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바타의 몸매를 통해 보는 앙코르 유적
데바타를 아시나요???
보통 드바라팔라는 남자 수문장을 이야기 하고 여자 수문장은 데바타를 말합니다
초기에는 연꽃을 들고 있기도 하고...후기에 가면 뱀을 목에 감고 있는 형국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초기유적에는 압살라가 나오지 않고 데바타가 출입문 주위에 나오게 되며 중기 이후 압살라가
나오면서 위치가 애매해 지기도 한다
압살라와 구별하는 방법중 하나는 발의 모양이다. 평평하게 하고 있으면 데바타, 춤을 추기 위해
발을 들고 있으면 압살라로 보기도 한다.
데바타는 그 사원을 지키는 수문장의 역활이며 압살라는 신을 위한 무희다
앙코르 시절의 압살라는 신왕일치 사상으로 본다면 후궁으로 볼수도 있다
앙코르 유적을 보다 재미난걸 보게 되었다
바로 데바타의 몸매가 변하는걸 볼수 있었다..
그리고 옷차림도 변한다.
쁘레야 코의 데바타다
전체적으로 덩치가 크고..가슴도 크다 상체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표현했다
수문장이지만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치마가 일자로 되어 있고 하체를 표현하지 않았다
890년대에 세운걸로 추정 한다
프놈바켕의 데바타
몸은 약간 슬립해졋다. 그럿지만 가슴의 크기는 상당이 크게 표현했다. 900년경 지은것으로 추정한다
코케르의 데바타
몸매는 슬립해 졋지만 상체에 가슴은 상당이 크게 표현되어 있다
940년경 만든것으로 추정한다
반데이 스레이의 데바탸 이다
동양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던 유적이다
코케이에서는 덩치가 약간 작아졋다가 다시 커졋다
쁘레야코에 비해서는 좀 작지만 가슴은 아주 크게 표현했다
960년대 지은것으로 추정한다
바푸온의 데바타
1050년에 지은것으로 추정한다
아직까지는 데바타가 미의 상징보다 다산의 상징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를 보면...
프놈바켕이나 코케이는 수도를 옮겻을때다.
그래서 그런지 몸매는 약간 작아 지지만 가슴은 크게 표현했다
그 당시 다산은 영아 사망율이 높은 관계로 여자가 해야할 큰 일이었고 가슴이 크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고 생각했다
이제 중기로 넘어간다
중기유적이자 앙코르의 가장 유명한 앙코르 왓의 압살라다
데바타가 있었나???
돌아와서 생각하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압살라 사진을 보면...
당시 아주 화려한 머리 장식과 몸매가 아주 슬립해 졋다
거의 현대미인의 몸매라고해도 좋은만큰 작아 졋다
자세이 보면 가슴은 그래도 큰편에 속한다.
중요한건 하체에 있다
그전에는 대부분 평평한 형태로 표현했다
그러나 앙코르 왓의 압살라는 하체에 옷의 장식이 없으면 옷을 입지 않았나..할정도로 하체를 그대로 노출 시켯다...
그만큼 힘에 자신이 있어서일까???
이때부터는 사자의 엉덩이가 땅에서 일어나서 완전이 들고 있는것 처럼 압살라의 모양이 관능적으로 느껴진다
바이욘의 데바타..
몸매는 앙코르왓과 차이가 없으나 가슴이 아주 밋밋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체도 약간의 굴곡만 있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자야바르만 7세 시절에 만들었는데..
그 힘있는시절에 관능미를 왜 없애고 밋밋하게 표현했을까????
그건 국교를 불교로 받아 들인데서 찾을수 있었다
생식,번식을 당연한것으로 받아 들였던 힌두와는 달리 해탈과 중생구제를 추구하던 불교에서는 여자의 관능미는 숨겨야할 대상으로 여긴것 같다
그래서 이럿게 표현한게 아닌가 추정한다
지금 제가 올린 자료는 재미로 보는 자료랍니다
이 자료의 문제점은 쁘레야꼬에서는 풍만하다가 약간 줄어드는 코케이와 프놈바켕에 대해서는 수도를 옮겨 힘이 약해져서 그런게 아닌가 라고 추정할 뿐이며
왓에서 절정을 이루다가 바이욘에서 약해진 이유를 힌두와 불교의 이유만으로 설명하기는 약한부분이 있습니다
보통 드바라팔라는 남자 수문장을 이야기 하고 여자 수문장은 데바타를 말합니다
초기에는 연꽃을 들고 있기도 하고...후기에 가면 뱀을 목에 감고 있는 형국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초기유적에는 압살라가 나오지 않고 데바타가 출입문 주위에 나오게 되며 중기 이후 압살라가
나오면서 위치가 애매해 지기도 한다
압살라와 구별하는 방법중 하나는 발의 모양이다. 평평하게 하고 있으면 데바타, 춤을 추기 위해
발을 들고 있으면 압살라로 보기도 한다.
데바타는 그 사원을 지키는 수문장의 역활이며 압살라는 신을 위한 무희다
앙코르 시절의 압살라는 신왕일치 사상으로 본다면 후궁으로 볼수도 있다
앙코르 유적을 보다 재미난걸 보게 되었다
바로 데바타의 몸매가 변하는걸 볼수 있었다..
그리고 옷차림도 변한다.
쁘레야 코의 데바타다
전체적으로 덩치가 크고..가슴도 크다 상체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표현했다
수문장이지만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치마가 일자로 되어 있고 하체를 표현하지 않았다
890년대에 세운걸로 추정 한다
프놈바켕의 데바타
몸은 약간 슬립해졋다. 그럿지만 가슴의 크기는 상당이 크게 표현했다. 900년경 지은것으로 추정한다
코케르의 데바타
몸매는 슬립해 졋지만 상체에 가슴은 상당이 크게 표현되어 있다
940년경 만든것으로 추정한다
반데이 스레이의 데바탸 이다
동양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던 유적이다
코케이에서는 덩치가 약간 작아졋다가 다시 커졋다
쁘레야코에 비해서는 좀 작지만 가슴은 아주 크게 표현했다
960년대 지은것으로 추정한다
바푸온의 데바타
1050년에 지은것으로 추정한다
아직까지는 데바타가 미의 상징보다 다산의 상징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를 보면...
프놈바켕이나 코케이는 수도를 옮겻을때다.
그래서 그런지 몸매는 약간 작아 지지만 가슴은 크게 표현했다
그 당시 다산은 영아 사망율이 높은 관계로 여자가 해야할 큰 일이었고 가슴이 크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고 생각했다
이제 중기로 넘어간다
중기유적이자 앙코르의 가장 유명한 앙코르 왓의 압살라다
데바타가 있었나???
돌아와서 생각하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압살라 사진을 보면...
당시 아주 화려한 머리 장식과 몸매가 아주 슬립해 졋다
거의 현대미인의 몸매라고해도 좋은만큰 작아 졋다
자세이 보면 가슴은 그래도 큰편에 속한다.
중요한건 하체에 있다
그전에는 대부분 평평한 형태로 표현했다
그러나 앙코르 왓의 압살라는 하체에 옷의 장식이 없으면 옷을 입지 않았나..할정도로 하체를 그대로 노출 시켯다...
그만큼 힘에 자신이 있어서일까???
이때부터는 사자의 엉덩이가 땅에서 일어나서 완전이 들고 있는것 처럼 압살라의 모양이 관능적으로 느껴진다
바이욘의 데바타..
몸매는 앙코르왓과 차이가 없으나 가슴이 아주 밋밋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체도 약간의 굴곡만 있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자야바르만 7세 시절에 만들었는데..
그 힘있는시절에 관능미를 왜 없애고 밋밋하게 표현했을까????
그건 국교를 불교로 받아 들인데서 찾을수 있었다
생식,번식을 당연한것으로 받아 들였던 힌두와는 달리 해탈과 중생구제를 추구하던 불교에서는 여자의 관능미는 숨겨야할 대상으로 여긴것 같다
그래서 이럿게 표현한게 아닌가 추정한다
지금 제가 올린 자료는 재미로 보는 자료랍니다
이 자료의 문제점은 쁘레야꼬에서는 풍만하다가 약간 줄어드는 코케이와 프놈바켕에 대해서는 수도를 옮겨 힘이 약해져서 그런게 아닌가 라고 추정할 뿐이며
왓에서 절정을 이루다가 바이욘에서 약해진 이유를 힌두와 불교의 이유만으로 설명하기는 약한부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