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 팁으로 본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와 문화적 헤게모니 이론에 관한 짧은 의견
마시지를 받고 팁을 주는 인간행동학적 혹은 노동에 대한 사회주의적 또는 자본의 흐름에 따른 자본주의적 분석과 계급적 현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여기 게시판에 난무하는 이야기와 왜 우리가 이토록 이 문제에 집착하는지 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왜 우리는 팁을 주는가?
인간행동학적 욕망과 주체의 문제
인간행동학적으로 봤을때 우리는 "동기와 성격"을 시작으로 논재를 풀어가 보도록 하자.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다음과 같이 5단계로 분류해서 설명했다.
매슬로의 이론에 따르면 하위단계의 욕구가 실현되어야 상위단계의 욕구를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슬로 이론의 핵심은 인간의 욕구가 순차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1. 생리적 욕구
기아를 면하고 샘영유지를 위한 욕구로서, 가장 기초적인 의식주에서 부터 성적 욕구까지 포함된다.
2. 안전의 욕구
생리적 욕구가 충족된 후에 나타나는 욕구로서 위험, 위협, 박탈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3. 소속과 애정의 욕구(사회적 욕구)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교적인 동료의식을 조성하기 위한 욕구로서 애정, 귀속, 우정, 사랑 등을 포함한다.
4. 자기존중의 욕구
자신감, 성취감, 지식, 독립심과 같은 자기존중에 대한 욕구이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존경욕구가 충족되면 자신감, 권위, 권력, 통제 등이 생겨나게 된다.
5. 자아실현의 욕구
계속적인 자기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데 초점을 둔 욕구이다. 다른 욕구와 달리 욕구가 충족될수록 더욱 증대되는 경향을 보여 '성장욕구'라고도 한다. 알고 이해하려는 인지적 욕구, 심미적 욕구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매슬로의 저명한 논재인 인간의 욕구에 대한 피라미드적 심층분석에 대해서 논의를 제외하고 전재하고자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물론 라캉의 의견을 중심으로 말이다.
20세기 후반부에 프로이트는 어떻게 귀환되며, 특히 모던 시대에 억압되어온 무의식은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는가에 대해 라캉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을 다시 끌어들여 소쉬르의 언어관을 적용하여 구조주의 이론을 만든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소쉬르가 나오기전에 꿈 작용을 언어의 구조처럼 분석했다.라캉이 암시를 얻은 것은 바로 이곳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라는 말은 라캉의 이론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다. 이때 <언어처럼>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된 <차이>의 체계인 언어를 말하기도 하고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이루어진다는 소쉬르 언어관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무의식에 언어체계를 끌어들임으로써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의식의 차원으로 부상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캉은 사유의 체계에 언어의 구조를 끌어들여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성 본능을 귀환시키면서 이것에 소쉬르 언어학을 적용하여 주체가 어떻게 언어(기표)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준다.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기표와 지칭 당하는 대상인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언어는 차이에 의해 변별의 기능을 갖는 자의적 체계라고 했다. 기표는 단 하나의 기의에 고정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낳는다. 언어가 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지 못하고 고리를 물 때 즉 기표만이 존재할 때 그 언어를 통해 생각을 표출하는 인간은 이 기표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언어의 세계 속에서 사는 한 주체는 기표의 지배를 받기에 그것은 < 언어처럼 구조된다 >는 것이다. 소쉬르의 언어관으로 인해 인간이 기표에 의해 지배받고 그 기표는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졌으니 주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해당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있다>라는 말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의식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이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런 재해석에 의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라캉에 와서 정치, 사회, 문화예술의 분야로 확대된다. 무의식과 똑 같은 원리로 인해 욕망 역시 표층으로 올라온다. 욕망은 환유이다. 욕망은 기표이다.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 빈 연쇄 고리이다. 그렇다면 욕망의 구조도 은유와 환유가 아닌가.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였지만 허구가 아닌가. 대상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요,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이 상징계요, 여전히 욕망이 남아 그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 실재계다.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처럼 보이는 대상, 즉 대체가 가능하리라 믿는 단계, 이것이 압축이요, 은유이다. 그러나 충족시키지 못하고 다시 그 다음 대상으로 자리를 바꾸는 전치, 이것이 환유이다. 그러므로 욕망 역시 언어처럼, 무의식처럼,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있다.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그렇지만 허상을 실재라고 믿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권력자의 눈길처럼 음험해진다. 인간은 대상이 허상임을 알 때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고로, 우리는 고착화된 행동다양성의 말살로 인해서, 자아의 독립성을 지배받게 되었다.
객체화하지 않은 대상에서 선험적 판단과 이성에 대한 주체적 의지가 결여 됨으로 우리는 타자에 모방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본직적 문제점이 들어나느 것이 바로 이번 논쟁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문화적 헤게모니와 자본;사회주주의 관점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은 어디로 부터 기인하는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말하기전에 우선 헤게모니를 알아보자.
헤게모니라는 말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론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의 저서에서 연유되었으며, 현대 정치학과 사회학, 철학 등에서 사회이론의 중요한 논리체계로 자리잡고 있다. 헤게모니라는 말은 한 사회에서 지배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그것을 전파해가면서 종속집단으로부터 합의적인 지지를 끌어내는 일련의 과정과 상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특권을 가진 집단이 경제적 사회문화적으로 다른 계급을 통제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선전하고, 다른 계급으로 하여금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람시의 이러한 헤게모니의 개념은 오늘날 모든 사회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늘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신사회 변혁들, 예를 들면, 민족운동, 종교운동, 여성운동, 평화운동, 공해추방운동, 재벌들의 사악한 돈벌이에 맞서 소비자의 선택권을 지켜가려는 소비자 주체운동, 사업주의적 소비문화를 부추기는 선전매체의 천박함으로부터 어린이와 인간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건전문화운동, 그리고 상업적 언론이 행사하는 권언 유착의 부당함에 맞서서 정적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공민문화운동 등이 초계급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어느 의미에서는 기존 지배세력의 헤게모니 장악에 도전하여 새로운 삶의 가치를 고양시킬 수 있는 헤게모니의 수립을 위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적 헤게모니 개념의 독창성은 대체로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접근 방식과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오로지 경제 결정론적인 계급 및 계급 행위에 관한 이론으로만 이해하는 접근 방식과의 단절에서 유래한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를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이며 실증주의적인 과학의 틀로 변화시키려는 교조주의자들의 시도는 경제 영역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말았으며 또한 '생산 수단과의 관계'에서 추론된 계급 분석을 과도하게 강조하게 되었다. 그람시는 경제주의를 반대하면서 정치를 강조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경제 영역이나 경제적 계급들을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행사되고 헤게모니가 확립되는 영역들로서 국가와 시민 사회를 포함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람시가 수정하려고 했던 마르크스주의 안의 주요한 이론적 입장은 경제주의(economism)였다. 경제주의는 자본주의 안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물질적 경제적 이해 관계와 자본가 계급의 물질적 경제적 이해 관계, 또는 계급의 분파들을 둘러싼 모순이 있으며, 그 모순은 결국 이윤과 산업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잉여 가치의 착취로 이어지고 그 결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총체적인 붕괴로 유도할 것이라는 주장한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헤게모니적 지도력은 세계관, 곧 철학이자 도덕적 전망의 창출에 일차적으로 관여했으며, 어떤 한 사회의 여타 종속적인 동맹 계급들과 집단들이 이 세계관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미국이 헤게모니적으로 주도하지 못한다고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미국이 실증주의와 경험주의를 뛰어넘는 세계관, 곧 철학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부러워했던 미국식 실용주의마저도 미국의 반지성적이며 실증주의적이면서 한층 대중적인 수준에서는 순진하기까지한 종교적 문화를 극복하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일관성있는 세계관과 도덕성이라는 그람시적 의미에서의 철학을 실행 가능한 지적 활동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국은 그러한 철학을 창출할 수 없으며 '헤게모니적'으로 서구 세계를 지도할 수 없다.
그람시의 주장으로 본다면 핵심적 가치를 구조주의적 해석에 빗대어 한번 더 꼬아본다면, 결국 팁이란 실증주의와 경험주의를 뛰어넘을수 없는 자본의 가치로 분리될 수 있다.
다시한번 본론으로 돌아가서 트로츠키의 유명한 반파시즘 투쟁에서 대해서 알아보자.
사회 위기가 노동자 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자본가 계급이 노동계급 쪽으로 확고히 넘어와야 한다. 이 경우 노동계급은 온 국민의 선두에 서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할 기회를 부여받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번 선거는 소자본가 계급이 이와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이 사실은 선거의 주요한 징후였기 때문에 중요하다. 위기의 영향을 받아 소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혁명이 아니라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제국주의적 반동으로 급선회하면서 자기 휘하에 거느린 노동계급의 상당한 부분을 함께 끌어들고 갔다.
나찌즘의 거대한 약진은 두 가지 요인의 표현이다. 즉 소자본가 계급을 휘청거리게 만든 골이 깊은 사회 위기 그리고 혁명적 지도자로 대중에 의해 인정될 노동계급 혁명정당의 부재가 바로 이 두 요인이다. 공산당이 혁명적 희망의 정당이라면 파시즘은 반혁명적 절망의 정당이다. 혁명적 희망이 노동계급 전체를 사로잡을 경우 소자본가 계급의 상당한 부위는 점점 혁명의 길로 이끌린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정반대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즉 반혁명적 절망이 엄청난 힘으로 소자본가 계급을 사로잡은 나머지 이 계급은 노동계급의 많은 부분을 함께 끌고 들어갔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과거 우리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의 급상승 현상을 목격했다. 이렇게 파시즘이 승리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위협 세력이 된 이유는 혁명적 위기가 혁명의 실패로 끝난 데에 있었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의 전위는 국민의 선두에 서서 소자본가 계급을 포함하여 모든 계급들의 운명을 변화시키지 못한 무능력을 드러내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특유의 영향력을 행사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현재 독일의 경우 혁명적 위기가 결말에 이른 것이 아니라 막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 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문제이다. 이로부터 공산당의 주요 관료들 즉 당 요직을 장악한 낙관주의자들은 파시즘이 “너무 늦게” 등장했으므로 불가피하게 즉시 패배할 운명에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독일공산당 일간지 [적기(赤旗)]) 이 사람들은 도대체 사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파시즘은 오랜 혁명적 위기에는 “너무 늦게” 등장하지만 새로운 혁명적 위기에는 너무 일찍 그것도 새벽에 등장한다. 혁명적 시기가 끝난 순간이 아니라 그 전야에 파시즘이 강력히 출발할 가능성을 얻은 현상은 파시즘의 약점이 아니라 공산주의운동의 약점을 보여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기 운명을 개선하려는 소자본가 계급은 공산당의 능력에 대해 새로이 실망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 계급은 과거의 경험에 의존한다. 1923년의 교훈, 마슬로우-텔만(Maslow-Thaelmann)의 변덕스러운 초좌익적 비약, 텔만의 기회주의적 무기력, “제 3기”의 불협화음 등을 이 계급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항이 있다. 이 계급이 노동자 혁명에 대해 신념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수백만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이 공산당에 대해 신념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의해 완전히 보수화 되었어도 이 계급은 대다수 노동계급의 공감이 사회혁명에 있을 경우 혁명의 편에 설 수 있다. 바로 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독일에는 결여되어 있으며 이 상황은 우연히 조성되지 않았다.
선거 전 독일공산당의 강령은 전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파시즘을 주적(主敵)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파시즘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수백만의 반(半)노동계급과 수십만의 공업노동자들을 획득했다. 이것은 공산당의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노동자 혁명의 심각한 선거 패배를 의미한다. 물론 이 패배는 결정적이기보다는 사전적이며 경고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만약 공산당이 전체적으로 혁명운동 패배의 “사전” 특징과 관련하여 자신의 부분적인 선거 승리를 평가하고 이로부터 필요한 결론들을 이끌어낼 능력이 없다면 이 혁명운동의 패배는 결정적이 될 것이다.
부르조아 체제의 무기력, 이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사회민주주의의 보수적 역할, 이 체제를 분쇄할 능력이 공산당에게 없다는 축적된 무기력감 등의 현상을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는 독일 파시즘은 이제 진정한 위험세력이 되었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모두 맹인이거나 떠버리에 불과하다.
1923년 브란틀러(Brandler)는 우리의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의 역량을 지독하게 과장하였다. 역관계를 이렇게 잘못 평가하는 것을 통해 주저하고 회피하고 방어적이며 비겁한 정책이 나왔다. 이것이 혁명을 파괴시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든 계급의 의식 속에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공산당 지도부가 파시즘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면서 파시즘이 더욱 강화되는 조건을 조성했다. 이와 반대의 오류로 현재 공산당 지도부가 이렇게 파시즘의 역량을 과소평가할 경우 앞으로 많은 세월 동안 혁명운동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사태 전개의 템포 문제와 관련지어 보면 이 위험은 특히 더 심각하다. 그런데 템포는 우리에게만 달려있지 않다. 선거로 드러난 정치적 격동의 곡선은 말라리아 열병에 걸린 것과 같다. 이것은 사회 위기의 전개 템포가 아주 빨라질 것임을 예감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지금 사태는 새로운 역사적 차원에서 혁명적 상황의 성숙성, 혁명정당의 나약성, 전략적 무기력증 사이의 비극적인 모순을 독일에 소생시킬지 모른다. 이 사실은 명확히 공개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때에 말해야만 한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이론을 조금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들뢰즈의 차이의 긍정, 생성으로서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들뢰즈는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고 했다. 그 말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모네의 그림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 모네는 같은 모티프를 계절, 시간, 기후, 빛 변화에 따라 묘사한 연작들을 그렸다.
위의 사진은 모네의 루앵 성당 연작들이다. 그는 아침, 점심, 저녁의 성당을 그렸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의 성당을 그렸다. 빛을 포함한 여러 조건들에 의해 루앵 성당은 시시각각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차이’가 있었다.
들뢰즈는 이 점에 주목한다. A가 A′로 변화했을 때 그 둘의 공통인 A는 반복된다. A가 A′로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만일 A와 A′가 완벽하게 동일했다면, 즉 차이가 없었더라면 A는 더 이상 반복될 이유가 없다. 모네의 경우로 말하자면, 더 이상 루앵 성당을 그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있다. 그러나 역으로 반복이 또한 두 차이 사이에 있으며」
-두 반복은 헐벗은 반복과 내적이며 풍요로운 반복이다.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내적 반복과 외적 반복의 구분은 차이를 낳느냐 낳지 못 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역으로 차이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반복이 있다. 또한 그래서 차이와 반복이 뫼비우스띠처럼 얽혀있다.
- 차이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천덕꾸러기처럼 생각되어왔다.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다수의 논리로 정해진 일관된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차이는 사회 통합보다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나쁜 것’으로 생각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 철학의 핵심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이 소수자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에 있다. 그것은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생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분명히 주장한다.
우리는 마시지를 받고 팁을 주는 행위가 그 행위를 뛰어넘은 정치, 철학적, 사회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영향은 나약한 의지에 대한 빈곤한 변명일 뿐이다.
주-
이렇게 자세히 설명했는데도 오해 할까봐 요즘 하는 인터넷말로 덧붙이자면,
팁을 주는 행동학적 행위는 객체의 자유의지임으로 본질적 자아의 판단에 맡기면 된다.
피해 운운하는 나약한 의지에 대한 피곤한 주장은 변명일 뿐이라는 말이다.
*논리적 비약에 대한 리플에는 답글 달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