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한테 삐지신걸까?
아시는 분은 알고 모르시는 분은 모르겠지만,,
싸르니아는 유학생 모녀 + 고양이와 함께 산다.
따로 사는 와이프가 나한테 통고만 하고 작년 여름 말미에 갑자기 들여보낸 객식구다.
편의상 유학생의 어린 딸 이름을 옥희라고 하자.
낯 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는 거에 민감한 편이지만, 싸르니아는 지금까지 옥희네 모녀와 잘 지내왔다.
믿거나 밀거나 나는 옥희맘에게 필요한 말 이외에 먼저 말을 건 적이 없다.
그게 서로 편하기 때문이다.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으므로 불편할 건 없는데,
문제는 주방이었다.
주방에서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나의 주방사용시간을 다음과 같이 적어서 톡으로 알려줬었다.
1. 아침에 제가 주방을 사용하는 시간은 Mon –Fri 0600 부터 0630 까지 30 분 간 입니다.
2. 집에서 나가는 시간은 Mon – Fri 0730 이고 1700 에 집에 들어옵니다 (출필고 반필면)
3. 주말에는 아침식사를 나가서 하므로 언제나 주방을 사용하셔도 상관없습니다.
4. 저녁식사 역시 거의 나가서 먹거나 사 먹으므로 상관없습니다.
5. 제가 라운드리와 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시간은 매주 토요일 오전 입니다.
옥희맘으로부터 “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답을 받은 후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지냈다.
몇 주 전, 한국에서 옥희맘의 어머니,즉 옥희 할머니가 오셨다.
옥희 할머니라고 해서 엄청 나이많은 할머니는 아니고,
나이로 따지자면 그저 싸르니아의 큰 누님 쯤 되는 연배다.
옥희 할머니는 딸과 손녀를 위해 하루종일 주방에서 손이 마를 날이 없는 것 같았다.
주중 낮에야 내가 집에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내가 집에 있는 동안에는 옥희 할머니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주방에서 보내는 것 같았다.
은퇴교사라고 자기를 소개한 할머니는
한국에서 가져 온 녹두를 믹서기에 갈아 빈대떡을 만들기도 하고 김밥을 말기도 하며 뭔가를 오랫동안 끓이기도 했다.
집 안에 널리 퍼진 냄새로 보아 사골국이나 꼬리곰탕임이 분명했다.
싸르니아에게도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빈대떡 합계 여섯 장과 김밥 네 줄이 돌아왔다.
싸르니아는 답례로 옥희에게 허니버터칩 한 봉지, 오징어땅콩 한 봉지, 짜왕 두 봉지 마이쮸 두 개를 줬다.
그런데
며칠 전 사단이 벌어졌다.
아침 여섯 시부터 출근 직전까지 주방에서 할머니가 열심히 뭔가를 만드시는 바람에
나는 평소보다 일찍 나와 회사 근처 맥카페에서 베이컨 앤 에그 머핀과 커피 한 잔으로 아침식사를 때웠다.
사실 할머니가 주방에 있다고해도 나는 옆에서 나 먹을 요리 만들어 먹으면 그만이긴 했지만,
뭔가 룰이 깨지고 있다는 생각에 맘이 불편해져서 그냥 일찍 나온 거다.
그 날 아침 바로 옥희맘에게 톡을 날렸다.
작년 8 월 말 입주했을 때 알려줬던 주방사용시간을 상기시키며 옥희 할머니에게도 말씀드려달라고 전했다.
“네,잘 알겠습니다^^” 라는 톡 문자가 바로 왔다.
옥희맘이 옥희 할머니에게 뭐라고 전달했는지 모르지만,
그 날 이후부터 옥희 할머니는 주방에서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근데 이상한 것은
내가 제시한 시간에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옥희 할머니가 아예 사라지셨다는 거다.
그 날 이후 옥희 할머니는 주방에서도 보이지 않고, 거실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매일 저녁 일곱 시면 나가시던 산책을 나가시는 기미도 없다.
오늘 저녁 주방에 들어갔다가,
옥희 할머니가 온 이후에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색다른 광경을 목격했다.
옥희맘이 몸소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거였다.
궁금해서 물었다.
“옥희 할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셨나요?”
옥희맘은 평소와 별로 다름없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아뇨, 방에 계세요”
그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봤다.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옥희 할머니 삐졌다 !
주방사용시간 지침을 전달한 딸에게 삐졌을까?
아니면 싸르니아한테 삐졌을까?
지금부터 왜 삐졌는지 그 이유를 찾아봐야겠다.
(이상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고 실제 벌어진 상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