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킬링필드>의 허구
이 글이 여행정보란에 올릴 수 있는 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영화<킬링필드> 탓인지 크메르루즈의 학살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은 듯 해서 이 글을 올립니다.
앙코르 유적 여행하기 전에 앙코르 관련 책 읽는 편이 좋듯이,
캄보디아를 여행하기 전에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를 제대로 알고 가는 것도
좋으리라고 여겨져서 글을 씁니다.
롤랑 조페가 만든 영화 <킬링필드>의 영향 때문인지, 오랫동안 반공교육을
열심히 받은 탓인지 많은 분들이 미국의 주장, 즉 폴 포트 이끄는
크메르루즈가 200만 명을 살해했다, 프랑수아 폴쇼가 쓴
<캄보디아-이어제로 Cambodia-Year Zero>도 미국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는 주장을 별다른 의심없이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캄보디아의 끔찍한 학살은 보통 1기와 2기로 구분되어 집니다.
1기를 1969년부터 1973년까지의 미국의 폭격에 의한 대량 학살,
2기를 1975년부터 1979년까지의 크메르루즈의 집권기에 발생한 학살로
나눕니다.
캄보디아 학살에 대한 수많은 보고서가 있지만 보편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수치에 따르면
크메르루즈가 처형한 인원을 20만 명,
기아, 질병으로 사망한 인원을 75만 명,
미국의 폭격으로 사망한 인원을 7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150~16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미국은 베트남의 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전략폭격기 B-52를 이용해
캄보디아에 무차별 폭격을 가합니다. 미국 군사기록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이 때 사용된 폭탄량은 미국이 2차 대전에 일본에 사용한 폭탄량의 3배인
54만 여톤에 달한다고 합니다.
1973년 6월 19일 폭격 명령 거부죄로 법정에 선 B-52 부조정사인
도널드 도슨의 증언에 따르면 군사 목표물을 발견할 수가 없어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공격 목표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폭격은 미국 의회도 몰랐던 불법 비밀 폭격이었습니다.
1973년 미국 의회가 비밀 폭격을 알고 공습을 중지하라고 하자 닉슨 정부를
실질적으로 조정했던 키신저는 의회에서 '그것은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베트콩에 대한 공격이다'고 말합니다.
'부수적인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 부수적인 일, 어쩔 수 없는 일로 70만 명의 캄보디아인 죽었습니다.
헨리 키신저는 전쟁 선포도 하지 않은 중립국에 융단폭격을 가했고,
시민들에게 공습 경고 한 번 내리지 않았으며, 제네바 협약을 어기고
불법 폭탄을 퍼부었고, 4년 동안 폭격을 하면서도 이 사실을 의회에 보고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미국은 1973년 폭격이 끝난 후 유엔을 포함한 여러 국제기구들의
대캄보디아 구호사업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그 이유로 수많은 아이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미국은 이런 식으로 걸프전과 코소보전,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크메르루주의 학살 주범 폴 포트의 학정으로, 미국의 폭격으로 수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킬링필드하면 그저,
크메르루즈만을 떠올립니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에게 학살 책임을 묻는다면 동시에 미국쪽 학살 주범인
키신저에도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키신저를 세계적 석학이나 국제전략 전문가니 하며
칭송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방송사들도 무슨 날이면 키신저에게
거금을 주고 '키신저에게 듣는다' 는 대담 프로를 방송했습니다.
크메르루즈의 학정과 학살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미反美를
의도해서 쓴 글도 아닙니다.(개인적으로는 반미입니다만) 여러가지 이유로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알고 캄보디아를 여행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적습니다.
키신저는 1973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글은 아시아네트워크가 쓴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와
도올의 <앙코르 와트, 월남 가다> 등에서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