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 국익론의 허구 - 송경아(소설가)
파병 국익론의 허구
과반수가 넘는 국민이 반대하는데, `참여정부’의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서”
파병하겠다고 한다.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은 “국익을 위해서” 파병동의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심지어 전쟁에 반대한다는 정치인들조차 “국익을 고려한 대통령의 결정과
고뇌는 이해한다”며 슬그머니 무른 구석을 보인다.
나는 도대체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집단의 80년대’를 지나 ‘개인의 90년대’로 진입했다는 찬사 또는 개탄의 소리
를 십여 년 내내 들어왔는데, 갑자기 `국익’이라는 단어 하나가 던져지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자.
백만원을 준다면 사람을 죽이겠는가 천만원을 주면 일억을 주면 아마
미친 *이라고 뺨이나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이렇게 건전한 윤리와 양심을 가진 시민들이, 자기 손에
들어올지 말지도 확실하지 않은 추상적인 `국익’ 앞에서는 왜 무릎을 꿇어버리
는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거들어준다고 해서 당장 `나’나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이익이 돌아오는가
설령 이익이 돌아온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이 죽는 것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이것은 추상적인 `우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나’에게 던져지는 엄중한 질문이다.
국익 옹호자들은 여기에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나는 내 이익을 취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 파병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거들어주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감소할
것이다.
국제정세는 냉혹하다.
병자호란 때 인조의 치욕을, 구한말에 우리가 겪었던 치욕과 아픔을 보라.
우리가 낡은 명분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의 이익을 챙겼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보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을 용인하면
미국이 북한을 침공하는 것도 용인해야 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을 도와주면 북한을 침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파병론자들의 순진하기 짝없는 어리석은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이라크 침공과 같은 논리로 북한을 침공할 경우 과연 그 `현실론자’들
이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북한 침공도 목숨을 걸고 반대할 것이다.
반면 이라크 침공에 찬성하는 자들이 미국이 북한을 침공했을 때 취할 태도는
기껏해야 `거봐, 내가 뭐랬어’일 따름이다.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이 경우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세류에
편승하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또, 역사에서 배워야 할 쪽은 과연 누구인가 파병론자들이 바라는 대로
병자호란 때 인조의 치욕과 구한말에 주권을 박탈당했던 경우를 살펴보자.
병자호란은 당시 조정이 옛 종주국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동향을 살피지 못해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결과다.
구한말의 주권 박탈은 외세에 의존하면 우리의 `국익’을 지킬 수 있다고
믿은 지배층이 이 외세 저 외세를 마구 붙들고 늘어지다가 멸망한 역사다.
`우방’과 `군신지국’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믿다가 결국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인조,
힘있는 외세를 붙들면 우리를 지켜주리라고 믿다가 주권을 잃은 대한제국,
국제정세에서는 강한 나라만 살아남는다는 사회진화론을 믿다가 대한제국이
망하자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흡수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며 친일론으로
투항해버린 지식인들.
우리는 과연 이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보자.
`국익’은 언제나 이 조그만 나라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에 파병하는 자들
의 이익이었다.
`국익’에 고통받는 자들은 언제나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자들이었다.
당신의 손에 쥐어지는 현실을, 당신의 귀에 속삭여지는 달콤한 `국익’과
바꾸지 말라.
`국익’은 허구다.
송경아/소설가
과반수가 넘는 국민이 반대하는데, `참여정부’의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서”
파병하겠다고 한다.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은 “국익을 위해서” 파병동의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한다.
심지어 전쟁에 반대한다는 정치인들조차 “국익을 고려한 대통령의 결정과
고뇌는 이해한다”며 슬그머니 무른 구석을 보인다.
나는 도대체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집단의 80년대’를 지나 ‘개인의 90년대’로 진입했다는 찬사 또는 개탄의 소리
를 십여 년 내내 들어왔는데, 갑자기 `국익’이라는 단어 하나가 던져지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자.
백만원을 준다면 사람을 죽이겠는가 천만원을 주면 일억을 주면 아마
미친 *이라고 뺨이나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이렇게 건전한 윤리와 양심을 가진 시민들이, 자기 손에
들어올지 말지도 확실하지 않은 추상적인 `국익’ 앞에서는 왜 무릎을 꿇어버리
는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거들어준다고 해서 당장 `나’나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이익이 돌아오는가
설령 이익이 돌아온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이 죽는 것은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이것은 추상적인 `우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나’에게 던져지는 엄중한 질문이다.
국익 옹호자들은 여기에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나는 내 이익을 취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 파병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거들어주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감소할
것이다.
국제정세는 냉혹하다.
병자호란 때 인조의 치욕을, 구한말에 우리가 겪었던 치욕과 아픔을 보라.
우리가 낡은 명분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의 이익을 챙겼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보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을 용인하면
미국이 북한을 침공하는 것도 용인해야 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을 도와주면 북한을 침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파병론자들의 순진하기 짝없는 어리석은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이라크 침공과 같은 논리로 북한을 침공할 경우 과연 그 `현실론자’들
이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북한 침공도 목숨을 걸고 반대할 것이다.
반면 이라크 침공에 찬성하는 자들이 미국이 북한을 침공했을 때 취할 태도는
기껏해야 `거봐, 내가 뭐랬어’일 따름이다.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이 경우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세류에
편승하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또, 역사에서 배워야 할 쪽은 과연 누구인가 파병론자들이 바라는 대로
병자호란 때 인조의 치욕과 구한말에 주권을 박탈당했던 경우를 살펴보자.
병자호란은 당시 조정이 옛 종주국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동향을 살피지 못해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결과다.
구한말의 주권 박탈은 외세에 의존하면 우리의 `국익’을 지킬 수 있다고
믿은 지배층이 이 외세 저 외세를 마구 붙들고 늘어지다가 멸망한 역사다.
`우방’과 `군신지국’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믿다가 결국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인조,
힘있는 외세를 붙들면 우리를 지켜주리라고 믿다가 주권을 잃은 대한제국,
국제정세에서는 강한 나라만 살아남는다는 사회진화론을 믿다가 대한제국이
망하자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흡수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며 친일론으로
투항해버린 지식인들.
우리는 과연 이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보자.
`국익’은 언제나 이 조그만 나라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에 파병하는 자들
의 이익이었다.
`국익’에 고통받는 자들은 언제나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자들이었다.
당신의 손에 쥐어지는 현실을, 당신의 귀에 속삭여지는 달콤한 `국익’과
바꾸지 말라.
`국익’은 허구다.
송경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