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떡과 땅콩 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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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떡과 땅콩 크림

봄길 8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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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도 5월 1일 초등학교 2학년 때이다. 내가 이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날은 노동절이었고 그 때문에 엄마가 집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나의 자랑이었다.

엄마는 집 앞에 있는 도기회사에 다니셨다. 결혼과 함께 반신불수가 되신 아버지 대신 전쟁 뒤에도 살아남은 6남매를 남편과 함께 엄마는 노동으로 부양하여야만 했다.

물론 6남매가 모두 전쟁 전 세대는 아니다. 9번째인 나와 함께 뒤에 3명은 전쟁 후 세대이다. 가장 큰 누이는 출가하였고 안타깝게도 셋째부터 다섯째까지의 형들은 장성하지 못한 채 전쟁 전에 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것이 가족들의 미래를 오래도록 어둡게 만든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 도시의 초등학교는 2부제 수업을 하고 있었다. 대강의 기억으로 한 학급은 75명 내외이었고 나는 콩나물시루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 실감하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12시경이면 오전 학급이 파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오후 학급이 대강 4시까지 계속 됐다. 오전 학급은 파할 때, 오후 학급은 점심시간에 급식을 주었다. 급식이란 게 미국이 원조한 옥수수가루로 시루떡 같은 걸 만들어 그 위에 땅콩크림을 묻혀주는 것이었다.

급식을 받는 아이들은 1학년 때 결정이 되어버렸다. 담임이 75명이나 되는 아이 중에서 급식을 줄 아이와 안 줘도 될 아이를 구분하기가 너무 힘드니 몇 가지 조건을 말하면서 자기가 해당되면 손을 들라고 하였다.

부모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가? 부모가 다 있더라도 직장이 아무도 없는가? 자기 집이 없는가? 그런데 결국 손을 들지 않은 아이는 75명 정도 중에 3명이었다.

나는 양반집 아이였다. 거기다 주일학교를 다니는 아이였다. 그때만 해도 양반 집 가문은 어떤 형태이든 품위를 유지해야한다고 늘 듣고 자랐다. 그것은 거짓말 안하는 것이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것이고 더러운 욕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꽤 거기에 잘 적응하며 자랐다. 그것이 내 정체성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렇다. 8명이 사는 8평짜리 집이지만 집이 있었고 장애인이지만 부모가 다 있었고 엄마이기는 해도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8살의, 반에서 가장 작고 가장 빼빼 마른아이는 급식시간이 될 때면 늘 밖으로 슬며시 나가곤 했다.

급장아이가 떡을 받아 들고는 먹다가 조각을 집어던진다. 퀭한 눈으로 그 떡을 바라다본다.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지고 나는 운동장에 있는 급수대로 가서 작은 손으로 물을 움켜 먹어본다.

그날 5월 1일은 어찌 된 일인지 유독 결석한 아이들이 많았다. 떡을 담은 솥에 얼핏 보아도 7~8개는 남은 것이 보였다. 선생님이 주위의 아이들에게 하나씩 더 준다. 그러다가 문득 나를 보고는 ‘춘길이도 하나 먹어라.’하며 주신다. ‘괜찮아요.’ 말을 하면서도 손길은 이미 그것을 받고 있었다.

집에 있는 엄마가 생각났다. 도무지 혼자 먹을 수가 없었다. 주린 배를 움키며 혓바닥으로 땅콩크림을 조금 핥아먹었다. 전율 같은 느낌이 내 후각과 미각을 자극했다. 그뿐이었다. 나는 잰 걸음으로 집으로 갔다.

집에 오니 엄마가 계셨다. 엄마에게 옥수수떡을 내밀었다. 그 당시에는 그 떡이 꽤 크다고 느꼈다. 아주 자랑스러운 듯 엄마에게 함께 먹자고 했다. 적어도 두 명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 것처럼 나는 그렇게 느꼈다.

사실 오면서 계속 생각한 것이 있었다. 떡을 그냥 먹으면 너무 작아 혼자 먹기도 힘들거니 그걸 부셔서 죽을 쑤어먹으면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6살 동생이 떡을 보고는 거의 환장을 했다. 나는 동생을 달랬다. 얘, 그냥 먹으면 너무 작으니 죽을 만들면 엄마도 먹을 수 있잖아 얘기했다. 그러나 막무가내다. 떡을 달라고 계속 운다.

짜증이 났다. 엄마가 동생과의 승강이를 보다가 그냥 떡을 나눠먹으라고 한다. 나는 ‘엄마는 어쩌고..’ 반문했다. 그 때 엄마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떡을 동생과 나누어먹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가난한 사랑을 훈련받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좀 더 온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괴롭고 어려울 때, 어떻게 인간이 품위를 지킬 것이며 어떻게 사랑을 나눌 것인지 나는 마음에 늘 새기며 성장해 갔다.

아이들에게 나는 종종 아빠의 성장사를 얘기해준다. 그들의 현재의 삶과 너무 동떨어진 것 같은 그런 삶의 모습들을 때때로 들리어준다. 그렇지만 나는 단지 말할 뿐이다. 결코 나는 내 아이들에게 아빠와 같은 삶을 통과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질병과 궁핍은 자랑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일부러 선택할 가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단지 건강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약한 이들과 빈궁한 이들을 자기와 상관없는 이들이라 여기지 않고 함께 살며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자기가 겪지 않은 고난에 대해서도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과 마음을 공유할 수 있다면...

8 Comments
시골길 2007.07.06 01:41  
  문득...장호원에 계신..티티도그님이 생각나는 스토리이군요.. 주석이와 티티도그님 요즘 않보이시니..
봄길 2007.07.06 01:43  
  티티도그님 글올릴 때 깜짝 놀랐습니다.
경기랑 2007.07.06 11:23  
  허~~~ 가슴에 크게  소용돌이를 만들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아이들 둘을 데리고 옛날이야기나 할렵니다,,, 금요일이니  쌩쏨이나 한잔 하면서요,,,,
딩굴 2007.07.06 15:14  
  넘 좋은글 잘 보았읍니다,,,,,
Satprem 2007.07.07 03:20  
  1960년대는 노동정이 5월 1일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아마 3월 10일이었던가????
봄길 2007.07.07 08:44  
  맞습니다. Satprem님 얘기를 들으니 노동절이 메이데이로 바뀐게 그 후라는 것, 기억납니다. 역시 인간의 지혜란 44년, 세월의 무게앞에서 어쩔 수가 없는 것같습니다. 나는 상당히 똑똑하다 얘기를 들으며 살아왔는데 ㅎㅎㅎ근데 그때는 엄청 따뜻하고 화창한 날로 기억하는데...Satprem님은 연배가 얼마나 되시는지 궁금...
흰곰 2007.07.09 04:20  
  예전 울 엄니와 아부지께서 한창 자라실 그럴 시기이네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덧니공주 2007.07.09 08:53  
  집이 가난하다거나,부자라거나,생각해본적은 없지만,
초등학교때,아버지가,사우디를 가 계셔서,아버지의 자리가 좀 부족했어요.
동생이랑,셋이서 백원가지구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른으로 성장하고 나니,,,,,,백원으로 행복했던 시절,
과자 한봉지루 행복했던 시절루 돌아가고 싶을때가 많답니다..... 봄길님의 글을 보니깐,잠깐,어린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네요.......
바나나에 침흘리던 시절...[[낭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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