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왕서방이 컴퓨터 자판치는 모습...에 대한 글을 읽고...
아래 퍼온 글 4514를 보고 개인적인 생각을 몇자 끄적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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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훌륭한 문자라는 점은 대체로 공감한다.
발음상에 모호성이 없고, 활자 조합능력이 우수하다는 것외에
한글의 탁월함을 입증하는 통계나 자료는 많다.
한글제작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세종대왕이 프로젝트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설계, 제작한 것이다.
선조들의 지혜와 독창성, 과학성이 함축된, 멋진 문자체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가 외국인에게 어려운 것은 왜일까.
한글의 제작은, 소수의 선조들이 과학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지만,
한글의 사용과 발달은 다수의 한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글의 과학적인 면보다는, 한국인의 보편적 특성에 맞게 고정되어졌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영어의 Yellow는 말 그대로 노란색이다.
한국어에서 노란색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노리끼리하다...
여기에 색의 강도 짙음을 표현하기 위해 모음을 강하게 바꾸면 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등으로 확장되며
부사를 비롯한 미사여구를 넣음으로써 매우 복잡한 yellow를 표현할 수 있다.
한국어에서는 의성어, 의태어도 종류가 다양하다.
동물이 뛰어오르는 모습을 표현할 때도,
토끼는 깡총깡총, 개는 껑충껑충, 개구리는 팔짝팔짝, 호랑이는 훌쩍훌쩍 뛴다.
이런 추상적 표현에 다양성은, 개인의 감정을 문장에 이입시키기에는 탁월하지만
아쉽게도 상대를 설득하거나 지식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민족은 대체로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기보다는 감성이 예민한 민족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에서, "내가 너한테 갈께" 라는 문장은 "I will come to you"로도 표현된다.
즉, 화자가 듣는이의 입장에서, 듣는이 쪽으로 다가서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문장을 말한 경우이다.
상대 중심의 표현이다.
그러나 한국어에 그런 표현은 없다.
만약 "내가 너한테 올께"라고 말한다면 초등학교는 나온건지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위에서말한 두가지를 종합하면,
한국어는 이성보다는 감성 중심, 상대보다는 개인중심의 언어이다.
한국어 구조가 이렇기 때문에 우리네 정서가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네 정서가 원래 이렇기에 한국어 구조가 이를 대변해주는 모습으로 고정된 것이다.
우리와 정서가 다른 외국인 입장에서, 우리 정서가 녹아든 한국어를 이해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한국어를 왜 외국인이 어려워할까가 아니다.
한국인의 (보편적인) 언어 습관과 이런 성격이 인터넷상에 그대로 반영되는 문제점 때문이다.
한국인이 쓴 글은 (보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이다.
책으로 출판된 글에서는 이런 편파적인 성향이 적다.
글쓴이의 이름을 걸고, 독자들에게 읽혀질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체가 인터넷으로 바뀌면 문제는 달라진다.
인터넷의 대중성과 익명성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서,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글이 많다.
개개인 누구하나 못난 사람 없고, 의견 맞는 사람끼리 강하게 유대감을 형성해서 이견을 갖는 집단은
적으로 생각하는 의식은, 인터넷상에 다양한 당파싸움을 지금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반만년 역사속에 기록된 크고 작은 전쟁들의 발단은 대부분 한국민 자신들간에 싸움이었다.
그런 유혈적 싸움이 이젠 인터넷으로 옮겨갔으니 그건 다행이라 봐야 할까.
필자가 글을 읽는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내가 모르는 정보(지식)를 얻거나, 글쓴이의 희노애락을 읽고 때론 같이 미소짓고 때론 같이 분노하는
인간적 감정을 갖기 위해서이다.
이는 일반인이 글을 읽는 이유와 대동소이할 것이다.
태사랑의 여행이야기를 보면 많은 글들이 남겨있다.
어떤 글은 필자에게 지식과 감정적 결핍을 해소시켜주지만,
사실 대부분의 글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낀다.
이건 마치 개인의 일기장을 들여다 보는듯해서 어떤 공감대도 없고, 어떤 지식도 얻지 못한체
모니터만 바라보느라 눈만 피곤해지는 경우도 많다.
거기에 붙은 리플을 보면 더욱 가관인 경우도 허다하다.
최소한 여행기를 올린다면, 자신이 올리는 여행기 내용이 다른 사람의 글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지를 검색해서
같은 정보는 가능한 삭제하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만한 감정적 요소를 추려서
최소한 2~3번은 읽어 문맥을 다듬고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리플을 다는 사람도 모니터상에 그대로 개인적인 생각을 감정적으로 입력할 것이 아니라
적어두고 2~3번은 읽어 다듬고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모든 사람이 수필가이며 이야기꾼이고, 글재주에 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설픈 글이라도 인터넷에 선보여 공감을 얻고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면
부족한 글솜씨가 어찌 창피한 일이겠는가.
진정으로 창피한 일은, 문장을 이루는 글자들은 훌륭한 우리의 한글이 분명한데,
그 문장의 뜻은 차라리 이게 다른 문자로 만들어졌다면이라고 느끼게 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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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훌륭한 문자라는 점은 대체로 공감한다.
발음상에 모호성이 없고, 활자 조합능력이 우수하다는 것외에
한글의 탁월함을 입증하는 통계나 자료는 많다.
한글제작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세종대왕이 프로젝트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설계, 제작한 것이다.
선조들의 지혜와 독창성, 과학성이 함축된, 멋진 문자체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가 외국인에게 어려운 것은 왜일까.
한글의 제작은, 소수의 선조들이 과학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지만,
한글의 사용과 발달은 다수의 한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글의 과학적인 면보다는, 한국인의 보편적 특성에 맞게 고정되어졌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영어의 Yellow는 말 그대로 노란색이다.
한국어에서 노란색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노리끼리하다...
여기에 색의 강도 짙음을 표현하기 위해 모음을 강하게 바꾸면 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등으로 확장되며
부사를 비롯한 미사여구를 넣음으로써 매우 복잡한 yellow를 표현할 수 있다.
한국어에서는 의성어, 의태어도 종류가 다양하다.
동물이 뛰어오르는 모습을 표현할 때도,
토끼는 깡총깡총, 개는 껑충껑충, 개구리는 팔짝팔짝, 호랑이는 훌쩍훌쩍 뛴다.
이런 추상적 표현에 다양성은, 개인의 감정을 문장에 이입시키기에는 탁월하지만
아쉽게도 상대를 설득하거나 지식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
우리민족은 대체로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기보다는 감성이 예민한 민족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에서, "내가 너한테 갈께" 라는 문장은 "I will come to you"로도 표현된다.
즉, 화자가 듣는이의 입장에서, 듣는이 쪽으로 다가서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문장을 말한 경우이다.
상대 중심의 표현이다.
그러나 한국어에 그런 표현은 없다.
만약 "내가 너한테 올께"라고 말한다면 초등학교는 나온건지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위에서말한 두가지를 종합하면,
한국어는 이성보다는 감성 중심, 상대보다는 개인중심의 언어이다.
한국어 구조가 이렇기 때문에 우리네 정서가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네 정서가 원래 이렇기에 한국어 구조가 이를 대변해주는 모습으로 고정된 것이다.
우리와 정서가 다른 외국인 입장에서, 우리 정서가 녹아든 한국어를 이해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필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한국어를 왜 외국인이 어려워할까가 아니다.
한국인의 (보편적인) 언어 습관과 이런 성격이 인터넷상에 그대로 반영되는 문제점 때문이다.
한국인이 쓴 글은 (보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적이다.
책으로 출판된 글에서는 이런 편파적인 성향이 적다.
글쓴이의 이름을 걸고, 독자들에게 읽혀질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체가 인터넷으로 바뀌면 문제는 달라진다.
인터넷의 대중성과 익명성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서,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글이 많다.
개개인 누구하나 못난 사람 없고, 의견 맞는 사람끼리 강하게 유대감을 형성해서 이견을 갖는 집단은
적으로 생각하는 의식은, 인터넷상에 다양한 당파싸움을 지금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반만년 역사속에 기록된 크고 작은 전쟁들의 발단은 대부분 한국민 자신들간에 싸움이었다.
그런 유혈적 싸움이 이젠 인터넷으로 옮겨갔으니 그건 다행이라 봐야 할까.
필자가 글을 읽는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내가 모르는 정보(지식)를 얻거나, 글쓴이의 희노애락을 읽고 때론 같이 미소짓고 때론 같이 분노하는
인간적 감정을 갖기 위해서이다.
이는 일반인이 글을 읽는 이유와 대동소이할 것이다.
태사랑의 여행이야기를 보면 많은 글들이 남겨있다.
어떤 글은 필자에게 지식과 감정적 결핍을 해소시켜주지만,
사실 대부분의 글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낀다.
이건 마치 개인의 일기장을 들여다 보는듯해서 어떤 공감대도 없고, 어떤 지식도 얻지 못한체
모니터만 바라보느라 눈만 피곤해지는 경우도 많다.
거기에 붙은 리플을 보면 더욱 가관인 경우도 허다하다.
최소한 여행기를 올린다면, 자신이 올리는 여행기 내용이 다른 사람의 글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지를 검색해서
같은 정보는 가능한 삭제하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만한 감정적 요소를 추려서
최소한 2~3번은 읽어 문맥을 다듬고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리플을 다는 사람도 모니터상에 그대로 개인적인 생각을 감정적으로 입력할 것이 아니라
적어두고 2~3번은 읽어 다듬고 올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모든 사람이 수필가이며 이야기꾼이고, 글재주에 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설픈 글이라도 인터넷에 선보여 공감을 얻고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면
부족한 글솜씨가 어찌 창피한 일이겠는가.
진정으로 창피한 일은, 문장을 이루는 글자들은 훌륭한 우리의 한글이 분명한데,
그 문장의 뜻은 차라리 이게 다른 문자로 만들어졌다면이라고 느끼게 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