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또 다른 불편한 진실
<킬링필드- 숨겨 진 진실>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위 증언은 폭격명령 거부죄로 기소 당한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 B-52 부조종사)이 1973 년 6 월 19 일 신성한 미 법정에서 증언한 말 입니다.
'영화 <킬링필드>는 아메리카 지상주의를 살포하고 진실을 호도하기 위해 만든 영화이다'
이 말은 1975년 4월17일 크메르 루주가 프놈펜에 입성할 당시 시드니와 함께 마지막까지 프랑스 대사관에 남아 캄보디아를 취재한 종군기자 나오키 마부치( 뉴스 카메라맨)이 킬링필드 영화를 보고난 후 뱉은 말 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캄보디아의 양민학살 사건인 소위 <킬링필드>는 1973~75 년까지 크메르 루즈가 집권하면서 자행 된 200 만 학살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기록이 항상 그러 하듯이 또 다른 진실이 감쳐져 왔음을 우리는 간과해 왔습니다.
물론 폴 포트를 위시한 크메르루즈군의 집권자들은 현재 <킬링필드>의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 되어 있고 역사적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또 다른 주범은 여전히 세계평화를 수호하는 천사로 위장 해 전 세계를 돌며 국익이라는 미명으로 상대 나라를 핍박하고 나락의 구렁컹이로 몰아 대는 짓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By the America, Of the America, For the America!!!
바로 미국 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킬링필드>는 1 차와 2 차로 구분해 명명해야 하고 전범재판 또한 영측의 책임자들을 모두 기소해야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회복될 수 있는 것 입니다.
1. 또 다른 킬링필드
1968 년 베트남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파리평화회담이 미국의 오판으로 인해 결렬되고 전쟁은 그 후 4 년간 더 연장 됩니다.
미국은 현대식 무기와 폭격기로 당장 월맹을 무력화 시킬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재래식 무기와 자살테러로 무장한 베트콩들을 격멸하는데 실패하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합니다.
이 때 베트콩들의 진입로를 원천 봉쇄해야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며
인근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 폭격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 계획안은 미국의회의 승인도 거치지 않은 위법 결정이었으며 1957 년 체결 된 제네바협정에서 정한 기본적인 선전포고도 없이 자행 된 세기적 범법행위 였습니다.
이 공습안을 기획한 사람은 1973 년 베트남전쟁을 종결시켰다는 명목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그 후 1975 년 사이공이 월맹군에 함락되자 메달을 반려 함) 한 그 당시 닉슨정부의 국가안전보좌관으로 맹활약한 헨리 키신저라는 인물 이었습니다.
1969 년도부터 1970에 걸쳐 캄보디아 지약에 투하 된 폭탄이 54 만톤에
이른다고 하며 이 폭격량은 2 차 대전 당시 일본 본토에 투하된 양의 3 배가 넘는다 하니 그 참싱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 할 것 입니다.
이 결과 아무 영문도 모른 체 캄보디아 양민 60 만명, 라오스 양민 35 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2. 200 만이라는 숫자
학살 제2기에 해당하는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사람들 수는 연구자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수많은 캄보디아 연구서들을 쏟아낸 데이비드 챈들러나 마이클 비커레이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가 대체로 극단적인 추산을 피한 경우로 꼽혀왔습니다.
여기에 학살 제1기에 해당하는 1969~73년에 아메리카가 폭격으로 죽인 양민 수를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약 60만명으로, 위 다른 연구자들은 40만~80만명 정도로 각각 추산하고 있습니다
.
이렇게 해서 제1기 아메리카 학살과 제2기 크메르 루주 학살을 모두 합해 10년 동안 약 150만~160만명에 이르는 양민들이 살해당했는데, 이게 킬링필드의 전모라고 보야야 할 것 입니다.
3. 전범재판
1997 년 미국이 휘어 잡고 있는 유엔에서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전범을 처단 한다며 폴포트 정권의 수뇌부 4 인방을 재판에 회부하였지만 교도소장을 역임한 두치에게 35 년형을 내린 거 외에는 아직까지 역사의 심판을 미루고 있는 실정 입니다.
킬링필드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국제여론이 높았지만, 훈센 정부는 미온적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이 때문에 크메르 루주 출신 대부분은 어떤 법적 책임도 지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왔습니다.
처벌받은 지도자급 인사는 99년 체포된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 투올슬렝 수용소(S-21 센터) 소장 두치가 거의 유일합니다. 두치는 이 수용소에서 1만6천여명을 고문·학살한 혐의로 지난 7월 국제재판소에 기소됐습니다.
얼마 전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이엥 세리가 지난 3 월 87 세의 나이로 자연사 해 버렸으니 결국 역사의 단죄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1 차 킬링필드를 책임져야 할 미국도 여전히 모든 양민학살의 범죄를 크메르 루즈군에 떠 넘기기에만 급급하니 억울하게 희생 된 양민들의 한을 어떻게 누가 나서서 풀어 줄 것인지 그 길은 더욱 멀어 보입니다.
이와 같이 미국이 주장하는 대로 1975~79년 크메르 루주 집권기만을 킬링필드로 부른다거나, 10여년 동안 진행된 킬링필드 책임을 모두 크메르 루주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 온당한 일일까요?
아메리카는 킬링필드를 모두 크메르 루주가 저지른 짓이라 잡아떼겠지만, 프놈펜에서 1번국도를 따라 약 35km 떨어진 프레크트렝 마을만 방문해도 1973년 B-52 전략폭격기가 무차별 포격을 가한 마을주민들은 아직도 당시 희생자 유골을 담은 보따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만천하에 드러난 크메르 루주쪽 학살주범 폴 포트와 달리 미국쪽 학살주범은 누구였는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모든 관련자들이 ‘최고 명령권자’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안보고문(1974년부터는 국무장관)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베트콩들이 남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공산당(CPK)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
당시 국가안보회의(NSC)를 주도하며 닉슨을 주무른 헨리 키신저가 강조한 캄보디아 비밀폭격 논리였습니다.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다.
이건 1973년 들어 결국 대캄보디아 비밀폭격을 눈치챈 의회가 공습을 중단하라며 난리를 치자, 키신저가 맞받아친 말이었습니다.
키신저에 따르면 60만~80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양민들이 베트콩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결론입니다.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베트콩을 공격했을 뿐이다.”
살아 있는 크메르 루주쪽 학살범으로 엥 사리, 키우 삼판, 눈 치에, 타 목을 기소하겠 다면 적어도 아메리카쪽 학살주범인 키신저와 미국 정부 또한 같은 법정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미국 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양심 있는 지식인들의 목소리지만 결국 허공 속의 메아리로만 전락 될 것이 분명하니 역사적 진실규명은 낙타가 바늘구명을 빠져 나가는 거 보다 힘들다는 성서의 내용보다 더 힘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