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무엇인가? 매트릭스인가? 시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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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무엇인가? 매트릭스인가? 시온인가?

봄길 0 471

나는 몇몇 포털에서 서너 개의 닉네임을 쓰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흐르는 강물'이다. 이 닉네임은 '다음'에서 7년 째 쓰고 있는 것이다. 꽤 멋있어 보이는지 그 후 제법 짝퉁들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 다음에 많이 쓰는 것이 '보헤미안'이다. 아는 것처럼 보헤미안은 대표적인 유랑민족이다. 그런데 이런 보헤미안이나 집시들은 그 역사적 애환에도 불구하고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모습으로 우리 마음에 각인돼 있을 경우가 많다.

우리는 유랑민족들에 대해 왜 그런 느낌을 가지게될까? 아마 그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여행자적 속성에 그 연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에게는 인간이란 원래 나그네에 다름이 아니라는 공감이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삶을 보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기에 신앙이란 자주 ‘구도’라고 일컬어진다. 이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고전이 바로 '요한 번연'의 '천로역정'이 아닐까싶다.

종교의 진정성은 종종 바로 그 구도자적 성격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구도하지 않는 종교는 그만큼 소위 사이비이다. 학술적으로도 세속에 젖은 종교를 대개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무속을 종교로 분류하지 않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 속에는 구도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인이 길을 나서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정주하는 데만 익숙하다면 그것은 세속성이 그 사람을 지배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종교는 사실상 종교의 핵심을 포기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오늘날 기독교든 불교든 모든 종교가 너무나 세속화되어 그것이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행에는 종교와 닮은 속성이 있다. 철저하게 정주를 거부하고 유랑하는 것을 민족적으로 선택한 보헤미안이나 집시들이나 쿠르디안들은 자기의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주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은 이 땅에서 자기 영토를 가지지 못하였다.

정치적인 결단으로 그와 같이 사는 민족들을 보라. 거기에 비해 오늘날 신앙을 결심한 종교인들이 훨씬 더 이 땅에 정주하려고 하는 행태는 얼마나 가소로운가? 모든 유랑민족들은 자유를 위해 기꺼이, 정주한 인종과 민족들에게 박해와 멸시를 당하고 있는데 종교는 멋있게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종교야말로 모든 이권의 꼭대기에 자리를 펴고 있음을 본다.

중세 때 정치적 이합집산이 있을 때마다 유랑민족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온갖 박해와 저주를 퍼붓는데 누가 앞장 서 있었던가? 그것은 바로 타락한 중세교회이었다. 그들은 세속권력과 발맞추어 자기의 영지를 넓혀나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 많은 수도원과 교회의 영지는 바로 유랑민족들을 불꽃과 단두대에 내어던지고 얻은 전리품이지 않았던가?

그렇다. 종교는 길을 찾아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대신에 그들은 도시의 안일만을 쫓아다녔다. 반대로 세상의 약자들은 종교가 져야할 십자가를 영문도 모른 채 어깨에 지고서는 고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성경을 보면 신자들에게 너무나 자주 나그네와 과부를 대접하라 말하고 있다. 참된 신앙은 그 자체가 길을 찾는 나그네의 삶이요.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경은 참된 교회를 위해 그와 같은 가르침을 강조하였으리라.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회 자신을 위한 권유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스스로 그 가르침을 배신하였다.

이것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 제3제국이 유대인들과 집시와 보헤미안들을 몰살시킬 때 독일 교회는 어디에 있었던가? 성경은 인간을 나그네라 하였고 그리스도인에게 나그네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가르쳤지만 타락한 종교는 이권을 위해 오히려 나그네들을 핍박하였다.

여행자에게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사실 여행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두 개의 고향이 있다. 떠나 온 고향이 있고 자기의 혼이 그리워하는 알지 못하는 고향이 있다. 어쩌면 이 두 개의 고향이 그들에게 모순이 된다는 것이 애초부터 비극일지도 모른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5000여 년 전 바빌론의 수도이면서 고대 세계의 가장 번성한 도시인 '우르'를 떠나 알지 못하는 세계를 향해 여행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성경은 그것을 신앙이라 하였고 아브라함은 그로 인해 모든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성경은 신앙이 영원을 향한 여행임을 나타내 보였다.

그는 항상 두 가지 고향 사이에서 고뇌하는 중간자였다. 그는 그가 떠나 온 과거의 고향을 찾아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가 진정으로 이루어야할 미래의 고향을 향해 끝갈 줄 모르는 여행자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사이에서 고뇌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도 마찬가지의 심리적 갈등을 경험한다. 한편에서는 현실의 고향이야말로 여행자에게 그가 돌아가야할 근본적인 고향이라고 다그친다. 잊을만 하면 방랑을 멈추고 과거의 고향을 찾아 돌아오라고 속삭인다. 흡사 로렐라이의 노랫소리처럼...

그런가하면 마음의 다른 한편에서는 진정한 고향을 찾고 또 찾도록 부추기고 있다. 멈추지 말라고 말한다. 소돔을 향해 다시 돌아서지 말라고 경고를 한다. 인생은 미래를 향하여서만 나아가야할 여행임을 잊지말라고 소리친다. 나온 바 그곳은 참된 고향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는 사이퍼와 같이 다시금 매트릭스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빨간 알약을 먹고 시온을 선택한 니오처럼 살려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속삭임 중에 어느 것이 한낱 미몽에 불과한 로렐라이의 유혹인지 어느 것이 오딧세이아가 그토록 꿈꾸던 이타카를 향한 여행일는지 항상 고민한다. 시온은 어디인가? 아니 시온인가? 매트릭스인가? 내가 가야할 곳은...

우리는 여행자인가? 아니면 여행을 하나의 소일거리로 경험하는 자들인가? 어쩌면 우리는 원래 보헤미안이어서 여행자이어야만 하는 건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은...그것이 종교이든 아니면 생의 철학이든...여행자로 사는 것만이 진실한 것이고 우리의 정체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에 너무 많은 기대를 갖지 말라. 그것은 선택이 아니고 필연일지 모르니까? 멈추어 서지 말라. 어느 곳에도 쉴 곳은 없다. 죽음만이 어쩌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비자일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손에 쥔 여권이 우리의 인식표이다.

거기에 실패가 있고 거기에 고통이 따를지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저기 저 산을 넘으면 온갖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속여 말하지도 말라.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여행자에게는 여행의 거친 고난만이 자랑이 되리니...

여행은 종교적 열의이며 영원을 향한 발걸음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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