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저씨"가 문제인가?
장면 1
자주 가는 공원이 있다. 어느 날 그 공원에서 경찰관 “아저씨” 2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 공원은 금연구역 아닌가?’
공원을 나오며 살펴보니 공원 전체가 금연지역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장면 2
다시 그 공원에 갔다. 한적한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아저씨” 서너 명이 오더니, 넓은 데도 많은데 하필이면 내가 쉬고 있는 곳으로 오더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한 움큼의 연기가 왈칵 몰려왔다.
“여기는 금연구역입니다. 담배 피면 안 됩니다.”
내 말에 아저씨들은 담배 끌 생각은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신고하면 과태료 물어야 합니다.”
그들의 눈초리를 다 받아내며 그렇게 말하자, 뭐라고 씨불씨불 거리던 그들은 슬그머니 담배를 끄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 나도 아저씨여서 이 정도로 끝났지 만약 젊은 여자였다면 상대방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면 3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5분 정도 걸린다. 가끔 외출하려고 역까지 걸어가다 보면, 길바닥에 “카악~” 소리 나게 가래침을 뱉는 사람을 1~2명은 목격한다. 100% “아저씨”들이다.
장면 4
집에서 가까운 곳에 하천을 따라 보행로와 자전거도로가 있다. 종종 그곳으로 가서 걷거나 조깅을 한다.
그런데, 분명 보행로 여기저기에 우측통행이라고 적혀 있는데 좌측통행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경우, 내가 우측통행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좌측통행을 하면 서로 부딪히게 된다. 우측통행하는 사람이 바로 코앞까지 와도 좌측통행하는 사람은 비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100% “아저씨”다.
보행로와 자전거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 지점을 지날 때마다 보행자들은 가슴을 졸여야 한다. 자전거가 보행자를 칠 듯이 전속력으로 지나가기 때문이다. “보행자 우선” “자전거 서행” 이런 안내판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데도 말이다. 남이야 가슴을 졸이든 말든 쾌속 질주를 즐기는 분들 역시 100% “아저씨”다.
이런 사소한 장면들은 내가 거의 매일 경험하는 것들이다. 재수 좋은 날은 1~2개만 경험하고 재수 나쁜 날은 4개를 다 경험한다.
이와 비슷한, 아니 이보다 더 심한 장면들을 숱하게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한국의 “아저씨”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한국의 아저씨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나도 같은 아저씨인지라 나의 심리 및 행동과 다른 아저씨들의 심리 및 행동을 비교분석해보았다. 그리고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첫째, 한국의 아저씨들은 준법정신이라든가 공중도덕 개념이 매우 희박하다.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다. 자신만 편하고 좋으면 된다. 어떤 이의 지적대로 “개인적 자아가 과잉 발달해서 사회적 자아는 증발된 사람들”인 것이다.
둘째, 위의 행동, 즉 자신은 편하고 좋지만 남에게는 피해를 끼치는 행동에 대해 누가 지적을 하면 무척 불쾌한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다음 단계의 반응은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서 다르다. 몸 여기저기 낙서라도 있는 동네 양아치라면 바로 꼬리를 내린다. 경찰관이라면 몇 마디 구시렁거리다가 역시 꼬리를 내린다. 같은 아저씨라면 먼저 눈빛으로 제압을 해보려고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꼬리를 내린다. 간혹 “너 나이가 몇이야?”와 같은 전혀 엉뚱한 말로 화제를 바꾸면서 전세를 역전시키려고 애쓰는 아저씨도 있다.
상대가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라면, 게다가 여자라면, 아저씨들의 반응은 180도 달라진다. 대개는 상대의 말이나 지적을 무시하고 하던 짓을 계속한다. 간혹 “네가 뭔데!”와 같은 적반하장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상대가 물러서지 않고 거듭 지적질을 하면 급기야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사례에서 드러나는 “아저씨”들의 특성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는 것이다. 마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처럼.
셋째, 이런 “아저씨”들은 가정이나 회사나 선후배 모임 등 공식적이고 공개된 자리에서는 상당히 모범적인 태도의 소유자이다. 건실한 가장이자 훌륭한 회사 상사이며 존경받는 사회 선배인 것이다.
그런데 혼자이거나, 아저씨끼리 모이거나, 아니면 궁지에 몰린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민낯이 드러난다. 최근 벌어졌던 여러 낯 뜨거운 사건의 중심에는 빠짐없이 “아저씨”가 존재하고 있지 않았던가.
알고 보면 아저씨는 참 불쌍한 존재이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혼나고 선생에게 야단맞고 커서는 군대 가서 고참에게 터지고 사회 나와서는 상사에게 깨지고... 남자니까, 강하니까, 가장이니까, 이런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부담감과 책임감을 감당하면서 살아왔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회적 땡깡이나 부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존재감을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나마 강자인 아저씨가 이렇게 힘든데 상대적으로 약자인 젊은이나 여자들은 얼마나 더 힘들 것인가.
인간의 두뇌를 연구한 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의 두뇌가 가장 완벽해지는 시기는 40대 초반에서 50대 후반이라고. 젊을 때는 번득이는 아이디어는 뛰어날지 몰라도 그걸 논리적으로 정리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 너무 나이가 들면 전반적인 두뇌 활동이 퇴화된다. 그에 비해 40~50대는 창의적인 능력도 아직 살아 있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축적한 지혜를 바탕으로 노련미와 원숙미를 발휘하는 시기이다. 대뇌생리학적 관점에서는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바로 “아저씨”인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살고 있는 “아저씨”인 나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 뛰어난 능력을 내가 손해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더라도 나만 잘 되는 방법을 추구하는 일에만 사용해오지 않았던가. 이타심보다는 이기심을 앞세우며 나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하지 않았던가. 그게 왠지 온당하지 않다는 걸 느끼고는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와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 게다가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왜? 라는 마음으로 일부러 무시해왔던 건 아닐까.
나의 이런 생각이 오판이라면 참 다행이겠다.
뭐, 남 이야기 길게 할 거 없다. 나도 아저씨니까 나부터라도 잘하자.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마음속에 작은 티끌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참에 말끔히 씻어내 보자.
좋든 싫든, 세상을 주도해가는 건 아저씨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