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타야의 일본인 마을 - 명이의 태국 이야기1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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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7 02:38
안녕하세요. 명입니다.
요즘 태국에 대해 조금 공부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좀 풀어볼까 합니다. 거창하게 명이의 태국 이야기 1 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단지 1로만 끝날 가능성이 큽니다.
아유타야에 일본인 마을이 있습니다. 지금은 일본인이 살고 있지 않지만 박물관이 있어 그곳에 살았던 일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은 14세기부터 일본인이 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무라이, 무역상, 크리스챤 등이 갖가지 이유로 태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들이 짜오프라야 강가 서안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일본인 마을은 재미있게도 아유타야의 포르투칼 마을의 대안(반대편 강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태국과 일본의 기나긴 인연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일본인 마을이 정치적으로 주목받게 된 이유는 바로 일본 사무라이의 가공할만한 전투력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15세기 중엽부터 전국시대라 불리는 지방의 영주들이 매일같이 치고박고 싸우는 전쟁의 시대가 백년간 지속되었고 이때 자신의 영주가 전쟁에서 패해 오갈 곳이 없어진 사무라이들이 하나둘씩 아유타야에 정착하게 됩니다. 때마침 16세기는 버마왕조와 아유타야왕조간의 사활을 건 전쟁이 일어난 시기였고 결국 아유타야 왕조는 16세기 중반 버마의 침공으로 망하고 맙니다. 이때 버마에 볼모로 가있다 돌아온 나레수완 왕자가 아유타야 세력을 끌어모아 버마왕조를 물리치고 다시 아유타야 왕조의 독립을 얻어내게 됩니다. 이때 버마쪽에서는 포르투칼의 용병 수백명이 활약했고 아유타야왕조 편에는 일본의 떠돌이 사무라이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닌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죽이기위한 전문 살인 집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오직 몸을 단련하고 무예를 수련했기 때문에 그들의 체력이나 검술은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높은 경지였습니다. 에도막부가 진검을 사용하는 결투를 금지시키면서 사무라이들은 자신은 단지 인형이 되었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사무라이로 태어나 진검으로 사람을 베지 못한다면 내가 살아있을 이유가 무엇인가라면서 말입니다.
일본의 사무라이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여러가지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한가지 아유타야 왕조의 법전에 일본 사무라이의 지위에 대우에 관한 조항이 있는 것을 보면 단지 전설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유타야 기본법전인 "삼인법전"에 일본인 의용병국 조항이 있고 그 대장은 3품정도의 어쿠야세나피무ออกญาเสนาภิมุข 라는 벼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잘나가던 일본인 마을은 역설적으로 너무 잘나갔기때문에 없어져야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아유타야 일본인 마을에는 야마다 나가마사라는 인물의 동상이 있습니다. 동상이 있을 정도면 얼마나 유명한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또한 2010년에는 "아유타야의 사무라이 야마다라"는 태국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조금만 검색을 해보시면 이 영화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도 호기심에 보긴 했지만 추천할만하지는 않습니다.
야마다 나가마사는 스페인함대의 두차례에 걸친 침략을 차례로 물리친 공로로 왕의 신임을 얻습니다. 그가 공주와 결혼했다는 설도 있지만 공식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국왕이 죽을 때 다음 왕위를 이을 왕자를 부탁한 두 명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를 부탁받은 또 한사람이 후에 아유타야의 쁘라삿통왕이 되는 시오라원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새로 즉위한 왕은 시오라원이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것으로 생각해 제거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시오라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지만 그 왕이 너무 어렸고 시오라원은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합니다. 그런데 야마다 나가마사가 반대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집니다.
결국 왕이 된 쁘라삿통은 그때까지 무역을 독점했던 일본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역은 오직 왕실만이 가능하다는 법령을 발표하고 사실상 일본인의 무역권을 박탈합니다. 이러한 조치는 쁘라삿통왕의 야마다 나가마사에 대한 견제와 당시 일본 상인들과 경쟁 관계에 있던 화교들의 집요한 로비와 맞물려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후에 야마다 나가마사는 지방으로 좌천되고 그곳 전투에서 상처를 입게되는데 사망하고 맙니다. 쁘라삿통왕이 독살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야마다 나가마사의 죽음 이후 쁘라삿통왕은 일본인이 반란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일본인 마을을 폐쇄합니다. 이때부터 일본인 마을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당시 에도 막부가 해외로 나간 일본인들의 귀국을 명령하고 재이민을 받지 않겠다고 한 조치도 일정부분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17세기 이후 아유타야의 일본인 마을은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18세기까지 아유타야에는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중간 상인의 역할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태국 민족에게 동화되어 지금은 그 후손들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몇몇 태국 사람의 성에 이뿐(일본의 태국 발음)이라는 단어가 남아 일본인의 후예라는 흔적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태국과 일본은 이렇듯 400년이 넘는 교류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요. 태국의 일본에 대한 사랑은 16세기 사무라이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현재의 일본의 대 태국 투자액은 태국 전체 국내외 투자액의 50%를 넘는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의 숫자는 20만을 헤아리고 있고 일본인 거리인 방콕의 타니야거리의 역사또한 70년이 넘었습니다. 다음에는 태국과 일본의 정치 경제적 관계에 대해 한번 써볼까 합니다. 가능할지 모르겠만요.
그럼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