진 호텔이나 그 순간순간 마다
편안한 쉼을 주었다.
때론 달구지로 때론 침대 비행기로
지구 곳곳을 옮겨 다니는 것도 신나는 경험이었다.
두툼한 점퍼나 살이 비치는 셔츠나 아름다운 패션이었고,
어둠 속 별빛이나 눈부신 햇살에 비친 수평선이나
지구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작은 몸을 덮을 듯한 거대한 해일이나 살을 에일듯한
눈보라도 매우 짜릿한 좋은 경험이었다.
이런 좋은 여행의 기회를 주신 신께 진심 감사 드린다.
이제 지구 여행 30년 남짓 남았을 것이다.
육체를 떠나 영혼이 갈아타는 새 열차를 타고 지구를 떠나
새로운 형태의 신비한 여행이 시작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지난날의 여행을 되새겨 보며
단 한번뿐인 나머지 지구여행을 다시 한번 계획 해본다.
생애 다섯 번째 여행 (양평동 뚝방동네)
삶은 여행의 연속인 것 같다.
집을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고 한다면
이 경우도 여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봄이 되어 아버지는 같은 상이군인인 (현재는 국가 보훈 자)
쑥쇠 아버지와 함께
철거민 촌을 벗어나 철길을 건너 산중에 움막을 쳤다.
넓은 풀밭에 불을 지르고 땅을 갈아 고구마를 비롯해 이것 저것 심었다.
고구마 순이 뿌리를 내리고
고추가 엷은 초록으로 물들을 무렵
하늘이 검어지고 비가 쏫아진다.
천둥소리와 함께 검은 밤을 밝히며 갈라지는 불빛이
빗소리에 섞여 마음을 춤추게 한다.
이상스레 20대 무렵 나이트 클럽에 가서 춤을 출 때는
그 때의 장면이 떠오르며 미친 듯이 도취되어
온 몸이 땀에 젖을 때까지 춤을 추곤 했다.
장소와 상황은 다르지만 느낌은 같은 기분이 든다.
방법과 모습은 다르지만 삶이란 다 나름의 예술인가 보다.
물이 차오르며 부뚜막에 솥 단지가 떠오르고 퍼내도 퍼내도 차오르는
물길은 11살 나와 28살 엄마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판자로 막은 문턱을 넘어 이불을 적시며 물이 차 올랐지만
엄마와 나는 무엇을 건지려는지 계속해서 양동이로 물을 퍼냈다.
젖은 이불 위에 옹크리고 밤을 샌 아침
움막의 천으로 된 문을 밀치며
쑥쇠 아버지가 얼굴을 내민다.
“우리 집도 다 떠 내려 갔어요.”
하며 쑥쇠아버지의 눈가가 벌겋게 물든다.
갑자기 엄마가 소리 내어 엉엉 운다.
나도 울었고 동생들도 덩달아 소리 내어 운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맑은 햇살이 들었고
빗길에 쓸려 파묻힌 고구마 순 몇 잎이 삐죽이 얼굴을 보인다
그렇게 해서 개구리 뒷다리 묶어 가재 잡던 동구릉을 떠나게 되고
새로운 여행지 양평동 뚝방으로 향하게 됐다.
엄마와 동생들은 먼저 버스로 떠났고
앞마을 수남이 아버지의 연탄 손수레에 가재도구를 싣고
그 뒤를 밀며 나도 떠난다.
우리학교 인창국민학교 앞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지나고
교문 사거리를 지나 힘차게 손수레를 밀며 밀며
지난날 도라꾸 타고 울며 넘었던 망우리 고개를 웃으며 넘는다.
그래도 눈가엔 땀이 자꾸 자꾸 흐른다.
버스를 타면 차라리 주그러 가요(청량리 중량교 가요가 그렇게 들린다). 하며
외치는 미술모자 쓴 차장누나들의 그곳을 꺼꾸로 간다,
중량교 지나 시조사 지나 청량리 지나 동대문을 지나 종로 통을 지나며
이순신장군 만나고 훗날 해태제과 껌 딱지 주어서 오게 될 세종문화회관을 스치며
국내 최고 여 학부 배꽃여자대학을 지나고 동교동파 서교동파를 지나
제2 한강 교를 건너며 나를 단련시키고 인생의 기초를 만들어 줄 한강 백사장을 바라보며
당산동지나 양평동뚝방 밑에 도착하여 그토록 보고 싶었던 미운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당시 양평동에서 메키리 한 냄새를 풍기는 미풍회사경비로 근무하고 있었다.
양평동뚝방 동네는 신기하고 이상한 동네다.
뚝방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판자집들이 수 킬로미터에 걸쳐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나의 인생 2기가 시작된다.
길어 졌네요.
뒷 이야기는 담에 시간이 있을 때 올려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