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거짓없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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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거짓없는 진실

의정이 6 882
'콰이강의 다리'.

우리에겐 명장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57년작 영화로 기억되는 제목이다. 태평양전쟁 때 군수품 보급철도를 건설하려는 일본군과 그 작업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들의 갈등을 그렸다.

대부분의 전후세대들은 이 '콰이강의 다리'에 등장하는 '포악한 일본군'을 맘껏 욕하며 부담없이 영화를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빠뜨렸다. 실제 '콰이강의 다리' 건설에는 일본군만이 아닌 조선인 군속들이 참여했고, 심지어 그 가운데는 자신의 이름과 국적을 찾지 못한 채 일본군 전범으로 처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최근 작가 정동주씨가 발표한 소설 '콰이강의 다리'(한길사)는 불과 반세기전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걸어간 기구한 운명을 밝히고 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1년부터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미얀마를 점령해 나갔다. 그러나 1942년 이후 연합군의 반격으로 해상보급로가 위협받기 시작하자 육로를 통한 보급품 공급작전을 구상한다. 밀림과 계곡을 관통해 태국의 논프라독과 미얀마의 탄비자야를 잇는 비밀철도 건설이었다.

이름-국적 못찾은 채 형장이슬로 사라지기도


일본군 대본영은 1942년 4월부터 5월까지, 조선 전역에 걸쳐 영어를 할 줄 아는 청년들을 색출해 내는 특별 징용령을 내렸다. 각 군마다 3~6명씩 강제 배정해 전국에서 3000여명을 긁어모았다. 모집 명분은 '군속'으로, 월급과 계약기간 2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해당자가 스스로 지원한 것처럼 통지서를 발급했다.

이들 3000명은 그해 6월 부산 노구치부대에서 2개월간 특별훈련을 받았다. 이 중 300명의 친일 유력인사 자제들은 한국에 남고, 나머지 2700명은 3000톤급 '광산호'를 타고 동남아 전선으로 이동했다.

2700명 가운데서도 영어를 가장 잘하는 것으로 조사된 300명은 사전분류돼 가장 난공사 지역인 콰이강다리 공사현장, 즉 제4포로수용소와 인근 포로수용소에 배치돼 연합군 포로들을 담당했다. 맡은 일은 통역, 서무보조, 경계근무(포로감시), 취사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창씨개명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 이름으로 불렸고, 서류에도 일본국적으로 표기됐다.

조선인 군속들은 일본군으로부터는 식민지 신민으로 차별과 감시를 당했고, 직접 부닥치는 포로들로부터는 열악한 부상자 치료나 처우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뒤집어써야 했다. 소설속에 주인공 '김덕기'로 그려진 실존 인물 홍종묵씨(97년 사망)도 제4포로수용소의 전담통역자로 영국군 포로대표와 일본군 포로수용소장간의 통역을 주로 맡았는데, 양자 사이에 끼여 모진 심신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아리랑을 부르며 그렇게 죽어가다니…

일본군의 패전후 대부분의 군속들은 귀국선을 탔다. 하지만 콰이강의 다리 공사장에 있던 군속들은 모두 전범혐의자로 체포돼 방콕형무소에 수감됐다. 이 다리 공사가 워낙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어서, 연합군 포로들의 적개심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1947년 8월7일 영국 외무성이 발표한 콰이강 철도공사 중 사망자 내역은 연합군 2만명.

수감된 조선인 군속들은 포로들의 증언에 의해 52명이 유죄혐의를 받았고, 싱가포르 창이형무소에 이감된 뒤 24명은 사형선고, 28명은 무기징역 형을 받았다. 홍종묵씨에게도 사형이 선고됐다. 그는 사형대기 중 두번에 걸쳐 자살을 기도했다가 수용소에서 그의 도움을 받은 영국군 군의관의 증언 덕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살아남은 29명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미일강화조약이 체결돼 다른 일본군과 함께 도쿄 수가모형무소로 이감됐다.

일본군 죄수들을 위한 구명운동이 펼쳐져 이들은 재심을 받고 속속 가석방됐다. 조선인 29명도 일본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번번이 기각됐다. 미군사령부는 이들 29명의 조선인을 일본인 취급했고, 일본정부에서는 이들을 제3국 혹은 무국적자로 분류했다. 6·25전란에 휩싸인 한국정부는 아무런 도움도, 관심도 보내지 않았다.

일본인 변호사 마쓰시타 세이주가 한국인 죄수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돕겠다고 나서 이대흥 이학래 허영 양월성 서해구(이상 실명)에게 가석방 허가가 났다. 이들은 가석방되자마자 매일같이 일본 총리 공관 앞에서 나머지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한국정부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1955년 8월 맨 마지막으로 홍종묵씨에게도 가석방 조치가 내려졌다. 가석방 신분이라 일본땅을 벗어날 수도 없었고,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없었기에 한국으로 돌아갈 길도 없었다. 미리 석방된 친구들은 신사 기둥에 목을 매달고, 혹은 기차에 몸을 던지거나 정신병원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죽어갔다. 교토의 일제징용 노동자 출신 한국인들의 거주지역인 '우토로'로 들어간 홍종묵씨는 자서전 형식의 간단한 기록물과, 평생토록 일본정부에 정중한 사과와 응분의 보상을 요구해 온 소송관련 기록물과 증거들을 아들에게 남기고 97년 82세로 한많은 목숨을 거뒀다

 

6 Comments
시계성 2009.03.17 16:15  
의정이님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글  잘읽었습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 세대의 가슴아픈
역사인데도 우린 너무 빨리 잊어버린거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몆년전에  TV에서  다큐멘터리로  본  기억도  있습니다  비단  이분들뿐만  아니고  얼마나 많은 분들이 억울하게 돌아가셨는지  생각하면  울화통이  치미는데 더화나는건 우리나라 국민성이  일본애들을  못따라간다는겁니다
야사관 2009.03.18 04:12  
태훈이 형님 맞으시죠??
미네 2009.03.18 09:08  
의정이 님이  야사관님이 말씀하신 그분인가요.....
의정이 2009.03.18 14:44  
넹 ,,, 맞습니다...
미샬 2009.03.18 15:58  
칸짜나부리 투어를 했을 때, 콰이강에 다리를 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국인이 그렇게 많이 죽어 갔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 곳에서 잠들어 있는 안타까운 영혼들에게 명복을 빌어봅니다.
의정이 2009.03.18 16:24  
지금 칸차나부리 에서는 한국군 전사자를 위해서 한국분 한분이 위령탑을 조성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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