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상식 5 -앙코르의 3 명의 왕
앙코르유적을 감삼하면서 많은 왕들이 곳곳에서 등장 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왕 3 분을 소개 합니다. 3 분의 왕 만큼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1. 자야바르만 2 세--프롬꿀렌
서기 802 년(우리나라로 치면 통일신라 중후기에 해당 합니다.) 자바에서
15 년간 인질로 있다가 풀려 난 자야바르만 2 세가 수진합, 욱진랍 두 개의 진랍국을 병합한 후 촤초의 앙코르제국을 건립한다.
타국의 침략에 대비해 4 곳의 도읍지를 정하고 그 중 한 곳인 마헨드라
파르바타(지금의 프롬꿀렌)에서 왕은 신이고 신이 곧 왕이다라는<데바
라자-Devaraja>의식을 거행해 국민들의 지지와 결집을 모아 앙코르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운다.
이 왕의 재임시의, 활동과 국정운영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고 비문
에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추정할 뿐 이다.
850년 앙코르제국의 다음 도읍지인 하리할랄리아(지금의 롤로스유적군)
에 돌아 와 숨을 거둔다.
2. 수리야바르만 2 세---앙코르왓트
12세기 초 롭부리Lopburi지방에서 왕족으로 태어난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지혜롭고 총명했고 용맹했다. 거기다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되겠다는
야망도 있었다.
1113년, 드디어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백부인 다닌드라바르만 1세 (Dharanindravarman I )를 죽이고 17세 어린나이에 명실상부한 통일
크메르제국의 군주로 등극한다.
역사는 조카가 백부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코끼리에 올라 왕을 살해했다. 가루다Garuda가 뱀을 습격하여
살해한 것과 같았다>. 이 젊은이가 바로 앙코르왕조의 수리야바르만2세
(재위 1113~50경)이다.
왕이 된 그는 이제까지 모시던 힌두의 시바Shva 신 대신, 비슈누Vishnu 신을 모시고, 비쉬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강력한 신권정치로 나라를 평정해
나가기 위해 위대하고도 불가사의하며 세계 최고의 아름답고 웅장한
사원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 대역사는 30여년에 걸쳐 그의 재위 시대를 지나 다음 왕 시대에
완공 되었다.
최초 그 사원의 힌두의 신 비쉬누에게 봉헌 되었으나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 사용 된다.
그 사원이 바로 인류가 남긴 위대한 건축물 유산인 앙코르왓트 사원이다.
앙코르 왕조는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 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이곳 앙코르와트가 있는 앙코르 시는 크메르 제국의 중심지인 이곳은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게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이었다.
크메르 민족의 독특한 문화양식으로 전성기를 이룬 고대국가 앙코르는
1431 년, 타이 아유터이왕조의 침략으로 400여년이 넘게 역사의 중심에서
사라지게 된다.
3. 자야바르만 7 세---앙코르톰
초기생애
앙코르 왕가 출생이며 자야라자데비 공주와 결혼했다. 그
녀는 신심이 깊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과 재위 초에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죽자 자야바르만 7세는 그녀의 언니와 결혼했다.
언니 역시 신심이 깊었으며 학식이 있어 이전에 그녀는 불교사원의
수석교사로 임명된 적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현재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참파 왕국
근처에서 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 다란인드라바르만 2세(1150~60 재위)가 사망했을 당시 그
는 참파에서 군사 원정중이었으며 그의 형(사촌인 듯함) 야소바르만 2세(1160~66 재위)가 즉위하자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에 그대로 남았다.
뒤에 그는 궁정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캄보디아로 돌아왔으나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1166~77 재위)이 야소바르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고향에 머물면서 왕위를 계승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약 12년 후 자야바르만 7세가 5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참파 왕국이 침입하면서 그 기회가 생겼다.
참파의 침입으로 트리부바나디티아바르만은 죽고 앙코르는 약탈당했으며 참파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5년이 채 못 되어 침략자를 내몰았으며 캄보디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181년 그는 드디어 61세의 나이로 그는 재건된 크메르 제국의 왕위에
올랐으며 30년에 걸친 황금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이 기간에 제국은 그 영역 판도나 왕실 건축 분야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건설사업
자야바르만 7세는 재위 동안 정복사업을 계속 벌여 참파, 남부 라오스,
말레이 반도와 미얀마 일부를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자신의 정력이나 조직 능력을 선대의 왕들이 해왔던
종교적·정치적 건설사업에 쏟았다.
그는 바욘을 비롯한 많은 멋진 사원을 새로 건립했다.
사원은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대승불교식 피라미드 사원으로서 왕실신앙의 중심점이자 자야바르만 자신의 능묘로 지은 대승불교식 장례사원으로 자야바르만의 부모에게 헌정되었다.
수많은 지방 사원에는 부처의 상징과 함께 자야바르만 7세를 묘사한 왕실 불상의 축소 모형을 두었는데, 그 원형은 바욘에 안치했다.
그는 현재의 앙코르 톰인 앙코르 시를 재건했고 간선도로도 확대하여 도로는 바욘과 왕국으로부터 각 지방으로 뻗어나갔다. 이 도로들을 따라서 100개 이상의 휴양소가 지어지고 100개 이상의 병원이 만들어졌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국의 전역에 병원들을 설치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위대한 부처인 바이샤지아구루 바이두리아프라바의 가호 아래 두었다.
그의 시대에 건설된 사원들에서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자야바르만 7세는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건설사업을 진행하는 데 집착했던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사원 건설에 조급한 마음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많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부족한 시간이나마 효율적으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학자들은 대부분 불교건축물인 방대한 건설계획은 불교,
특히 불교사원 건축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아내 자야라자데비와 그녀의 언니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나병환자로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학자들의 추측이 맞는다면 자신의 죄를 덜고 공덕을 쌓음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겠다는 마음이 그의 신심과 종교적 열정에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든지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크메르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자야바르만 7세가 이룩한 정도의 업적을 남긴 왕은 거의 없다.
현대의 명성
앙코르 왕국의 역사에서 자야바르만 7세가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후대 캄보디아 역사책에는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근대에는 그의 치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흥미를 끌면서 자야바르만 7세는 모범적인 민족영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캄보디아 국가 영토를 가장 넓게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캄보디아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보다 공정하다.
학자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성취한 거대한 업적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왕조의 인적·물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했기 때문에, 이후에 크메르
제국이 창조성을 상실하고 마침내 몰락하게 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