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선 님의 억울한 사연

홈 > 커뮤니티 > 그냥암꺼나
그냥암꺼나
- 예의를 지켜주세요 / 여행관련 질문은 묻고답하기에 / 연애·태국인출입국관련 글 금지

- 국내외 정치사회(이슈,문제)등과 관련된 글은 정치/사회 게시판에 

그냥암꺼나2

신인선 님의 억울한 사연

sarnia 9 751

=========================

 

노래영상 : 비운의 천재작곡가 장덕의 노래

사진과 글 : 억울한 천재화가 신인선 이야기 

 

99C747425AE5DF7D3C743F

99BAA04F5AE5DF9F27C811

999B8B465AE5DFCB0EF718

 

천재화가 신인선 님에 대해서는 세간에 잘못 알려진 것들이 많다. 

'순종하는 열녀효부'라는 이미지와, 제국일본의 근대여성모델인 '현모양처'라는 이미지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만일 그가 알려진대로 조선 성리학적 질서 따위에 저항한 적 없이 가마떼기처럼 순종이나하는 '열녀효부'에 불과했다면

당연히 대한민국 5 만 원권 화폐모델에서 퇴출되어야 마땅하다.

 

근데, 역시 내가 짐작했던대로

그는 조선시대 열녀효부와는 거리가 먼 여성이었다는 점을 발견하고나서 조금 안심했다. 

그런 짐작을 했던 동기는 약간의 편견에 기반한 것 이었는데,

내가 아주 잘 아는 어느 평산 신씨 가문 출신 여성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같은 평산 신씨 신인선 님의 '온순얌전'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런 온순얌전 이미지를 도구삼아 신인선 님에 대한 엉터리 스토리를 최초로 날조한 자들은 율곡 이이의 후대 계파 제자들이었다. 

 

송시열 씨를 비롯한 노론의 논객들이

자기 계파의 원조 스승이었던 이이의 어머니를 난데없이 '조선의 열녀효부'로 둔갑시키는 바람에 이런 대혼란을 초래할 씨앗을 심었다.

 

신인선 님은 박식하고 논리적인 달변이었을 뿐 아니라

타고난 예술감각을 갖춘 저항형 여성이었던 게 거의 분명하다. 

한마디로 조선 중엽 이후의 사대부 성리학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유형의 신여성이었던 같다.

 

사실 그는 '열녀효부'가 될 시간과 기회도 거의 없었다.

평생 원수같았던 남편 이원수 씨의 한량기질과 무능때문에 속을 썩어서 그랬는지 만 47 세에 요절했다.

홧병으로 생긴 신경성 위장장애가 악화되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살 많은 남편보다도 10 년 먼저 사망했으며, 사망할 당시 아들 이이의 나이는 15 세에 불과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원수 씨는 1501 년 태어난 신인선 님의 남편으로, 고향의 봄 작사자 이원수 씨와는 동명이인이므로 혼동하면 안된다. 

 

신인선 님은 결혼(당시 용어로는 출가)한 후에도 시가살이를 한 적이 거의 없으며 당당하고 당차게 친정에서 살았다.

공처가인 동시에 등처가였던 이원수 씨는 자기 보다 훨씬 똑똑한 부인의 끊임없는 호통과 잔소리를 몹시 두려워했다.

그런만큼 그는 신인선 님의 친정살이를 속으로 얼씨구나 하고 무척 반겼다.

출가외인 관념이 지배했던 시대에 신인선 님의 친정살이가 이래서 가능했겠구나 하는 점을 그 가문을 둘러싼 이야기 행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강릉 오죽헌이 신인선 님의 친정이며, 아들 이이 역시 이 곳에서 출산했다.    


신인선 님의 평생 원수 남편 이원수 씨에게는 물론 몰래 사귀던 다른 여자가 있었다.

몇 명을 사귀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후대 정보수집가들의 첩보에 따르면 그가 가장 오래 사귀었던 여인은 이원수 씨 본인보다 스물 세 살 가량 어린 주막 마담 권 모 양이었다. 

기방도 아닌 주막이란 요즘으로치면 아현동 굴레방다리 밑에 있는 단란주점 비슷한 업소인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업종표시없이 그저 '수선화' 라든가  '밤차', '정든 배'와 같은 이상야릇한 상호가 적힌 간판만 달려있는게 그런 업소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송시열 씨가 처음에는 계파 원조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 씨를 영웅화하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뒤짚어 까고 뒤져 봐도 그에게는 영웅화할 건덕지를 발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을 잘못 내놓았다가는 노론 전체의 집단 개망신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원수 라는 이름을 쉬쉬하고 숨겼을 것으로 보인다.) 


노론이 날조한 화가 신인선 님의 열녀효부 이미지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들어서자 갑자기 제국일본이 강요했던 여성상인 현모양처로 둔갑했다. 

 

1941 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신인선 님은 조선여인들이 그들의 남편과 아들 딸을 전쟁터에 징용으로 학도병으로 근로정신대로 위안부로 기꺼이 내보내는 비장용감한 현모양처의 대선배이자 대명사로 널리 선전되기 시작했다.

현모양처란 메이지혁명 이후 군국일본의 교육 이데올로그 마카나 마사나오가 만든 단어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신인선 님을 개뚱딴지처럼 현모양처, 군국의 어머니로 재등장시킨 부역자들은 조선의 친일연극계였고.

그의 모습을 초상화 화폭에 담은 미술감독은 친일미술계 원로화가 김은호 씨였으며.

그의 모습을 다시 대한민국 5 만 원 권 지폐에 그려넣은 인물은 그 친일화가 김은호 씨의 직계 제자였다. 

신인선 님의 초상이나 밀양 영남루 윤정옥 씨(아랑) 초상이나 진주 촉석루 논개 님 초상이나 얼굴이 다 비슷비슷한 이유는 그 그림들 모두가 자가표절에 능한 김은호 씨가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다.

 

싸르니아 : 안녕하세요. 율곡 이이 선생의 어머니이신가요?

신인선 님 : ...... 나는 조선의 화가입니다.  

싸르니아 : 네, 죄송합니다.

 

992485435AE63A9911F247

 

99B91F4A5AE63C380E1E9C 

9958874A5AE5E03C115B54 

9928B34D5AE5E0562DD9D8 

99191D4D5AE5E05B2EE6EE 

99E716475AE5E08D0539F5 

990360455AE5E0B00D4CE4 

99C989475AE5E0D00A64C5 

99294F4C5AE63C6B07B7D3 

9969D6485AE5E0F3167C00

 

9 Comments
sarnia 2018.04.30 08:57  
이 글은 대한민국방에 올렸다가, 생각해보니 대한민국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북이 아니라 이씨조선) 이야기라 거기서 삭제하고 이리로 옮겼습니다.
울산울주 2018.04.30 11:34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을 듯

느닷없이 간첩으로 몰려서
세상 하직한 분들도 허다하거늘...
향고을 2018.04.30 20:32  
사르니아 선생님 좋아합니다,
대전 오시면 연락주세요,(쪽지)
술은 제가 쏠께요,
단지 너무 짧으면 아마 못만날걸요,ㅎ
노마의봄 2018.04.30 22:43  
이미 앞선 글들에서 출신지역과 연령대를 이미 알고 있지만...
굴레방다리 부근....에서 다시 오래간만에 글을 적을 용기를 받습니다.
당시 굴레방다리 주변의 '단란주점 비슷한 업소' 들의 간판엔 찻집이라고 적혀 있었죠.
그리고 맥주,양주 도 함께.
잘 지내시죠?
어랍쇼 2018.05.01 15:24  
역시 사르니아님 글은 너무 재밌고 알차요~
오만원권 지폐를 다시한번 들여다 보게 되네요.
무지를 조금이나마 덜어내게 해주시고
호기심을 자극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릉 너무 사랑하는데 사진보니 가고싶네요...
solpine 2018.05.04 20:04  
뭐 이런 시각  논리 오래 전에 들었던 바 ,,,, 해리슨이라는 친구가  똑 같은 아주 똑 같은 논점에서,,,,,새삼스럴것도 없지만,,그 시대 ,,,,사회상에서 뭘 할 수 있었을까요,,,그나마 몇 점 남긴것도  용하지요 노론이니 송시열이니 옹호 두둔 할 생각 도 안해  봤지만 ,,,이 나라에 그 나마  털어 먼지 안나는거 원하심,,,  맞습니다..
그저 열녀 효부로 둔갑된 여인,,그리살라 세뇌 당한거다 ,,,
젤리캣 2018.05.11 23:22  
정말 제대로 아는거 하나도 없이 아는척 하네요. 이원수와 원수지간이라고 하는데 의 좋은 부부 사이가 아니라면 이율곡 같은 인물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잘못 아는거 하나 장가 간다는 말 뜻을 모르는 사람들 많습니다. 처가집에 살러 간다는 뜻입니다. 중국 문화도 비슷한데요 우리 말 김서방 박서방이 서쪽 방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죠. 중국의 전통 주택 사합원은 북쪽에 어른 동쪽은 아들 서쪽에 딸이 기거했고 사위가 딸과 함께 서쪽에 살았기에 서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는 처가살이를 많이 했습니다. 요즘 보다 훨씬 유연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처가살이란게 드문 일이 아니고 흉도 아닌 자연스런 선택이고 다수가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부부지간이 원수라느니 시댁 살이 안 했다느니 그런것은 역사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너굴대장 2018.05.12 00:50  
이이 라는 인물이 넘  과대 포장 되어있습니다,,,
과거에 9번이나 장원을 했다느니 뭐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냥 오만한 천재일뿐입니다,,,
sarnia 2018.05.14 11:48  
율곡 이이에 대한 과대포장은 주로 1623 년 인조쿠데타 이후 가필된 선조수정실록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게 정설인 것 같습니다. 율곡은 그 자체로 공과가 있는 인물이지만, 허응당 보우대사를 탄핵하고 유배해서 주살하고 이 시기에 심화된 불교탄압공작에 참여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후이긴 하지만 서인권력을 형성한 그의 제자들이 율곡을 쓸데없이 미화하고 각색했다는게 문제의 핵심이지요. 언젠가  <율곡 문제>는 율곡 자신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를 이용한 제자들의 문제이고, 이후 노론-친일-뉴라이트로 그 인맥과 계보가 이어지는 <권력집단>의 문제라고 이야기한 게 기억나는군요.  율곡을 신격화하자니 그 부모부터 찬양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워낙 건달이라 건질게 없으니 그림이라도 잘 그린 그 어머니에 대한 기록을 미화한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일 수 있습니다. 

제가 2 년 전엔가 여기에서 이막동 선생의 문제를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신인선 여사보다도 이막동 선생이야말로 재평가가 필요한 문제인물이라는 것은 조선사를 전공한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근데 한국 국사학계 내부에서 이런 토론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학계에서 매장당할 것을 각오하기 전에는 문제제기조차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이지요.

근데 최근에 이막동 선생에 대한 주목할만한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이 ‘세종 과연 성군인가?” 인데 이 책을 쓴 사람은 조선사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경제학을 공부한, 그것도 뉴라이트계열의 학자였습니다. 뉴라이트 학자에게 인세가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돈이 아까웠지만 그래도 하도 신통해서 그 책을 사 왔습니다. 이막동 선생에 대한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 역시 역사학자가 아니라 국어학자였었구요. 이숭녕 박사가 제기한 문제는 훈민정음 출생의 비밀에 관한 주제에 국한되었지만, 저 뉴라이트 학자가 쓴 책은 대명사대주의와 함께 조선시대 의 잔혹하기 짝이없는노비제도의 확대 등과 관련하여 사대부계급만의 성군(또는 충견) 이막동 선생을 정조준 한 것이어서 파란과 논쟁확대가 예상됩니다. 저는 다 읽어보았는데 그리 재미있게 잘 쓴 책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할 말은 다 해 놓았으니 참고할만은 합니다.

이 글은 토론이 조금 진행되면 대민방으로 가야하기 십상일 것 같아 댓글을 안달려고 했는데, 기왕 너굴대장님께서 율곡 이이에 대한 과대평가 이야기를 해 주셨고 페이지도 넘어갔으니 약간의 마무리글을 달아보았습니다 ^^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