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바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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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바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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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에는 현재 두 곳의 기원이 운영중이다. 모두 바둑학원을 겸하고 있는데,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역사를 갖고 있다.

치앙마이의 바둑은 지금으로부터 약 6년전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치앙마이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 하나가 대학에 바둑동아리를 만들었다. 뒤이어 타이 CP그룹(세븐일레븐 체인) 회장이자 현 태국바둑협회 회장직에 있는 ‘꺼싹’의 바둑 보급 프로그램이 본격화 되면서 치앙마이의 바둑문화가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라차몽콘 대학도 '뱅(당시 3학년 학생)'의 주도로 동아리가 생겼고, 비슷한 시기 메조대학에도 동아리가 결성됐다. 이렇게 해서 치앙마이에 바둑 삼국지가 펼쳐지는 듯 했으나 메조대학은 앞선 두 대학에 비해 실력이 처지게 된다.

결국 치앙마이 대학 바둑부와 라차몽콘 대학 바둑부가 치앙마이 바둑세력을 양분하게 되고 두 대학은 북부지역 대학생 바둑대회에서 언제나 1,2등을 나눠먹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002년 치앙마이 대학교의 '퐁(당시 27세, 치앙마이대학교 엔지니어과 3학년)'이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그 균형은 깨지게 된다. 퐁은 원래 방콕 쭐라대학의 의과대생이었으나 1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그만두고 군대를 다녀온 후 치앙마이 대학으로 새로 입학한 독특한 수재로 기억된다.

그는 바둑실력도 단연 돋보였다. 한국으로 치면 인터넷바둑 '오로'를 기준으로 강한 3단과 얼추 비슷했다. 북부지역 바둑대회 개인전은 늘 그의 것이었으며, 단체전도 그를 주축으로 한 '멧(약 2단)'과 '찻(1단)'의 치앙마이 대학팀은 거의 최강 드림팀을 구성하게 된다. 같은 시기 치앙마이 대학교 바로 앞에 위치한 라차몽콘 대학은 상대적 열세에 놓이게 됐다. '뱅(약 1단)', 중국계 태국인 '쌩(당시 2학년 학생, 약 1단)', 그리고 쨈(당시 3학년 학생, 약 2급)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림고수와의 실전 경험이 적어 늘 치앙마이대학의 그늘에 가리게 된다.

그러다가 2002년 말 한국인 바둑고수 '한모씨'가 강호에 출현해 이들을 평정했다. 그는 공인5단급 실력을 갖춘 고수였으며, 당시 태국내 최고수였던, CP그룹의 중국 바둑유학파 출신 '오(당시29세)'와 겨루면서도 비록 전패를 했지만 대등한 경기 내용을 보일 정도였다. 참고로 '오'는 한국의 아마강자 박성균7단을 한차례 물리친 전력이 있다. 훗날 박7단은 사석에서 '한수 아래라 여겨 너무 자만한 탓에 대충두다 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푸켓의 한 바둑행사에 참여해 '오'와 접바둑을 둬준 경험이 있는 정수현 프로(9단)는 "'오'의 바둑이 예상외로 탄탄하지만 박7단보다는 약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어쨌든 그의 등장으로 치앙마이 바둑인구의 실력은 급 상승하게 된다. 그는 대학생 그룹과 자주 어울려 바둑 실력을 키워주기 시작했다. 특히 상대적 열세에 있던 라차몽콘 대학의 바둑부와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실력은 적어도 한급수 이상씩 올라가게 된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된 다면기의 결과였다. 그들의 만남은 훗날 치앙마이 최초의 기원 오픈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뒤늦게 나타난 라차몽콘 대학의 '위(발견당시 대학1학년, 약 5급수준)'는 '태국에도 이런녀석이 있구나' 싶을 정도로 바둑에 미친 친구였다. 유급을 맞아가면서 바둑공부에만 열중하던 그는 결국 1년만에 선배들을 물리치고 라차몽콘 대학 바둑부 내에 최고수로 등극한다.

그러나 치앙마이 대학 바둑부는 두터운 회원들(약 40명)을 토대로 점점 상향 평준화 되기 시작한다. 급기야 '퐁'을 비롯한 '찻'과 '멧'은 치앙마이 대학교 후문 쪽 '딸랏 똠파염' 인근에 최초로 바둑학원을 오픈한다. 그러나 이들의 바둑학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적은 학원생과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이 바둑학원은 6개월 만에 결국 문을 닫고야 만다. 그래도 이들은 라차몽콘 대학과 연대해 일요시장이 열리는 '타논콘던'에 나가 매주 바둑을 두며 시민들을 상대로 바둑이라는 생소한 스포츠를 알려나가곤 했다.

한편 치앙마이 대학 바둑부생들이 바둑학원을 오픈하자, 라이벌 관계였던 라차몽콘 대학 바둑부도 한국인 한모씨와 함께 의기투합, 곧 이어 오키드 호텔 옆(현재 미용실과 커피숍이 있는 자리)에 치앙마이 최초로 'Go(바둑의 국제 명칭) Tree'란 이름의 기원을 오픈하게 된다. 물론 학원을 겸했다. 이를 계기로 외국인들(주로 일본인)과 태국인의 바둑교류가 시작된다. 이 당시 일본인은 인터넷 2단 정도의 실력을 갖춘 50대 남성 두명과 1~2급 수준의 서너명이 기원을 들락거렸다. 훗날 이 학원은 재정난을 이유로 새로운 투자자를 맞이하며 지금의 깟수언깨우 백화점 3층 구석으로 장소를 옮기게 된다. 참고로 그 새로운 투자자는 오늘날 북부지역 명사로 남아있는 란나 왕족의 후손인 맞아들 '깽(현재 32세, 약 9급 수준)'이다. 현재도 이 학원은 라차몽콘 대학에 재학중인 '위'가 실무와 사범을 맡고 있으며, 일본인 손님을 중심으로 기원을 유지하면서 학원도 병행하고 있다.

라차몽콘 대학 바둑부생들이 'Go Tree'를 오픈할 즈음을 전후로 치앙마이에는 새로운 한국인 절대 강자가 등장한다. 인터넷 오로바둑 8단급의 '노모씨'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 매년 태국에서 열리는 '타일랜드 배 바둑대회'에서 수 많은 태국고수와 한일 고수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다. 상금 2만바트와 함께... 태국내 최고수였던 '오'와 방콕 내 한국인 최강자 '강모씨(기원운영)'도 그와의 접전에서 모두 고개를 숙인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언어소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처음에는 치앙마이 바둑인구와의 접촉이 원만하지 않았다. 훗날 두명의 제자를 받아들였는데, '못(치앙마이대학 졸업생)'과 '케이'였다. 이 둘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2006년 바둑학원을 차렸고 현재도 '못'의 책임아래 학원이 운영중이다. 측근에 따르면 현재 한국인 손님들이 심심찮게 방문한다고 한다. 어쨋든 '못'은 한국인 절대강자 '노모씨'의 지도에 힘입어 현재 치앙마이의 태국인 중 근소한 차이로 1인자에 위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못'은 현재 인터넷 바둑 약 4단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다.

이밖에도 파야얍대학 학생 '못(현재 3학년, 약 5급수준)'은 앞선 두 대학의 바둑문화가 나날이 발전하는 걸 보고 부러워하다, 동료학생 서너명과 동아리 결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학생들은 바둑보다는 '빠이티여우 텍', '빠이 찝싸우'를 '버이버이'하다가 결국 동아리 결성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처럼 치앙마이 바둑사는 한국인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한국인 '한모씨'와 '노모씨'는 치앙마이의 바둑 보급은 물론 그들의 실력향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 셈이다. 특히 이들에 의해 기존에 없던 훌륭한 한국 바둑 보급서가 치앙마이로 유입됐으며, 이 책들의 복사본은 바둑인구 사이에 손에서 손으로 전해 지고 있다.

6 Comments
돌싱 2007.05.19 04:04  
  잘 읽었습니다. 저도 바둑을 좋아하는데.
워낙 고무줄 급수라서 한겜바둑에서는 6단까지 갔었고
엠바둑에서는 1단에서 흐물거리고. 오로바둑에서는 2급인가~3급인가에서 놀고 ㅋㅋㅋ.
그런데 태국 기원은 기료 얼마나 받나요?
쏨분 2007.05.19 10:15  
  간만에 재밋게 잘 읽었습니다..퍼가겠습니다...노모씨님^^
덧니공주 2007.05.20 00:22  
  바둑은,검은알과,흰알만 구분하는 문외한인 저두,참 재미난,바둑의 역사네요~ [[으힛]]
마이미땅 2007.05.20 10:01  
  참고로 필자는 윗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woodman 2007.05.20 17:12  
  누구실까나. 한모씨는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거주중이십니다.
여행2 2007.05.21 15:19  
  잘읽고 갑니다...... 재미 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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