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차나부리에서는 휘파람을 불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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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차나부리에서는 휘파람을 불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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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개 같은 일이 참 많이 일어난다. 오늘 다루려고 하는 개 같은 경우를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 지루한 설명이 필요하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총 26 만 명 중 10 3 천 명이 죽었다. 1942 년 여름부터 시작된 방콕과 양곤 간 415 km 에 이르는 죽음의 철도 공사현장에서의 이야기다. 죽음의 철도 (The Death Railway)란 현재 관광지가 된 칸차나부리와 남똑 구간뿐 아니라 이 두 도시간에 이어진 전 철도구간을 의미한다.

 

일찍이 버마를 식민 통치했던 영국은 이 지역의 철도 공사를 고민 끝에 포기했었다. 지형이 너무 험난해 공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지역을 점령하자마자 도쿄의 대본영은 철도공사 강행을 명령했고, 이 명령을 접수한 일본제국군(Imperial Army) 남양방면군 총사령부는 현지 주민 20 여 만 명과 전쟁포로 6 만 여명을 강제 동원해 죽음의 철도 공사에 착수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배경은 바로 이 죽음의 철도 구간 중 방콕 기점 100 km 정도 서부에 위치한 칸차나부리지역의 한 철교 공사장이다.

나는 이 영화를 결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군인의 멋을 부각시키기 위해 역사의 비극을 말도 안되리 만큼 축소시키는 우를 저질렀으니까. 아니, 우를 저지르고 있는 건 영화가 아니라 칸차나부리의 그 철교를 기차를 타고 건너가면서 열심히 휘파람 행진곡을 불러대고 있는 여행객들인지도 모르겠다. 

 

1941 12 월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과 때를 같이 해 감행한 싱가포르 점령작전으로 대규모의 연합군 포로가 발생하는데 영국군이 대부분인 이 연합군 포로들이 그로부터 6 개월 뒤 죽음의 철도 공사현장에 투입된다.          

 

당시 연합군 포로들은 그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적이고 신사적인 대우를 받지 않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포로의 약 20 % 1 3 천 명이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또 위험한 공사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통계가 상황의 처참함을 잘 말해주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연합군 포로들보다 더 혹독한 굶주림과 매질에 시달리며 짐승만도 못한 취급 속에 죽어갔던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영문도 모른 채 그 공사에 강제 동원됐던 약 20 여 만 명에 이르는 동남아의 현지 주민들이다.

 

이들 중 공사기간에 죽은 사람들은 무려 8 만 여명, 그러니까 사망률이 연합군 포로 사망률 20 % 의 두 배에 달하는 40 % 에 이른다. 역사상 존재했던 어떤 포로수용소에서도 이 정도의 대규모 인원이 이처럼 짧은 기간 안에 이렇게 높은 사망률을 기록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전쟁의 비극을 한낱 군인정신으로 포장한 낭만적인 영화 따위가 과연 죽음의 철도의 그 참상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이 철도 공사의 무식한 강행은 아마 그 이듬해 창설된 버마 방면군의 인도침략 구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임팔작전의 실패로 이 새로운 침략전쟁에 참여한 버마방면군 제 15 군 휘하의 3 개 사단 소속 대부분의 병력이 버마의 정글 속에서 끔찍한 죽음을 당했지만, 당시 일본은 동맹국 독일과 의논끝에 인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한다. 영국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고 동남아시아 자원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인도침략전쟁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죽음의 철도는 바로 이 침략전쟁의 군수물자 및 병력의 수송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1945 년 종전 후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관리하던 병력은 무장해제와 동시에 전범재판에 회부된다. 아마 당시 이곳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그래도 일본의 황국신민이었으니만큼 약간의 행세를 하는 지위를 부여 받았던 모양이다. ‘포로 및 강제 노역자 감시원이라는 직책이 그것이다.

 

그 알량한 행세를 한 덕분에 이 불쌍한 조선 청년들은 전쟁 종료와 함께 전범 재판소에 끌려가 재판을 받았다. 그 중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포로감시 활동을 하던 청년들은 포로학대라는 죄를 뒤집어 쓰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면 그 사형을 당한 조선 청년들에게 포로학대를 명령하고 죽음의 철도 공사를 추진해 10 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장본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이제부터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개 같은 경우다.

 

당시 잔혹한 포로 학대로 가장 악명을 떨쳤던 현장 책임자 한 분과 가장 무식한 작전계획(임팔작전)으로 모든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높은 분 한 분 딱 두 분만 예를 들겠다.

 

히로시 아베 (대일본제국 육군 중위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속 장교이자 죽음의 철도 송크라이 구간 현장 책임자로서 무려 3000 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사망에 이르게 한 무자비한 일본군 장교의 전형. 1948 B/C급 전범으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싱가포르 창이 교도소 수감 중 1948 15 년 형으로 감형. 1957 년 석방. (이렇게 살아나는 바람에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과거 전쟁범죄를 참회하는 말도 하는 등 칭찬도 받음)  

 

무다구치 렌야 (대일본제국 육군 육군중장 버마 방면군 소속 제 15 군 군사령관) 연대장(대좌) 시절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1937 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 무다구치 중장께서는 일단 연합군에 연행되어 싱가포르 전범 재판소에 회부되기는 했는데 불기소 처분으로 곧 석방돼 잘 먹고 잘 살다가 1966 78 세를 일기로 작고하심.     

 

불기소 처분된 이유가 뭐냐고? 인팔작전에 실패해 3 만 명이 넘는 일본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연합군의 작전과 사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공로로 정상참작이 됐다나 뭐라나……       

 

그러니까 결론은 이렇다. 

 

군속으로 강제로 끌려와 명령에 따라 포로를 감시하던 조선인 청년들은 B/C 급 전범으로 분류돼 사형이 집행됨.

 

당시 스무 살짜리 (히로시 아베가 1922 년 생이고 철도공사 시기가 1942 년이니까) 육군 중위는 B/C 급 전범으로 기소돼 복역하다가 12 년 만인 1957 년 석방됨  

 

이 모든 비극을 초래한 현지 주둔군 총사령관 육군 중장 놈은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고 연합국과 일본 양 쪽으로부터 공로자 대우를 받으며 천수를 누림.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나?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칸차나부리에 가서 그 철교를 건너갈 때 휘파람 행진곡을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홧김에 한 잔 걸치고 정신 없이 돌아다니다가 연합군 묘지 상석 위에다 오줌이나 갈기고 오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7 Comments
그리운별하나 2010.02.20 11:20  
좀 다른이야기 지만...우리나라 5,6공 대통령 두사람이 사형은 커녕 감옥갔다가 중간에 풀려나오는것을 보고..당시...아버지께서는  '하여간 살인강도짓거리를 하더라도 크게 한놈은 사는구나'라고 자조적으로말씀하신게 생각나는군요..
구엔 2010.02.21 00:55  
처음에 칸차나부리에 갔을때에는, 그냥 여기서 일본애들이 다리를 만들었거니 하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다리 끝에 있는 항공기용 투하폭탄의 모형도 크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다리 및으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관관객용 놀잇배도 여기 왜 왔나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었지요.
정동주씨의 콰이강의 다리를 읽으면서, 칸차나부리에는 조선인의 한이 서려있다는 사실을 처음알았습니다. 학도병도 지원병도 아닌, 단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외국인 선교사와의 소통을 위해 주로 배운 영어로 연합군(주로 영연방군)의 포로감시를 위해 수 많은 조선청년들이 군속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중 일부는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거나 아니면 아직도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A급 전범으로 도쿄군사재판에서 확정된 28명 가운데 단 7명만이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B,C급 전범으로 기소된 148명 가운데 23명이 사형을 언도받았다고 합니다. 나머지 125명은 싱가폴 창이형무소에서 일본의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되어 형기를 마치고 그냥 일본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B,C급 조선인 전범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냥 죄수 취급했다고 합니다.
슬픈,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입니다.
sarnia 2010.02.21 02:35  
관련자료 확인 후 조선인 군속들의 직위명칭과 적용된 전범 급수를 수정했습니다. 다만 형식이 모집이었다 하더라도 당시 도쿄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조선 각 시.군에서 3~6 명씩 차출해서 3000 여 명을 모았기 때문에 '강제'라는 용어는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영어소통능력이 자격조건의 하나였으므로 학력이 높거나 중상류층 자제들도 많았는데 그 중 고위관료및 친일 지식인 사업가의 자제 300 여 명은 징집에서 제외시켰군요.

불공정한 재판결과는 승전국이건 패전국이건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후 정치적 협상의 산물이고 그 역학관계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식민지 청년들이 희생된 것이지요.

제가 올해 가을 칸차나부리와 생클라부리에 갈 예정이라 여행자료를 모으던 중에 새로 발견한 사실이지만, 그 곳에 있다는 연합군 묘지 앞에서 어떤 기분이 될 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태국은 자주 가고 싶은 나라인데 제가 사는 곳에서는 비행시간만 거의 스무 시간이 걸리니 1 년에 한 번 씩 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겠지요.
sarnia 2010.02.22 01:50  
별로 쉬운 방법은 아니지만 톤부리에서 출발하는 3 등열차를 타고 가 보려고 합니다 (에어컨 달린 3 등열차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칸차나에서 쌍클라부리를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할까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시간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2 년 전 방콕갔을 때 사이얌 패라곤이니 월탯같은 곳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 게 후회가 됩니다. 아마 덥다는 핑계로 그랬겠지만 그런 곳들은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거든요. 이번에는 시내 교통수단을 하나 이용하더라도 BTS 나 지하철보다는 고풍스럽게 생긴 빨간색 버스를 주로 이용할 것 같습니다.
kapu 2010.02.22 02:04  
그리 밟히면서 악착같이 살려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믿어버리거나 더 나아가면 다칠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눈을 감고 살고 싶은가? 눈을 뜨고 살고 싶은가? 이것은 다른사람의 눈에 달려있는 것인가?

아 또 맘이 찹찹하네여...
해피엘리스 2010.04.26 09:59  
일본 외놈들 원래 싫어했지만 칸차나부리가서 더 싫어졌어요.. 사진 전시해놓 곳에서 보고있는데 일본 젊은 관광객들이 사진보며 웃으면서 뭐라고 지들끼리 이야기 하는데 뒤통수 때리고 싶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독고현 2010.04.30 09:23  
오~^^**^^

오랜만에 들어보는 꽈이마치..잘 보고 잘 듣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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