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를 보면 유적이 보인다
동남아의 절대 강자였던 캄푸차 제국은 소승불교의 유입으로 인한 종교적인 갈등과 권력투쟁 등 내부적인 문제와 타이, 미안마, 라오스 등 신흥국가의 등장으로 급격하게 몰락한다.
세계사에서 퇴장한 그들은 슬프게도 그들의 역사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다만 유적의 비문에 새겨놓은 왕에 대한 찬양기록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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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프랑스 극동학원(EFEO)와 1908년 앙코르 유적 사무소가 생기면서 이 나라의 역사를 복원(?)하였다.
비문을 해석하고 중국, 인도 등 이웃나라와의 교역, 그리고 간혹 이웃나라의 책에 등장하는 캄푸차 제국의 기록을 근거로 이 나라의 역사를 유추 하였다.
그것을 토대로 정리한 역사다 보니 지금까지 정리한 내용과 다른 비문이 나오면 역사가 바뀌고 또 다른 기록이 나오면 역사가 바뀌는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적도 마찬가지다
언제 누가 누구를 위해 지었는지 전혀 기록이 찾기 힘든 유적이 있다.
대표적인 유적이 앙코르왓이다.
앙코르왓은 수리야 바르만 2세(1113-1150?)의 유적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누가 몇 년에 완성하여 어떤 신에게 헌정하였다. 라는 기록은 없다.
앙코르왓을 가끔 37년에 걸쳐서 만들었다. 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37년은 수리야 바르만 2세의 제위기간일 뿐이다.
심지어 그의 제위기간도 정확하지 않다.
1150년에 수리야 바르만 2세가 참파를 무찌르기 위해서 큰 군대를 일으켜서 보냈다- 라는 기록이 있고 그 뒤로는 어떤 비문에서도 수리야 바르만 2세가 나타나지 않고 3-4명의 왕으로 추정되는 이들에 대한 비문이 나오다가 1177년 참파의 공격으로 캄푸차 제국이 무너지게 된다.
즉 20여년의 혼돈으로 뒤에 즉위한 왕이 선왕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수리야 바르만 2세의 제위기간도 정확하지 않다.
또한 앙코르왓의 1층 왕의 행진에 보면 그곳에는 19명의 왕들이 행진을 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그곳에는 각각의 왕의 이름과 직위를 산스크리트어로 표기하였다. 수리야 바르만 2세는 그의 사후 이름인 `파라마비슈누로카`로 표기한 것을 근거로 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사후에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이 부조를 보면 앙코르왓의 조각은 그의 사후에도 일정기간 진행된 것으로 추정한다.
물른 그 뒤에 조각한( 동북쪽과 북쪽2개면 등 3개의 면은 1546-1564 앙찬1세와 2세가 조각하였다고 기록)조각을 제외 하고도 수리야 바르만 2세의 즉위기간에만 조각하지 않았으므로 왓의 건축시기에 대한 유추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유적연구가들은 비문이 없더라도 유추해 내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부조를 보고 유추하는 방법이 있었다.
나가, 사자, 압살라를 보고 유추하는 기본적인 방법이 있고 조각기법, 조각의 배치 등 전문적인 방법이 있다.
압살라를 보면서 보는 방법은 글을 올린적이 있다
http://cafe.naver.com/angkornet/61
오늘은 나가를 보면서 유적을 이해하는 방법을 적어 본다
제일 먼저 나가가 등장하는 곳은 롤로오스에 빠콩(881)사원이다
대가리가 7개 달렸으며 후광이 없고 대가리만 표시되어 있다.
4개의 나가중에 동문의 왼편만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대가리가 7개중에 오른쪽 두개는 흔적만 있지만 선명하게 남아 있다
비늘까지 선명한데 배한가운데 선명한 둥근 원
왕을 상징하고 우주를 상징한다
그리고 길게 뻣은 뱀의 몸통
약 100미터의 해자와 그의 몸의 길이는 같다.
해자의 끝부분의 꼬리의 흔적을 볼수 있다
즉 나가의 힘으로 악귀와 외부의 침입을 막는다
꼬께의 쁘라삿톰의 나가.
빠콩에 비해 작지만 대가리는 7개, 바닥에 앉아 있다
마찬가지로 해자의 처음과 끝을 같이 한다
쁘레하 비헤르의 나가
여기도 7개의 대가리와 배광은 없다.
그럿지만 이제는 땅바닥이 아니라 난간에 올려져 있다.
이젠 해자가 아니라 통로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젠 중기유적으로 넘어 가자
벙멜리아의 북문
배광이 생겻다.
이전에는 대가리만 조각되었고 이제는 돌판에 대가리를 조각한것과 같은 형태의 차이가 생긴다.
들어가는 참배로를 나가의 몸통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고 있다
이젠 사원전체를 나가나 혹은 용의 등을 표현하여 빈틈없이 지킨다
통로는 나가의 대가리를 들어서 용맹함을 나타낸다
왓의 참배로.
마찬가지로 길을 나가가 지키고 있다
왓의 나가.이전과의 차이가 눈에 들어올것이다.
벙멜리아의 나가들.
이젠 후기 유적
반티아이 츠마의 나가
자야바르만 7세의 유적부터는 나가의 한 가운데를 가루다가 자리잡고 있다
가루다는 왕을 상징한다
왜 가루다가 나가를 지배하듯이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았을까?
왕권이 강화하기위한 상징은 아닐지....
쁘레야 칸의 나가
이럿게 나가만 보더라도 설명문을 읽지 않고 아 저건 초기유적이야, 중기유적이야 라고 구별하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