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사태를 마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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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사태를 마주치다

봄길 3 217
군중이 무엇인지 그리고 역사가 격동하는 현장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체험한 며칠이 내 인생에 처음 닥쳐왔다. 그것은 전광석화였다. 유신헌법이나 수많은 억압들 속에서도 인내하던 시민들이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저항은 순식간에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충동이 되었다.
압제자들은 저항이 젊은 아이들만의 치기가 아님을 두려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단말마적인 반응이 시민들을 향해 돌출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위 화이트 칼라들이 그 흐름의 주도층으로 나타나고 또렷한 구호로 독재타도, 민주쟁취가 연호되어질 때 20년을 억압자로 군림하던 독재자는 역사에 자기의 용도가 폐기되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때 시청은 영도 다리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며칠 동안 시내는 정중동의 긴장아래 있었다. 전경들은 20킬로나 떨어져 있던 B대의 소요가 시내에 진출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것은 일견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내가 폭발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B대가 있는 동래 쪽에서 많은 학생들이 구타와 납치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그것은 어떤 언론을 통해서도 들을 수 없는 생생한 사실이었다.
시위는 이제 단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고 또 납치되어 부모, 형제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때 시민들은 행동으로 저항해야될 이유를 그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역사의 임계점이 그렇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역사의 그 순간이 다가왔다. 시내 곳곳에 장갑차가 진을 쳤고 공수부대는 착검을 한 채 거의 10미터 간격으로 둘씩 마주보며 도열해 있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갔다. 수십명이 무차별로 난자당해 끌려갔다느니 죽은 사람이 벌써 몇명이라느니...
그렇지만 어느 방송과 신문을 봐도 부산은 그때까지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공수부대는 커녕 전투경찰과의 대치도 없었고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은 만족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고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 몇몇이 찻잔 속의 태풍을 일으키고자 안달할 뿐이라고 하였다. 단지 기독교방송에서 시민 2~3명 경상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영도다리가 통제되고 있다고 한다. 잠자리가 없던 나는 교회의 작은 교실에서 거의 잠을 자곤 했다. 마당 저기서 목사님이 두려움을 감추지 않은 채 대학 새내기인 아들을 찾느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나는 시내로 가보기로 했다. 후배들, 친구들이 한결같이 시내나가면 죽는다고 만류를 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나가야겠다고 작정했다.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때 두려움에 떨며 바람이 지나가기만을 숨어 기다린 사람은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때까지 한번도 나는 정부공권력에 대항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불의를 볼 때 그것과 맞서 싸우는 것보다 내가 그 속에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믿고 있었다.
어둠은 어둠을 없앰으로써가 아니라 빛을 비춤으로써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내게 있어 세상은 원천적으로 어둠의 세계이었고 그것은 싸워야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현장에 나아가기로 했다. 나는 그것을 반드시 보고 알고 느끼고 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요를 덮어쓰고 웅크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과 오고오는 세대들 앞에 변명할 수 없는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오후 3시경, 영도 다리를 건너기까지는 음산한 것외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동명극장앞에 있는 육교를 지나 남포동과 광복동을 진입하는 순간 다른 세계가 펼쳐져있었다. 그것은 전운이 감도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그 시절 미화당 백화점 앞에는 파출소가 있었다. 나는 그 어귀에서 벌어진 첫 장면에 넋을 잃고 말았다.
맞은 쪽에서 키가 175센티는 되는 잘 생긴 청년 둘이서 걸어오고 있었다. 둘은 웃으며 얘기를 나누면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착검한 공수부대원 하나가 갑자기 그 둘중에 한 명을 개머리판으로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바로 면전에서 똑똑히 보았다. 우연히 우편에 있던 쳥년이 좌편을 걷던 친구에게 웃으며 얘기하다 눈길이 도열해 있던 공수부대원과 마주친 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 사방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몰려와 군화로 짓이겨댔다. 그리고 시민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파출소에서 경찰이 확성기로 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접근하지 마십시오. 접근하지 마십시오." 경찰은 공포에 질린 채 울음소리를 흘러보내고 있었다. 조금 더 진행을 하자 2층 다방에서 혼자 걷고 있는 나에게 다방 마담이 고함을 질렀다. 학생 여기로 들어와요. 괜찮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도덕주의자인 나는 그런 류의 사람들을 멀리 하던 때였으니...몇 걸음을 옮기자 다방 아가씨 한 명이 황급하게 달려나왔다. 나랑 같이 가자고 한다. 여자하고 같이 걸으면 해치지 않는다고...나서 처음으로 아가씨의 프로포즈를 받아보았다.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혼자 걸었다.국제시장 공구골목 입구에 건널목이 있었다. 교통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건널목 양쪽에는 공수부대원이 도열해있다. 맞은 쪽에 꼭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와 닮은 샌님같은 청년 하나가 서 있다. 파란 불로 바뀌고 천천히 길을 건널 때 갑자기 등뒤에서 '너,'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돌아보면 안될 것같았다. 어두운 골목쪽으로 끌려가는 청년을 뒤로 보았다.
왕자극장 앞, 부산극장앞...아비규환이란 게 뭔지 나는 보았다. 그리고 기적같이 나는 생환할 수 있었다.
교회당 마당에는 아이들이 웅크리고 모여있었다. 들어서는 나를 보고 '괜찮았어요.' 물어보았다. 나는 그 소리에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나는 울고 또 울며 기도실로 들어갔다. 밤새 울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했다. 피흘리는 자들...30만명을 희생해도 좋다고 말한다는 이들...하나님, 용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당신이 그들의 대적이 되십시오. 치십시오. 아껴보지마시고 치십시오. 밤새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다음날 10시나 되어서야 나는 겨우 깨어났다. 마당에 나오자 목사님이 소리친다. '갔다. 박정희가 죽었다.' 소리친다. 나는 담담하게 올 것이 왔다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짧고 강한 역사의 전환기가 밀어닥쳤다.
아직도 남은 그 무엇인가를 느끼는 가운데...
3 Comments
덧니공주 2007.07.06 14:58  
  화려한 휴가가,좀있으면 개봉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시사회에 초대헀지만,가슴아프셔서, 못본다고 하셨다는...................[[엉엉]]
초등학교때(저,국민학교때)랑,어릴때,대통령을 각하라고 불르고,맨날,반공 포스터,그리고,,,,,,참,이상하게두,경직된,세상이라는 분위기...였던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어려서,몰랐지만,크면서,광주사태,민주화운동등~
영화나,책으로,접하면서,세상이 빠르게 변하는거 같습니다................애국가 퍼질때 꼼짝두,못했던 시절이 저의 초등학교때 였던거같은데.......
아픈세대를 살아온,세대의 어르신들,때문에,좋은,세상에 살고있습니다.감사하면서,살고 싶습니다........
그리고,그 시절,그런,일들을 시킨,이들이 잘사는게 참
안타깝습니다.......발뻗고 잠이 오는거? 묻고싶어요~
필리핀 2007.07.06 18:00  
  요즘 사람들...
부마사태, 광주항쟁, 6월 혁명...
3.1운동이나 6.25전쟁처럼 교과서에나 나오는
먼 옛날의 일로 여기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까워요...
얼그레이 2007.07.06 22:51  
  역사의식의 부재... 역사의 진실을 가르치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도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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