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그림자 전쟁. 캄보디아 2차 킬링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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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그림자 전쟁. 캄보디아 2차 킬링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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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즈의 인민재판

1975417일 프놈펜 시내에 검은색 작업복에 스카프를 메고 AK소총을 메고 크메르 루즈군이 나타난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환호하던 프놈펜 시민들은 몇 시간 뒤 공포에 빠진다. 모든 주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다.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공개 인민재판이 열린다. 살인, 강도, 사기 등은 재판 하지 않았다. 민족을 배반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론놀정권에 협력했냐. 하지 않았느냐, 미군에 협력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만 재판했다. 유죄는 사형이다. 재판장에서 즉결 처형을 자행 했다. 돌로 때려죽이기도 하고 죽창으로 죽기이도 했다. 의사. 판사. 교사 등 지식인 중 크메르 루즈에 협력했던 일부를 제외하고 자기들 편에 서지 않으면 미국에. 론놀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죽였다. 그렇게 3일간 인민재판을 통해 약 50만의 사람들을 학살 했다.

죽음의 행진

쌀이 9일치밖에 없었던 프놈펜은 420일부터 모든 시민을 줄을 세우고 미군의 폭격이 있을 것 이라는 거짓 정보와 저수지와 수로. 농지를 재건한다는 명목에 프놈펜에 거주하는 약 250만의 사람들을 쌀 한톨 삽 한 자루 주지 않고 죽음의 행진을 보낸다. 프놈펜만이 아니라 대부분 도시에 있던 도시민을 협동농장으로 보낸다. 그 과정에서 폴폿의 친형도. 시하누크빌 국왕의 4왕자와 7왕자도 죽기도 한다.

 

폴 폿(Pol Pot, 1925-1998))

본명은 쌀롯 써(Saloth Sar)로 캄보디아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군인. 정치인이자 공산주의 혁명가다. 풍족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49-1953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그 시절 유럽에 만연했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 접하게 된다. 돌아온 그는 학교의 선생으로 재직하다 공산주의자로 수배가 되어 밀림으로 들어갔다. 1960년 캄보디아 공산당 창당에서 중앙상임위원에 뽑히게 되고 1963년 당 서기장이 된다. 1970년 민족해방군 최고사령부 부의장이 되고 1976년 민주 캄보디아 총리가 된다.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정권을 잃고 게릴라전을 전개하다 크메르 루즈군에 체포되어 1998년 가택연금 상태에서 죽었다. 어릴때는 닭을 잡지 못할 정도로 유약했다고 평가를 받은 그는 정권을 잡은 후 협동농장. 사상개조 등 끔찍한 2차 킬링필드를 기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군

크메르 루즈군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전쟁 중일때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 했고 농가에서 식사를 하면 식대를 지불 했다. 대부분 캄보디아는 자영농이었기에 일부 비협조적인 농민들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랬기에 크메르 루즈는 미국의 꼭두각시에게 신음하던 캄보디아 국민을 구하는 해방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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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군

인민을 해방 시킨다던 크메르루즈는 국가를 장악하고는 잔인한 점령군으로 변했다. 프랑스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키우 삼판의 논문의 크메르 루즈의 정책지표였다. 캄보디아의 힘은 농업에서 나온다고 믿고 농민=생산자, 도시민=소비자 라는 이분적인 사고와 자본주의의 병폐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전 국민을 개조 하고자 한다.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고 가족단위를 해체하고 집단농장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한다. 결혼도 크메르루즈가 주관해서 진행 했다. 매일 저녁마다 집단농장에서는 의식화 교육과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잘 따르지 않으면 공개 처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의 숫자를 100만에서 150만으로 추정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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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즈의 패망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베트남에서 결성 되었고. 1960년대 말에는 월맹군은 크메르 루즈군을 지원 했지만 1970년대 초반부터 월맹군이 승리하면 캄보디아도 영향권에 들겠다고 판단한 크메르 루즈군은 1975년 점령군이 되면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보다 중국과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고 국경 문제 등으로 베트남과 신경전을 계속 벌렸다.

그러던 19781225일 베트남은 국경을 침공 하여 단 2주만에 프놈펜을 함락 시키고 2개월 뒤 전 국토의 90%를 차지한다. 그리고 크메르 루즈군은 다시 산악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친다.

베트남군대는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것에 반대한 미국. 중국. 태국. 등이 크메르 루즈군을 지원하는 우스운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다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19899월 베트남 군대는 철수하고 세계평화 유지군이 치안을 담당하고 19935월 선거를 통해 합법적인 정부를 탄생 시킨다.

 

마지막 이야기

19991231일로 공식적인 내전은 끝이 났다. 내전의 피해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 왔다. 캄보디아는 미국. 소련. 중국 등 세계열강의 대리전으로 전 국토가 폭격으로 파괴되고 농지가 대부분 파괴되고 인구의 3분의 1이 죽은 슬픈 나라가 되었다.

누구의 잘못으로 시작 되었나? 누가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였나? 캄보디아 사람들은 그 주체가 아닌 것 같다.


 

2 Comments
덩달아 2019.08.27 23:22  
좋은 글을 올려주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캄보디아의 유적뿐아니라 캄보디아의 아픔과 가려진 진실까지 알아가는 모습을 보니 갈수록 캄보디아에 깊게 빠지시는것 같습니다.
jonahm 2021.02.27 20:11  
너무나 긴 내전기간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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