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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

봄길 3 168

어중간한 상고를 다니다 3학년이 돼서야 대학을 가려고 마음을 굳혔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가는게 쉽지가 않았는데 끼니잇기도 어려운 형편에 그러자니 오히려 친구 녀석들이 나를 만류했다. 대학 아무나 가는게 아니라고 나를 꼬드긴다. 그렇지만 나는 이대로는 안된다고 결심을 굳혔다.
74년도는 예비고사를 치른 후 본고사에서 실패했다. 75년도에는 폐병이 도져서 9월까지 각혈로 핵핵거리다 중순이 돼서야 일어났다. 보수동 책골목에서 헌책들을 몇 가지 사모았다. 예비고사를 대충 치르고 다시 본고사를 위해 4과목 두권씩 책을 사모았다.
까짓거 40일 동안 죽기 아니면 까무르치기로 해보자고 했다. 3시간씩만 자고 40일을 밀어붙혔다. 결국 k대 사범대 과학교육과를 들어갔다. 그런데 상고나온 놈이 과를 잘못 택했다. 결국 자취방에서 굶기를 밥먹듯하다 4년 만에 자퇴했다.
그리고 또 앓아 누웠다. 끙끙대며 한 일년보내다 26살이 돼서 다시 시작했다. 6년만에 대학가려니 이번에는 새로 생긴 과목이 7과목이나 되었다. 그렇지만 깡다구로 밀어붙여 집 가까운 b대에 입학했다.
10년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은 6년 걸렸다. 대학 다니던 동안에는 거의 장학금이란게 있어 굶는 문제만 해결하면 대충 되었는데 대학원은 쉽지가 않았다. 고생에 이골이 났다.
그리고 그 사이에 결혼도 하고 애도 생겼다.
아내는 특수교사였다. 결혼과 함께 교사를 그만 두게 했다.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며 나는 칠천도란 거제도의 낙도에 10여명 되는 교회 전도사로 일을 시작했다. 바지선을 타고 육지를 왔다갔다 하였다. 첫 애가 100일 채 되기전이었다.
애를 위해 남양 요쿠르트를 사서 한번에 다 먹일 형편이 안돼 두 번 나눠먹이는 생활을 하였다. 교인 10여명이 모두 노인들이라 정부구호양곡을 받아먹었다. 그 쌀을 얼마씩 모아서 가져오면 그것으로 밥을 지어먹었다.
새벽에 어린 아내를 위해 내가 밥을 지었다. 쌀에는 벌레들이 너무 많았다. 작은 공기에 고물고물 기어다니는 쌀벌레를 잡아 모으면 두 명 먹을 밥 한번 할때마다 바닥에 수북히 쌓이도록 벌레를 잡았다.
냄새가 나서 밥을 지을 때면 식초 한방울을 떨어뜨리는 센스도 그 때 익혔다.
노인들과 술주정뱅이들 그리고 간질을 앓고 있는 나와 동갑인 과부며 모두가 사랑스럽기만 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 너무 고마워했다.
부산의 학교로 떠나기전 왠지 느낌이 안좋았다. 아내에게 고개 너머 대곡의 미영엄마를 잘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미영엄마는 심한 간질환자이다. 속수무책으로 살고 있던 그녀를 부임하고 얼마후 부산으로 데려가 장미회를 통해 약을 받아먹도록 하였다.
발작의 횟수나 강도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염려가 되었다.
금요일날 바지선을 타고 섬으로 들어오는데 마음이 쿵쾅거리고 불안하기만 하다. 집에 전화를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금 가니 당장 대곡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백일이 된 아들을 업고 아내가 길가에 서 있다.
아니나 다를까 미영엄마가 발작을 일으켜 죽었다고 한다. 아침에 죽었는데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아 아직도 경찰과 의사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화가 치밀었다. 방문을 열라고 했다. 모두가 머뭇거린다. 혼자서 방에 들어갔다. 미영엄마가 엎드린 채 죽어있었다. 발작을 할 때 아무도 없어 솜이불위에 코를 박은 채 엎어져 질식사한 것이다.
나서 처음 시신을 수습하였다. 대충 귓전으로만 듣던 일이다. 비둔한 미영엄마는 벌써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밖에서는 몸을 바로 펴야 염습을 할 수 있다고 아낙네들이 훈수를 한다.
약한 내 팔힘으로는 어림이 없다. 다리와 굽어진 팔을 펴기 위해 나는 양무릎과 양팔을 다 써야만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눌러 폈다. 그러자 우두둑거리면서 팔과 다리가 펼쳐졌다.
그곳에 1년을 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할 사람들을 그곳에서 보았다.
그러나 나를 부르는 곳이 또 있었다. 그곳은 재활원이었다. 그것도 장애인들만 모은 재활원이다. 그곳에서는 나만이 아니라 내 아내도 기다리고 있었다.
150명이나 되는 장애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개 이중 삼중장애를 가진 아이들이다. 그 가운데는 단지 시각장애, 청각장애만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버려진 그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둘째를 낳아 그곳에서 아이 둘을 함께 키우며 그들을 보살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가장 작은 수고를 하여도 그곳에서는 큰 열매들이 나타났다. 천사들이 거기에 모여살았다. 기꺼이 그들과 함께 딩굴며 살았다.
오히려 소위 정상인이라 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오염된 영혼을 가진 자들은 자기의 탐욕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잘 모르고 산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나는 지금도 욕심없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건강을 잃고 강릉에 은둔하게 되고 나는 15년이 지나 내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찾아갔다. 누가 그들을 바보라고 하는가. 그들의 연약한 육신은 이제 쇠약해져 가는데도...나를 보고 기뻐하는 그들의 웃음과 어눌하면서도 밝은 인사를...
그들만큼 사랑의 가치를 존중하는 이들을 아직까지 나는 보지 못하고 산다. 이제는 주름진 이마 사이로 여전히 그들은 사랑을 말하고 나를 반겨준다. 온 몸이 병들어 지친 나를 그들은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환하게 환영해준다.
나도 그들 중 하나같이 장애인이 되었다.

3 Comments
덧니공주 2007.07.11 18:26  
  겉으론 멀쩡하지만,,,,장애우보다 더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죠~
겉으로만 사람을 판단하고,가진자와 못가진자,장애를 편견으로 바라보는 세상사람들에게,뭔가를 깨닫게 하는 글이에요.봄길님의 글은,항상,다시 생각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화이팅~언제나 젤 먼저 읽고 있는 팬이에요~(way to go)[[원츄]]
곰돌이 2007.07.11 19:37  
  .........
그냥 가면 안되므로.^^
봄길 2007.07.11 20:09  
  곰돌이님의 훈훈한 인정...외로운 사람들에게는 밥 한 그릇 사주는 것보다 나아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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