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태국 분쟁에 대한 역사적 배경설명
글의 성격분류가 좀 애매해 "주변국가정보"와 "그냥암거나" 두군데에 올립니다.
태국의 유명 여배우 수와난 콩잉이 "앙코르왓을 태국에 돌려주지 않는다면 캄보디아에서 공연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시작된 시위, 프놈펜주재 태국대사관 습격사건 등을 뉴스에서 보고 놀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앙코르왓이 더 주목을 끌게 된 면도 있는 것 같구요.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앙코르왓을 태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매우 생소하게 들리실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미디어들은 그 궁금증에 적절한 설명을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제 세부 전공은 이쪽이 아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약간 아는 바가 있어 몆자 적습니다. 혹 양국을 통행하시는 과정에 도움 되신다면 좋겠습니다.
인도차이나를 식민화했던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보호령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태국의 영토를 강압적인 방식으로 침탈합니다. 프랑스의 영토욕이 일단락되는 1904년 6월 29일 의정서에 의해 프랑스는 그들이 점령했던 짠타부리 에서 물러나고 메콩강 서안 25km 중립지대를 해제하는 대신 짯(Trat)지방을 할양받게 됩니다. 그런데 국경선의 구체적 획정을 위해 실사를 하다보니 짯 지방의 민족구성이 거의 태국인이라 통치에 불편하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프랑스측은 다시 태국을 을러서 짯과 단사이 두 지방을 태국에 귀속시키는 대신에 면적 8배, 인구 10배에 달하는 밧땀방, 시소폰, 시엠립 세 지방을 달라고 요구하고 이 수정조약은 1907년 3월 23일에 조인됩니다. 태국 입장에서 본다면 물론 그 이전의 불평등조약들이 다 불만이겠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억을하게 뺏긴(?) 땅에 앙코르왓이 들어가 있었던 셈이지요.
이 세 지방에 대한 태국의 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11월 28일 태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전쟁이 발발하는데, 태국군이 시소폰까지 진군한 상황에서 일본이 중재에 나섭니다. 협상은 토쿄에서 진행되었고 1941년 3월 11일 양측이 조인한 협정에 의하면 위의 세 지방을 태국에 돌려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가 "강요된 조약"이었다면서(그럼 그전까지 지네들이 한 건 강요 아니구 ?) 토쿄조약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복잡해집니다. 전승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 편을 들어주고, 태국은 세 지방의 귀속문제를 주민투표에 붙일 것을 제안하였으나 역시 거부당합니다. 결국 워싱턴 조약(1946. 12. 9)에 의해 이 세 지방은 프랑스령이 되고, 1953년 캄보디아가 독립함으로써 태국으로서는 이 땅들을 돌려달라고 할 명분도 잃게 되지요.
어이없어 보이는 사건이지만 실은 이처럼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는 문제랍니다. 가볍게 말씀하셔서 불필요한 감정(특히 태국인)을 자극하지 않으시길...
태국의 유명 여배우 수와난 콩잉이 "앙코르왓을 태국에 돌려주지 않는다면 캄보디아에서 공연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시작된 시위, 프놈펜주재 태국대사관 습격사건 등을 뉴스에서 보고 놀라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앙코르왓이 더 주목을 끌게 된 면도 있는 것 같구요.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앙코르왓을 태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매우 생소하게 들리실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미디어들은 그 궁금증에 적절한 설명을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제 세부 전공은 이쪽이 아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약간 아는 바가 있어 몆자 적습니다. 혹 양국을 통행하시는 과정에 도움 되신다면 좋겠습니다.
인도차이나를 식민화했던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보호령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태국의 영토를 강압적인 방식으로 침탈합니다. 프랑스의 영토욕이 일단락되는 1904년 6월 29일 의정서에 의해 프랑스는 그들이 점령했던 짠타부리 에서 물러나고 메콩강 서안 25km 중립지대를 해제하는 대신 짯(Trat)지방을 할양받게 됩니다. 그런데 국경선의 구체적 획정을 위해 실사를 하다보니 짯 지방의 민족구성이 거의 태국인이라 통치에 불편하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프랑스측은 다시 태국을 을러서 짯과 단사이 두 지방을 태국에 귀속시키는 대신에 면적 8배, 인구 10배에 달하는 밧땀방, 시소폰, 시엠립 세 지방을 달라고 요구하고 이 수정조약은 1907년 3월 23일에 조인됩니다. 태국 입장에서 본다면 물론 그 이전의 불평등조약들이 다 불만이겠지만 가장 마지막으로 억을하게 뺏긴(?) 땅에 앙코르왓이 들어가 있었던 셈이지요.
이 세 지방에 대한 태국의 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11월 28일 태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전쟁이 발발하는데, 태국군이 시소폰까지 진군한 상황에서 일본이 중재에 나섭니다. 협상은 토쿄에서 진행되었고 1941년 3월 11일 양측이 조인한 협정에 의하면 위의 세 지방을 태국에 돌려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가 "강요된 조약"이었다면서(그럼 그전까지 지네들이 한 건 강요 아니구 ?) 토쿄조약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복잡해집니다. 전승국이었던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 편을 들어주고, 태국은 세 지방의 귀속문제를 주민투표에 붙일 것을 제안하였으나 역시 거부당합니다. 결국 워싱턴 조약(1946. 12. 9)에 의해 이 세 지방은 프랑스령이 되고, 1953년 캄보디아가 독립함으로써 태국으로서는 이 땅들을 돌려달라고 할 명분도 잃게 되지요.
어이없어 보이는 사건이지만 실은 이처럼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는 문제랍니다. 가볍게 말씀하셔서 불필요한 감정(특히 태국인)을 자극하지 않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